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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풍요의 관서 화단, ‘대교약졸’ 화풍 뽐내다

평양 출신 김윤보의 ‘사계산수도십폭병풍’(20세기 초반), 종이에 먹, 129.5 x 32.5cm

평양과 경성에서 활동한 김규진의 ‘묵죽도’(20세기 초반), 종이에 먹, 213 x 66cm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이사장 윤재륜) 신사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특별전 ‘근대회화의 거장들-서화에서 그림으로’(6월 16일~10월 29일)는 흥미로운 지점을 파고든다. 20세기 근대화의 진행에 따라 조선의 ‘서화’가 서양식 ‘그림’으로 계승되기 직전까지의 결과물, 그 변화의 산물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 말기 대표적인 묵란화가로 꼽히는 석파 이하응(흥선대원군)을 비롯해 소치 허련, 오원 장승업부터 조선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인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을 거쳐 한국 근대화단의 1세대로 불리는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묵로 이용우에 이르기까지 총 38명 작가의 작품 80여 점이 나왔는데, 대부분의 작품이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호림박물관에서 만난 근대 서화와 그림들

이번 전시에서 지난 5월 타계한 호림(湖林) 윤장섭 전 이사장(1922~2016)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고미술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작품을 수집해온 윤 전 이사장은 이번 전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는데, 얼마 전 경매에서 운미 민영익의 ‘노근란도’를 구입하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소장품전의 전시 콘셉트를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장훈 학예연구사의 전언이다.



전시는 ‘산수-와유(臥遊)에서 풍경으로’ ‘사군자-묵향으로 쓴 문인의 이상’ ‘인물-필묵으로 그린 염원’ ‘화훼-화폭에 담은 소자연’ 4개 부문으로 구성됐다.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지금까지 서울화단에 가려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던 평양과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關西)지역 화풍에 대한 집중 소개와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현대적 미감을 추구한 몇몇 작가들의 노작이었다.



 

평양 출신 김윤보의 ‘사계산수도십폭병풍’(20세기 초반), 종이에 먹, 129.5 x 32.5cm



평양과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관서 화단은 서울과는 또 다른 화풍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자신을 거부하는 고려 유생들이 괘씸했다. 그래서 개성 선비는 100년간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하게 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서는 ‘서북지방 사람은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 까닭으로 평안과 함경 두 도에는 삼백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벼슬길이 막힌 서북 사람들은 상업으로 눈을 돌렸다. 개성에서 송상(松商)이, 평양에서 유상(柳商)이 나왔다(유상은 평양이 버들로 유명한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송상은 인삼을 팔기 위한 물류 체계를 전국에 구축했고, 유상은 교통이 발달한 평양에서 청나라와의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이 두 곳이 경제적?문화적 풍요로움을 갖추게 된 이유다. 이를 두고 언론인 장지연은 “문명의 개화를 말할 때는 반드시 관서 지방(西道)을 으뜸으로 여긴다”고 썼다.



이장훈 학예사는 “관서 지역 화가들은 한학에 대한 수양을 중요시하며 시서화를 겸비하는 풍모를 지녔다”고 말했다. 손가락이나 손의 일부를 붓처럼 사용하는 지두(指頭) 화법을 애용한 것도 특징이다. ‘황씨 4형제’로 불리는 황종하·성하·경하·용하 형제는 개성을 대표하는 서화가인데, 특히 황성하는 지두화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의 ‘지두산수도’는 ‘정말 훌륭한 기교는 오히려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는 뜻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을 떠올리게 한다.

평양과 경성에서 활동한 김규진의 ‘괴석묵죽도’(20세기 초반), 종이에 먹, 144.0 x 45.5cm



도화서 화원 화가 석연 양기훈, 근대 평양화단 형성에 큰 영향 김현권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은 “평양 미술계의 주류는 18세기 서예가 조광진에서 시작돼 서화가 이희수로 이어졌고 다시 이희수의 생질인 김규진과 이희팔의 제자인 양기훈으로 넘어간다”고 설명한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은 열여덟에 청나라로 건너가 8년간 서화를 공부해 모든 서법에 통달했다. 이 서법을 토대로 그린 묵죽?묵란도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규진 화풍의 절정이라 꼽을만한 통죽(筒竹)을 볼 수 있다. 끝이 부러진 굵은 대나무와 가느다란 새 대나무의 대비를 통해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절개를 담아냈다. 이 학예연구사는 “전통적으로 앞에 있는 대나무 잎은 진하게, 뒤에 있는 잎은 연하게 처리해 원근감을 주는데 해강은 그 반대로 앞이 옅고 뒤를 진하게 처리해 시각적으로 기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또 “서예의 필법으로 활달하고 거침없이 뻗어 올라간 통죽을 그리면서 그 주변은 작고 부드러운 잎사귀로 채워 강렬한 시각적 대비도 이끌어냈다”고 덧붙였다.



