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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다른 이유에 분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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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시험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항상 억울해한다. 가방을 던지며 ‘문제가 이상하다’ ‘선생님이 미쳤다’고 울부짖으며 이상한 문제 몇 개를 보여주면서 얼마나 이상한지를 열심히 설명한다. 때로는 문제가 진짜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는 성적이 나쁜 이유가 문제의 이상함 때문이 아니라 아들의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심지어 ‘그 이상한 문제를 맞힌 애도 있지? 그렇다면 결국은 공부가 부족한 거야’라고 얘기한다.

이쯤 되면 아들은 한마디로 꼭지가 돈다. 문제의 이상함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며 한국 교육제도의 문제점으로 확전을 시도한다. 모자의 언쟁을 듣고 있던 누군가가 ‘문제도 이상하고 공부도 부족했네’라고 얘기하면 그런 하나마나 한 얘기를 왜 하냐는 핀잔만 듣는다. 하지만 사실은 이 하나마나 한 얘기가 균형 잡힌 시각이다.

현실에서 하나의 행동이나 사건은 단 하나의 이유로 일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특정 음료수를 구매하는 행동은 그 음료수에 대한 태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음료수에 대한 태도들, 그 순간의 금전적 상황, 접근 가능성, 갈증, 허기짐, 직전에 맡았던 음식 냄새 등 수많은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 구매행동을 단순히 그 음료수에 대한 태도로만 설명하고 예측하면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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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란의 중심에 섰던 모든 사건도 단 하나의 원인이나 요인에 의해 일어났을 리가 없다. 19세 김군의 구의역 사망사건,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등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어두운 요인의 종합판이다. 그 경중에는 차이가 있지만 구의역 사건은 근본적으로 공기업 민영화와 구조조정, 비정규직, 외주 용역 등의 구조적인 문제들과 낙하산 인사, 안전관리 미비, 안전수칙 위반 등 운영상의 문제들의 조합에 의해 일어났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은 피의자의 정신질환, 여성에 대한 분노, CCTV 부재, 화장실의 구조와 위치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이런 비극적 사건을 정확히 이해하고 미래의 비슷한 불행을 예방하려면 궁극적으로 이 모든 원인과 요인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찌 보면 그 다양한 원인만큼이나 다양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 즉 그 원인들의 경중에 비례해 큰 원인은 더 많은 사람이, 작은 원인은 적은 사람들이 주장해주는 것이 건강한 사회다.

그런데 최근 한국 사회의 갈등은 마치 한 원인만 살아남는 서바이벌 경쟁처럼 보인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건의 원인을 강하게 주장하는 정도를 넘어 다른 원인에 분노하고 다른 원인을 얘기하는 사람을 적대시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여성혐오 범죄인가, 묻지마 범죄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원인 규명의 차원을 넘어 그 자체가 사회갈등이 됐다. 왜 이렇게 자신과 다른 주장에 분노할까?

바로 자신과 다른 주장이 그냥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공격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사고 과정에서 강력하고 근본적 심리현상의 하나가 절감원리(discounting principle)다. 실제 원인을 확실히 모르거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판단에 불확실성이 존재할 때, 하나의 원인만을 생각할 때보다는 그럴싸한 원인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처음 그 원인의 중요성이 약하게 인식되는 현상이다.

누군가 나에게 잘해줄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이 요즘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우리는 경계하게 된다. 무슨 도움을 청하려고 잘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유는 아직 모른다) 그 사람이 실제로 좋아해 나에게 잘해준다는 설명은 힘을 잃는다.

우리의 사고 과정은 이런 절감원리를 따르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도 이런 절감원리를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믿고 있는(믿고 싶은?) 원인 이외의 원인이 부각되면 마치 누군가 나의 믿음에 도전하는 것 같은, 공격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마치 누군가 나에게 ‘네 생각은 틀렸어!’라고 얘기하는 듯이.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그 모든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들을 다 생각할 수는 없고, 그래서 완벽하게 균형 잡힌 해석과 시각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질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러기에 나와 다른 생각이 잘못됐다고 믿는다.

다양한 원인만큼 다양한 사람이 있으면 그 전체가 모여 사회는 합리적 균형을 이룬다. 나와 다른 의견은 그냥 같이 존재하고 있지 굳이 내 생각을 공격하고 있지 않다. 다른 의견과 주장에 분노하는 스스로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생각해볼 때다.

허 태 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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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