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6·25전쟁 66돌, 참전 연예인들 이야기 “여자 속옷 지니면 총알 비켜간다 미신…장병들 많이 훔쳐가”

기사 이미지

지난 21일 한자리에 모인 참전연예인협회 관계자들. 왼쪽부터 참전연예인협회 사무총장 이진형(예비역 중령), 가요 ‘홍콩아가씨’를 부른 금사향 협회 고문, 3대 미스코리아 진 김미정 협회 부회장, 협회 홍보이사인 코미디언 방일수씨. 이씨는 현역으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방씨는 베트남 전쟁 때 장병 위문공연을 했다. [사진 오상민 기자]


“옛날에는 추억을 만들고 살았는데, 이제는 추억을 더듬고 살아.”

지하철 시청역 9번 출구에서 중앙일보까지 100m가 채 안 되는 길 중간에 그는 10여 분을 쉬었다가 걸음을 이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추억’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떠올렸다. 그 자신이 이젠 추억이 돼버린 가수 금사향(87·여)씨였다.

본명 최영필. 1946년 상공부 섬유국에서 영문 타이피스트로 일하다 그해 럭키 레코드사 주최 조선 13도 가수 선발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나는 야 꿈을 꾸며 꽃 파는 아가씨~’(‘홍콩아가씨’)가 그의 노래다.

또 한 사람이 함께 인터뷰에 응했다. 3대 미스코리아 진(眞) 출신 영화배우 김미정(82)씨. 미스코리아 출신 할머니는 여전히 곱고 꼿꼿했다. 본명 김영자. 가수협회장을 지낸 고(故) 현인씨의 부인인 그는 “옛날엔 왜 이름들을 그렇게 촌스럽게 지었는지 몰라”라며 쑥스러워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동시에 꺼내놓은 자격증의 녹색 바탕에 ‘6·25 참전 국가유공자’라고 적혀 있었다.

둘 모두 총 대신 마이크를 들고 6·25 전장을 누볐다. 여성에, 총은 한 번도 쏴 보지 않았지만 참전은 참전이다. 장병들과 피란민을 대상으로 한 위문공연이 정훈공작대(군예대·軍藝隊) 소속 종군 연예인이었던 이들의 역할이었다.

금씨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김씨는 8사단 정훈공작대 소속으로 최전방을 누볐다. 하루에 세 번 공연을 한 적도 있고, 전쟁 기간 1000번이 넘는 공연을 했다고 한다. 국군이 진격하면 북쪽으로, 후퇴하면 남쪽으로 부대를 따라 이동했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갑자기 후퇴를 한다며 밖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침낭 지퍼를 내려야 하는데 지퍼가 고장 나 움직이지 않아 빠져 나오지 못하자 옆에 있던 남자 군인이 나를 침낭째로 덜렁 안고 트럭에 던졌지요.”(김미정)
 
 

전쟁터에 나선 이유를 물었다.

“가수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나니까 다른 연예인들과 같이 군에 간 거죠. 구봉서·배삼룡씨 등등이 그랬어요.”(금사향)

“서울 왕십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친구들과 뚝섬에 놀러 갔다가 전쟁이 났어. 식구들과 헤어져 단신으로 대구까지 피란을 갔지요. 1951년 초 군부대를 찾아 여자 의용대에 자원했어요. 군대에 가면 먹여주고 재워준다기에. 그런데 열여덟이라 너무 어려 안 된다는 거예요. 대신 정훈공작대라는 곳에 보내 준다기에 얼른 좋다고 했지요.”(김미정)

그들은 일명 ‘먹물도장’을 찍고 전쟁터로 나갔다. 죽어도 군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였다. 공연단 전용 GMC 트럭은 이들의 발이자 무대였다. 트럭이 서는 곳이면 내려서 공연을 했다. 동선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공연을 하는 곳엔 군인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고, 자연 북한군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 이미지

김미정씨(마이크 앞)가 6·25전쟁 중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김씨 왼쪽에서 춤추는 여성(흰옷)은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씨의 막내딸이자 김씨스터즈로 활동했던 김애자씨. [사진 육군]


공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날이 새면 전투에 나설 장병들을 위해 새벽 3시에 공연한 적도 있다. 트럭 화물칸을 무대로 공연을 하고 조명은 다른 트럭의 라이트를 썼다. 쓰레기통 두 개를 세워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서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공연은 처음엔 캉캉춤 같은 무용으로 시작해요. 여자 무용수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면 장병들이 좋아했지요. 그리고 사회자가 나와서 가수를 소개하고 노래를 두어 곡 하고 만담도 했지요. Y담(음담패설)을 섞으면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요즘 코미디는 재미없어. 노래와 무용을 하면 공연이 끝나요. 공연은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가량. 노래는 ‘베사메 무초’ 같은 외국 노래도 하고 ‘님 계신 전선’을 많이 불렀지요. ‘홍콩아가씨’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나왔어요.”(금사향)

“평상시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어요. 무대에 오를 땐 직접 만든 드레스나 한복을 입지요. 당시엔 푸른색 화장이 유행이었는데. 화장품이 없으니 당구 칠 때 쓰는 푸른색 초크를 구해다 갈아서 돼지기름에 풀어 얼굴에 칠했어요. 콧대를 세워 보이려고 성냥이나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든 뒤 물을 부어 검은색으로 코 옆에 라인을 그었지요. 화장할 땐 그런대로 괜찮은데 물로는 지워지질 않아 석유(휘발유)로 지우곤 했어요. 립스틱은 인주로도 쓰고(웃음).”(김미정)

혈기 왕성한 장정들에게 이들은 지금의 걸그룹 뺨치는 인기를 누렸다. 자고 있는데 누군가 천막을 찢고 손을 집어넣어 머리에 꽂혀 있는 핀을 뺏어 가거나 옷을 훔쳐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속옷은 빨고 난 뒤에 널지도 못할 정도였다.

