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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마오, 미군 반대 시위 확산되자 ‘외곽 때리기’

1 미군의 폭행에 항의하며 미군 철수를 외치는 여학생들. 1947년 1월, 수도 난징(南京).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산다. 결국은 실망과 좌절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뻔히 알면서도 항상 까먹는다. 항일전쟁 승리 후 중국인들은 희망에 들떴다. 환호는 잠시, 세상은 더 꼴불견으로 돌아갔다. 지식인들은 잘난 척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고위 공직자들은 미꾸라지 근성을 맘껏 뽐냈다.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지며 아래 사람 윽박지르고 높은 사람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재주도 있었다. 남 핑계 대는 솜씨 하나는 세상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았다. 우파는 맹목적이고 좌파는 유치했다. 국·공 양당은 내전 준비에 골몰했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84-

태평양전쟁 시절, 중국은 2차 세계대전의 3대 전구(戰區)중 하나였다. 미국은 중국전구에서 중국군과 대일 작전을 함께 했다. 일본 패망 후 동맹국 자격으로 국·공 양당의 조정에 나섰다. 중국인들은 미국에 호감을 느꼈다. 맹우이며 민주국가인 미국이 나서면 내전 종식과 연합정부 출범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미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온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에게 희망을 걸었다. “마셜 원수는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다. 국·공 간의 모순을 공정하게 조정해줄 사람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마셜을 믿는다.”



마셜은 진절머리를 내며 중국을 떠났다. 중국인들의 희망은 여전했다.



“3개월 만에 18년간 쌓여있던 내전 위기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중국을 대신해 평화·민주·단결·통일 대업의 기초를 공고히 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주석과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주석의 영명한 영도에 감사해야 함이 마땅하지만, 마셜 장군의 성의와 인내에 더 감사해야 한다. 세 사람의 밀접한 합작이 없었더라면 중국의 새로운 역사는 성공할 방법이 없었다. 빨리 돌아와 중국이 평화와 단결의 대로(大路)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대한다.”



마셜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46년 4월 말 다시 중국 땅을 밟았다. 국민정부에 5억 달러를 지원하기 위해 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중공은 손이 미치는 언론기관을 깡그리 동원했다. 미국의 내정 간섭을 우려하는 글들이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의도를 몰랐을 때 마셜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미 7함대가 얼렁뚱땅 칭다오(靑島)로 이동하고, 트루먼은 조차(租借)연장을 요구했다. 미국은 진작부터 군사 대표단을 파견해 국민당 군대를 훈련 시켰다. 미국의 간섭과 지원이 그치지 않는 한, 중국의 내전이 중지될 가능성은 없다.” 비슷한 논조들이 줄을 이었다.



 

2 말년의 선준(왼쪽)과 딩충. 2007년 겨울, 베이징. [사진 제공 김명호]



6월 하순, 내전의 막이 올랐다. 시사 만화가 딩충(丁聰·정총)을 필두로 100여 명의 문인·예술가들이 미국 정부에 보내는 서신을 공개했다. “중국에 주둔 중인 미군을 즉각 철수해라. 공정한 태도로 중국의 내전 종식에 협조하기 바란다.”



며칠 후 트루먼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를 주중대사에 임명했다. 좌파 지식인과 언론은 만세를 불렀다. “현명한 선택이다. 중국에서 태어나 반평생을 중국에서 보낸 사람이다. 중국의 운명에 관해 어느 미국인보다 관심이 많다. 미국의 중국 정책이 변했다는 신호로 봐도 된다. 마셜은 엉터리다. 스튜어트야 말로 우리의 희망이다.”



스튜어트의 첫 번째 담화는 실망 그 자체였다. “미국의 중국정책은 변한 것이 없다. 방식은 수정할 생각이다.”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은 미국 사정에 밝았다. “중국 인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성립되기 전까지 미국은 현 정부에 대한 군수물자 공급과 경제 지원을 중지하기 바란다”며 침묵을 깼다.



8월 26일 사태를 관망하던 민주인사들이 기자 간담회를 자청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국민당 지원은 평화를 추구하는 중국인의 기본 정서에 위배된다.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만 있으면 중공을 격퇴할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내전 2개월이 지났지만 국민당은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다. 중국의 평화는 미국이 국민당 지원을 중단할 때 시작된다.”



선충(沈崇·심숭) 사건은 발생 시점이 묘했다. 중공이 개입했다는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미군 비난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자 마오쩌둥이 대 전략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학생 운동은 애국운동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뤼순(旅順)에 주둔중인 소련 해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당장 중국에서 떠나라. 계속 남아있으면 내전을 중지하고 소련과 싸우겠다.” 국민당과 미국은 거론도 하지 않았다.



선충 사건은 반 기아(反飢餓), 반 내전(反內戰) 운동으로 번졌다. 상처를 받은 선충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네 이름은 충산준링(崇山峻嶺)에서 따왔다”는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났다. 선준(沈峻·심준)으로 개명한 후 푸단(復旦)대학 외국어학과에 입학했다. 중학교 때부터 잘했던 영어는 듣기도 싫었다. 러시아어에 머리를 싸맸다. 신 중국 성립 후 딩충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선충 사건의 여파는 타이완의 청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47년 2월 27일, 엄청난 사건이 타이베이에서 발생했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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