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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비례대표 취지 무시한 상임위 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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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권
중앙대 교수·정치학

역대 국회는 늘 “일하는 국회”를 표방하며 개원했다. 야당도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여소야대 구도인 20대 국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하는 국회’의 요체는 나라 안팎 현안에 탄력적으로 반응하고 적시에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일하는 국회’의 핵심은 상임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하고 타협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당 지도부 중심의 위계적 조직보다는 소규모 인원이 시시각각 돌변하는 국정 현안을 신속하게 다룰 수 있는 상임위가 입법의 일차적 기관이 돼야 마땅하다.

상임위는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탄생했다. 의회가 독자적으로 양질의 정책 정보를 생산하고, 이를 의원들 간에 공유하는 게 목적이다. 전문 관료들이 제안하는 행정부의 정책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게 아니라 국회 스스로 전문성을 구축해 그 정책이 적절한지 검증하고,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갖추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의 경우 19세기 이후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다양한 영역별로 상임위원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이후 소위원회까지 구비하면서 상임위 제도는 더욱 전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20대 국회 상임위의 위원 배정 과정을 보면 상임위의 전문성 제고를 심각하게 저해한 사례가 많아 논란을 빚고 있다. 특히 47명의 비례대표 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소관 분야와 전혀 무관한 상임위에 마구잡이로 배정됐다. 비례대표 제도의 취지는 지역구 의원들이 놓칠 수 있는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대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20대 국회는 이런 상식을 망각해 상임위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비례대표 의원의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혔다. 이는 실세 지역구 의원들이 이른바 인기 상임위에 몰리면서 나타난 부작용이기도 하다.

물론 의원의 전문성은 국회 입문 전 경력과 무관하게 특정 상임위에 봉직함으로써 학습·축적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비례대표 의원들의 경력은 의사에서 운동선수까지 다채롭지만 상임위가 다루는 업무 영역은 상대적으로 명확하며 제한돼 있다. 그 때문에 상임위 배정에 비례대표 의원의 경력이나 희망을 완벽하게 반영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런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20대 국회는 비례대표 의원들이 본인의 희망에 반해 경력과 아무 관련이 없는 상임위에 내리꽂기식으로 배치된 사례가 너무 많다. 언론단체에서 20년간 일한 정의당의 추혜선 의원이 본인이 지망한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 대신 외교통일위에 배치된 게 대표적이다.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 출신인 새누리당 김종석 의원도 기획재정위 등 경제 관련 상임위를 희망했지만 외교통일위를 배정받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을 지낸 새누리당 김승희 의원도 보건복지위를 원했지만 안전행정위원회에 배치됐다. 정치평론가 출신으로 국방 분야에 문외한인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도 국방위로 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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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잘못된 상임위 배정은 원내에 20석 이상을 확보한 원내교섭단체 소속 지역구 의원들이 인기 상임위에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국회 구조 때문이다. 그 결과 초선으로 입지가 약한 비례대표 의원들은 지망자 미달인 비인기 상임위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특히 정의당처럼 원내 의석이 6석뿐인 비교섭단체 비례의원은 비인기 상임위 중에서도 가장 비인기 상임위에 배정되기 일쑤다.

상임위 배정은 원내에 교섭단체를 구성한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원내지도부가 사실상 전권을 휘두른다. 이에 따라 무소속과 비교섭단체 소속 의원의 상임위 배정을 담당한 국회의장은 별 힘을 쓸 수 없다. 이런 잘못된 배정 방식은 속히 개선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상임위 배정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어야 할 것인가. 우리 국회는 미국 의회처럼 정당마다 상임위 위원배정기구를 꾸린 뒤 정당 간 협의를 거쳐 소속 의원들을 상임위에 배정한다. 문제는 우리 국회를 둘러싼 환경이 미국 의회와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 의회는 민주·공화당의 양당 구도가 오래전부터 존속해 왔고, 의원 교체율이 낮으며, 상임위 소속 위원들의 지속성도 높다. 상임위원장은 다수당이 독점한다. 하지만 우리 국회는 의원의 물갈이 비율이 상당히 높고 정당의 이합집산도 빈번하다. 상임위원장직도 여야가 협상해 나눠먹기식으로 가져간다. 그러므로 미국 의회처럼 정당별 위원배정기구를 통한 상임위 위원 배정 방식은 현실적이지 않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떨까. 국회의장과 함께 각 정당의 원내대표와 선수별·비례대표 대표 의원, 그리고 무소속과 비교섭단체 대표 의원들이 모여 국회 차원에서 초당적 상임위 배정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기구에서 상임위별 위원 정수를 정하고 상임위 위원장을 선출한 뒤 의원들을 상임위에 배정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특정 상임위 업무에 적합한 사회 경력이나 전문성을 갖고 있음에도 거대 정당들의 당리당략에 따라 본인이 일해야 할 상임위에 배정되지 못하는 현실은 ‘87년 체제’의 종언을 선언하고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 국회에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손 병 권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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