“전쟁터에서 여자 속옷을 지니고 있으면 총알이 비켜간다는 미신 때문에 우리 속옷을 많이 훔쳐 갔어요.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들 알고 훔쳐 가는지…(웃음) 나중에는 팬티 하나를 갈기 갈기 찢어 여러 명이 조각을 나눠 가지기도 하더라고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훔쳐보는 건 예사였지요.”(금사향)

“북한군을 향해 월남을 종용하는 방송도 했지. ‘친애하는 인민군 여러분 여기는 자유 대한민국입니다…’하고.”(김미정)

“포탄이 날아오더라도 조명(헤드라이트)이 꺼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어요. 어떤 때는 ‘쾅’ 하는 소리에 공연이 중단된 적도 있고. 그런 날은 정말 무섭고, 걱정도 되고, 잠이 안 와서 밤새 침낭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공연을 위해 체모를 뽑아 철사에 붙여 수염으로 쓰기도 했고.”(금사향)

이들은 부대에서 먹고 잤다. 월급은 없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물론 공연 중 들려오는 포탄, 따발총 소리가 가장 무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걱정이었던 건 공연단 운영을 중단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공연이 중단되면 굶어야 했기 때문이다. 배고픔이 어떤 건지 그들은 너무 잘 알았다. 트럭을 타고 가다가 빈집을 발견하면 장독대부터 뒤져 고추장을 찾은 뒤 밭에서 무를 뽑아다 찍어 먹는 게 특식이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이 타고 가던 트럭 속으로 초콜릿을 던져주면 얼른 가슴(브래지어) 속에 넣어 숨겨두곤 했지요. 그러다 초콜릿이 가슴에서 녹은 적도 있고….”(김미정)

“미군이 비행기에서 던져주던 시레이션(전투식량) 박스를 받으러 가다가 떨어지는 박스에 맞아 죽은 사람도 봤어요.”(금사향)

금씨는 불편한 몸으로 옆에 있던 가방 속에 꽂혀 있는 흰 막대기를 가리켰다. “휴전선에서는 4000원, 문방구에선 2000원인데 난 저걸 평생 가지고 다녔어.”

흰 막대기는 소형 태극기였다. 그는 가운데 태극문양을 짚으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군대에서 시작해서 군대에서 끝났어. 전쟁이 있어 내가 먹고살았지.”

전쟁 ‘덕’에 먹고살았다는 말 자체가 전쟁의 역설이었다.

“총소리가 울리면 자동으로 피란 보따리 챙기고, 인민군으로 전향하는 사람들도 봤고, 자기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지.”(금사향)

“하루는 동료가 부대 옆에 빈집을 발견하고 횡재했다며 거기 들어가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옆에 시체 4구가 있는 걸 보곤 놀라서 뛰어나온 거야.”(김미정)

이 말을 들은 금씨가 “전쟁은 비참하고 비통하고 애통한 것”이라고 정리의 말을 남겼다.
 
‘비실이’ 배삼룡, 6사단 위문단 인솔자 맡은 게 시초

1950년 6·25전쟁 때 후퇴를 거듭하던 육군 6사단은 충북 충주 근처에서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군예대(軍藝隊)를 만들었다. 당시 6사단에 속해 있던 ‘비실이’ 배삼룡(코미디언)씨가 위문단 인솔자로 선정돼 격전지를 찾아다닌 게 군예대의 시초 격이다.

이후 각 사단이 군예대를 만들었다. 안다성, 손인호, 박시춘, 남인수, 허장강, 이예춘, 김진규, 백설희, 박노식, 이매방, 황해, 독고성, 신카나리아…. 이런 왕년의 쟁쟁한 이름들이 당시 군예대에서 활동했다.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군예대의 활동도 줄어들긴 했지만 당시 군예대 출신들은 70년대 초 전쟁참전연예인협회를 만들었다.

최근엔 국방부 산하 사단법인(이사장 코미디언 석현)으로 운영 중이다. 협회에 소속된 연예인은 70~80명 정도. ‘홍콩아가씨’의 금사향씨는 협회 고문을, 고 현인씨의 부인 김미정씨는 부회장을 맡고 있다.

베트남전에 다녀온 MC 겸 코미디언 방일수(방청평·협회 홍보이사)씨는 “참전연예인들은 총을 들진 않았지만 최전방에서 장병들과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들”이라며 “만 76세인 내가 거의 막내뻘인데, 지금도 군부대를 찾아가 장병들을 위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사진=오상민 기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