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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52)

태조 어진 고종 9년(1872년) 전주 경기전의 어진이 낡았기 때문에 박기준 등에게 영희전의 어진을 모사하게 한 그림이다. 사진가 권태균


? 이성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계기는 위화도 회군이다. 우왕 14년(1388) 3월 명나라가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갈등이 발생했다. 그간 철령위를 함경도 원산만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최근 중국 사서(史書)를 근거로 ‘철령위가 만주에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 ? 요동을 차지하려는 고려와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으려는 명의 갈등이 철령위 설치로 나타난 것이다. 명나라에서 요동 반환을 거부하자 우왕은 무력 점령을 결심하는데, 이성계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치는 것,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온 나라 군사를 들여 원정하는 틈을 타 왜적이 활개칠 것, 장마철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역병을 앓을 것.” ? 이성계의 원정불가론이 우왕과 최영에 의해 거부되면서 요동정벌군이 꾸려졌다. 정벌군은 말머리를 돌렸고 회군했던 여러 장수들이 급히 우왕을 추격하자고 요청하자 이성계는 거절하고, 군사들에게 “너희들이 만일 승여(乘輿: 우왕의 가마)를 범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경계할 정도로 대세는 이미 결정 난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도에서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우왕을 폐하고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우자”고 회유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회군세력 사이 권력투쟁의 서전은 조민수의 승리였다.


? 하지만 회군 정국은 정도전과 조준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급격하게 전환된다.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이 정도전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다. 조준은 1388년 7월 “전제(田制: 토지제도)를 바로잡아 국용(國用)을 족하게 하고, 민생을 후하게 하는 것이…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회군 정국을 토지개혁 정국으로 바꾸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토지개혁 정국이 잘 짜인 개국 프로그램임을 말해준다. 사전을 혁파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토지정책이 개국의 명분이었다.? 회군 세력이 사전 혁파를 들고 나오자 권세가들의 침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고, 천명의 소재가 확인됐다. 반면 이성계의 경쟁자였던 조민수는 “사전(私田) 개혁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내쫓았다”는 고려사절요의 기사처럼 사전 개혁에 저항하다가 제거되었다. 이런 와중에 최영의 생질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 등이 여주로 이배(移配)된 우왕을 몰래 만나 “역사(力士) 한 사람을 얻어 이시중(李侍中: 이성계)을 제거하라”는 지령과 함께 칼 한 자루를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 이성계와 정도전 등은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므로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으니, 마땅히 가왕(假王: 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진왕(眞王)을 세워야 한다”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도 쫓아내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공양왕을 세웠다.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은 조선 개국 뒤에도 계속돼 우왕과 창왕을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고 기록했다. 물론 이는 새 나라 개창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미지 조작에 불과하지만 핵심은 토지개혁이었다. ? 원래 정도전이 구상한 토지제도는 모든 백성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는 계구수전(計口收田)이었으나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자는 18~19인에 불과했다. 권세가들의 격렬한 반발 때문에 직역(職域)이 있는 자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과전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천명의 소재가 확인되고 새 나라 개창 준비가 끝난 것이었다.


?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이 위화도 회군을 건의했을 때 이성계 추대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왕(王)씨가 종성(宗姓)인 나라에서 이(李)씨가 왕이 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조준 등이 기획한 토지개혁을 통한 개국 프로그램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이성계는 스스로를 낮추는 처신으로 주위의 신망을 얻고, 정도전·조준 등의 개국 프로그램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고려 왕조 백관(百官)들의 추대 형식으로 새 왕조 개창에 성공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선양 형식으로 개창되었지만 불안한 신생 왕조일 수밖에 없었다.


? 신생 왕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속성 확보였고, 그 핵심은 세자 책봉이었다. 그래서 개국 공신들은 개국 직후부터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러나 개국 공신들과 이성계의 생각이 달랐다. 강씨 소생을 세우려는 이성계의 뜻과 방번만은 안 된다는 공신들의 최대공약수가 방석으로 낙착되어 8월 20일 방석(만 10세)이 세자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향처(鄕妻:고향에서 얻은 부인 한씨) 소생의 장남 방우(芳雨)의 나이 만38세였으며, 공신들과 부친 추대 계획을 세웠으며 개국 석 달 전 정몽주를 격살한 공이 있는 5남 이방원의 나이 만25세였다. 게다가 방원은 물론 차자(次子) 방과(芳果:정종), 사자(四子) 방간(芳幹)을 비롯해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은 대부분 사병을 갖고 있었다. 이성계는 상식을 무시한 세자 책봉이 화란을 일으킬 것이란 사실을 무시했다.


? 이런 와중에 이성계는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새 국호를 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명나라는 태조 2년(1393) 2월 조선을 선택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에서 “조선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기자·위만이 바로 그들”이라고 고조선을 이은 국호로 생각했다. ? 태조 1년(1392) 10월 정도전은 신왕조 창업을 알리는 계품사(啓稟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3월 귀국했다. 그런데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정도전이 요동을 오갈 때 여진족 장수들을 회유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심지어 주원장은 사신들을 억류하면서 정도전의 송환을 요구했다. ? 태조 6년(1397) 11월 명나라에 억류되었던 정총(鄭摠)·김약항(金若恒)·노인도(盧仁度)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성계는 명나라 정벌 결심을 더욱 굳혔다. 왕자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시키든지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방원(태종)은 8월 26일 전격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의 요동 정벌파는 물론 세자 방석과 방번, 경순공주(敬順公主)의 남편 이제(李濟)마저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정종 2년(1400) 1월 28일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정종 2년(1400) 7월 세자 방원이 태상왕(太上王)이란 존호를 올려 달래려고 하자 이성계는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내응한 조온(趙溫)·조영무(趙英茂)·이무(李茂)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방원이 조온 등을 귀양 보내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이성계는 8월 21일 정종과 세자 방원이 헌수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 정종 2년(1400) 11월 11일 정종이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자 다시 냉전 기류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2월 덕수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해 잔치를 베풀고 또 직접 태평관으로 가서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태종의 왕권은 확고했고, 이성계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82호 2010년 9월 5일, 제182호 2010년 9월 12일, 184호 2010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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