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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때 고개 쳐든 말…알고보니 기수가 1200만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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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0일 제주도 경마장에서 4번 말이 고개를 든 채 출발하는 모습(동그라미 안). 이 말 기수 강모씨는 브로커로부터 1200만원을 받고 고삐를 당겨 일부러 속도를 줄였다. [사진 서울중앙지검 (동영상 캡처)]


2011년 5월 20일 제주 경마장 4번 출발선에 경주마 ‘빛의요정’이 들어섰다. 이 말은 그해 3월 경기에서 3위, 4월엔 2위를 기록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경마 ‘예상지’들은 빛의요정을 우승 후보로 꼽았다.

경주 직전 말들의 모습을 공개할 때 활력이 넘쳐 보이기도 했다. 이 말에 베팅이 몰리면서 우승 배당률(단승식 기준)은 1.6배로 낮아졌다. 경마에서 베팅이 몰리는 말의 배당률은 내려간다. 우승 후보군으로 꼽히지 않는 말의 배당률은 통상 수십 배가 된다.

그런데 출발 신호가 울리자 빛의요정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달렸다. 경마 브로커에게서 천천히 달리는 조건으로 1200만원을 받은 기수 강모(34)씨가 고삐를 세게 당겼기 때문이다. 초반 속력이 나올 리가 없었다. 빛의요정은 출발 뒤 10초쯤 지나 첫째 코너에 들어서면서부터 하위권으로 처졌다. 아홉 마리가 달린 이 경기에서 빛의요정은 7등을 했다. 이 말에 베팅이 된 돈은 약 20억원이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이 같은 수법으로 경마 승부조작을 벌인 혐의(마사회법 위반 등)로 강씨 등 기수 6명과 이모(46)씨 등 경마 브로커 3명을 기소했다고 22일 발표했다. 검찰은 또 불법 사설경마장에 손님들을 모아주고 수수료를 받는 이른바 ‘찍개’와 실시간 경주 중계영상 공급자, 말의 건강 상태를 경기 전에 알려주는 대가로 돈을 주고받은 마주(馬主), 무단 마주 명의 대여자 등도 함께 기소했다. 검찰은 33명을 사법처리(15명 구속기소, 18명 불구속기소)했다고 설명했다.

검찰에 따르면 기수 6명은 2010~2011년 총 18개 경주에서 승부를 조작하는 대가로 모두 1억450만원을 브로커로부터 받았다. 이 가운데 황모(30)씨는 11개 경주에서 조작에 가담해 가장 많은 돈(5200만원)을 챙겼다. 이들은 대부분의 경마 관람객이 ‘복승식 마권’을 구매하는 점을 알고 범죄를 계획했다.

복승식은 말 두 마리에 돈을 건 뒤 이 말들이 순서에 관계없이 1, 2등으로 들어오면 돈을 따는 방식이다. 보통 경주에서 우승권으로 예측되는 말이 3마리 정도라서 빛의요정 같은 우승 후보 하나만 매수해도 돈을 딸 확률이 크게 올라간다. 경기당 200만~1200만원의 뒷돈을 받은 기수들은 고삐를 들어 올려 스타트를 늦추거나 질주하는 말의 머리를 돌려 속력을 줄이는 방식으로 승부를 조작했다.

경마 브로커들은 천안·대전 일대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사설경마장에 손님을 모아 돈을 챙겼다. 사람들이 우승이 유력한 말에 돈을 걸면 그 말이 하위권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게 했다. 이들이 운영한 사설경마장은 마권 구매 한도(1인당 한 경주에 10만원)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불법 시설이라 큰돈을 노리는 손님이 주로 몰렸다. 사설경마장에서는 하루에 수천만원을 날리는 사람도 많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불법 사설경마 규모가 연 3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

구속기소된 브로커 이씨는 “사전에 기수를 매수해 뒀으니 그 말만 피해 돈을 걸면 된다”는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1억원을 받고 팔기도 했다. 이씨는 조직폭력배 출신이다. 이용일 강력부장은 “승부조작 범죄에 이용당한 뒤 경마 브로커에서 돈을 돌려줬지만 브로커의 신고 위협에 시달리며 두려움 속에서 승부조작에 계속 가담한 기수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선욱 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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