일본으로 가서 사진술도 배워온 해강은 1907년에는 천연당 사진관을 개설해 사진 대중화에 앞장섰다. 1913년에는 최초의 화랑인 고금서화관을 열기도 했다. 그는 영친왕의 서예 선생도 지냈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행보를 보였다.



해강에 앞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한 석연 양기훈(1843~1911)은 도화서 화원 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일재 김윤보(1865~1938)와 수암 김유탁(1875~1936) 등을 제자로 양성해 근대 평양화단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역동적인 움직임의 기러기 그림으로 유명한데, 그는 “능라도에 있으면서 갈대밭에 앉아있는 기러기를 늘 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기러기만큼 즐겨 그린 것이 백로다. 19세기 화가들은 길상적 의미를 고려해 화사한 색깔의 백로를 암수 한 쌍으로 많이 그렸지만, 석연은 수묵을 이용해 한 마리의 백로와 갈대만 주로 그렸다. 이번 전시에 나온 ‘백로도’는 다리 하나로 고고하게 서 있는 백로의 자태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평양 화가들의 세는 커져갔다. 김규진과 김유탁은 1907년 한성에서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교육기관인 ‘교육서화관(敎育書?館)’을 개관했다. 김유탁과 김윤보는 대원군의 하인 출신으로 대원군 못지않게 난초를 잘 그렸던 김응원을 끌어들여 1913년 평양에 ‘기성서화회(箕城書畵會)’를 설립했다. 기성서화회는 경성의 안중식과 조석진이 이끄는 ‘서화미술회’와 쌍벽을 이뤘다.

‘그림 신동’ 묵로 이용우의 ‘화조도십폭병풍’(20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각 139.4 x 34.8cm

평양 출신 양기훈의 ‘백로도’(19세기 후반), 비단에 먹, 140.7 x 39.9cm



묵로 이용우, 스승이 내린 호 버리고 전통 회화 탈피 강한 의지 오원 장승업(1843~1897)의 제자로 알려진 소림 조석진(1853~1920)과 심전 안중식(1861~1919)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자 근대화단의 스승이다. 이들은 ‘서화미술회’를 통해 후학을 양성했는데, 청전 이상범(1897~1972), 심산 노수현(1899~1978), 소정 변관식(1899~1976), 묵로 이용우(1902~1953)가 대표적이다.



특히 이상범과 노수현은 안중식의 수제자였다. 스승으로부터 심전(心田)이라는 호를 각각 한 글자씩(靑田, 心汕) 물려받았다. 해방 이후 심산은 서울대 교수를, 청전은 홍익대 교수를 지냈다. 대한민국 양대 미술대학이라는 흐름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들과 같은 스승을 모셨지만 묵로 이용우의 그림은 색달랐다. 그의 호는 원래 묵로(墨鷺)가 아닌 춘전(春田)이었다. 역시 심전에게서 전(田)자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스승이 내려준 호를 버리고 스스로 ‘묵로’라고 칭했다. 전통회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회화의 길을 걷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묵로는 검정 해오라기라는 뜻이다.



격동기에 빨리 세상을 접은 탓에 세상에는 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당대의 신동이었다. 1911년 불과 9세의 나이로 경성서화미술원(서화미술회의 전신)에 입학했다. 열여섯인 1918년에는 최연소로 서화협회 정회원이 됐다. 1920년에는 김은호·오일영·이상범·노수현과 함께 조선왕실 마지막 궁중회화라 꼽히는 창덕궁 대조전 벽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1923년 청전·심산·소정과 함께 ‘동연사(同硯社)’라는 모임을 결성했는데, 그는 “회화를 동양화와 서양화로 구분하지 말고 같은 평면 예술로 보자”는 등 진보적인 주장을 펼치며 서양의 명암법과 원근법, 일본의 신남화풍을 섞은 파격적인 화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새와 개구리’는 묘한 에너지로 충만한 작품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미소를 띄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개구리와 그런 개구리를 뒤에서 냉정하게 쳐다보고 있는 새의 표정과 날카로운 부리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또 ‘화조도십폭병풍’은 산뜻한 색상과 새들의 날렵한 움직임이 생생하다.



새로운 화풍을 추구하려는 작가는 또 있었다. 고종의 어진을 비롯해 초상화 부문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석지 채용신(1850~1941)이다. 그는 무관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에 오십대에는 충남 정산 군수로도 활동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의 ‘벌목도’는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이장훈 학예사는 “벌목을 하고 있는 인물들을 그린 예가 한국 회화사에서 거의 없고 채용신의 작품 중에서도 극히 드문 풍속화”라며 “1906년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임업을 장려했던 시대상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호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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