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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섭고, 저는 죄송하고…’골목’

저는 원래 골목을 좋아합니다. ‘군자대로행’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밝고 떳떳하기는 역시 큰길이 낫겠지만, 그곳에는 차도 사람도 많아 복잡하고 시끄럽지요. 골목은 어둡고 후미지긴 해도 호젓하고 조용합니다. 대부분 지름길도 골목으로 나 있고요. 그래도 저는 당분간은 골목으로 다니지 않으려고 해요.



저는 골목에서 태어났고 골목에서 자랐습니다. 저를 키운 건 팔 할이 골목이었어요. 제가 자랄 때 골목은 집의 확장이었습니다. 집이 좁아서 골목을 마루와 마당으로 썼습니다. 방과 부엌과 욕실로도 썼고요. 골목 한 켠에 자리를 깔고 엎드려 숙제를 했습니다. 거기서 국수를 먹고 수박을 먹었어요.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잠이 들기도 했지요. 골목에는 추억이 많아요.



김상득의 행복어사전

골목은 첫사랑 같은 거죠. 첫사랑이 사는 집은 다들 골목에 있지 않았나요? 그 사람과 첫 입맞춤을 한 곳도 골목이 아니었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꾼 그를 찾아가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던 곳도 보안등 아래의 희미한 골목이었겠지요. 골목에는 추억이 많지요.



그래도 이제 한동안 골목으로 다니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일하는 사무실이 강남역 11번 출구 쪽에 있어서요. 제 자리에서 몸을 돌려 창 밖을 내려다보면 강남역 10번 출구가 바로 보이거든요.



퇴근은 보통 8시에 합니다. 강남에서 버스를 타면 9시쯤 서현중학교 정류소에 도착하죠.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면 골목을 지나가야 합니다. 정류소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이 골목밖에 없는 건 아니지만 다들 이곳으로 다닙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당신의 뒤에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중학교 건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아파트가 있지만 밖에 나와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로등이 있지만 오늘따라 더 어둡게 느껴지네요. 오늘 이 시각 이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은 당신과 저 둘뿐입니다.



처음에 당신의 걸음은 평화로웠습니다. 아마 당신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속도로 걸어갔을 겁니다. 제 앞에서 걸어가던 당신의 걸음을 제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으니까요. 원래 제 걸음은 느린 편이지만 이렇게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저도 제법 속도를 내는 편입니다. 늦은 저녁을 함께 먹으려고 아내가, 시장한 아내가 집에서 시계를 보며 기다리고 있거든요. 제 마음의 다리는 바쁘지요.



그렇게 바짝 당신 뒤에 다가갔을 때 저는 보았습니다. 당신의 ‘흠칫’을요. 당신의 ‘쭈뼛’을요. 당신의 팔과 다리에 소름처럼 돋았을 불안과 공포를요.



만일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서로 눈인사나 목례를 나누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밤이고, 이곳은 골목이고, 당신의 여자고, 나는 남자입니다. 당신은 내가 무섭습니다. 제 외모가 특별히 험악해서 당신이 저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제 외모가 좀 험악합니다만.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불안처럼, 당신의 공포처럼, 당신의 호흡처럼 당신의 걸음이 빨라지네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저는 마치 당신을 뒤쫓아가는 악당 같습니다. 저는 걸음을 늦춥니다. 더 긴장한 당신도 걸음을 늦춥니다. 당신의 온 신경이 제게로 쏠려있는 것일까요. 저는 휴대전화기를 꺼내 켭니다. 제가 다른 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신호를 당신에게 보내려는 것이죠. 전화기 불빛에 비친 제 얼굴이 당신을 더 공포에 질리게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것은 어쩌면 신영복 선생이 말씀한 여름 징역의 고통에 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 징역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여름 징역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선생은 말했습니다. 더운 여름 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감옥 안의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그저 37도의 불덩어리로 느끼게 한다지요. 여름 징역은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만들기 때문에 형불 중에 형벌이었다지요. 그러니까 저의 어떤 행동이 아니라 저의 존재 자체가 당신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당신의 뒤에서 저는 쩔쩔매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골목으로 다니지 않으려고 해요. 당신이 저를 무서워하지 않고 저는 당신에게 죄송해 하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말이죠. ●



 



 



김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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