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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언제까지 사재 출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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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사재 출연의 흑역사는 제법 뿌리가 깊다. 전성기는 아무래도 김대중 정권 때다. 구조조정의 시대, 사재 출연은 전가의 보도였다. DJ는 1998년 1월 대통령 당선자 시절, 5대 그룹 총수를 불러 사재 출연을 말했다. 대량 실직으로 민란이 우려되던 상황, 국민 분노와 노조 반발 무마용으로 개인 재산을 내놓으라는 주문이었다. LG·현대는 “내놓을 게 없다”고 버텼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롯데 신격호 회장(160억원)을 시작으로 삼성·현대·효성·대림이 줄줄이 사재 출연을 발표했다.

DJ는 사재 출연을 ‘고통 분담’ ‘성의 표시’라고 불렀다. 말이 성의 표시지 사실은 강제 징발과 다름없었다. 재계 관계자는 “한다고 살려줄지는 알 수 없지만, 안 하면 당장 망할 것이란 두려움에 시달렸다”고 했다. DJ 정부 시절 구조조정 기업 치고 사재 출연을 안 한 총수가 거의 없었던 이유다.

그 사재 출연을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다시 들고 나왔다. 채권단 입을 빌려 “대주주(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가 책임지고 1조2000억원을 만들어내라”고 다그쳤다. 아니면 한진해운을 법정관리에 넣겠다고 했다. 임 위원장의 다급한 마음은 알겠다. 노조 반발이 걱정이고 은행도 더는 지원하기 어렵다.

같이 망해 가는 처지지만 현대상선은 현찰이 꽤 된다. 현대증권을 얼마 전 팔아 1조2000억원을 마련했다. 그만큼 버틸 힘이 생겼다는 얘기다. 반면 한진해운은 돈줄이 말랐다. 빌린 뱃삯 주기도 벅차다.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할 1년, 약 1조원의 돈이 추가로 필요하다. 그 돈을 또 채권단이 댈 수 없으니 조양호 회장더러 구해 오라고 압박할 만하다. 하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사재 출연은 묘수라기보다 구태에 가깝다.

굳이 총수가 돈을 내놓게 하려면 발상을 바꿔야 한다. 무턱대고 윽박지르는 건 하수다. 반감만 사고 효과도 작다. 자발적으로 흔쾌히 ‘투자’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창의적 아이디어와 당근이 필요하다. 그 서슬 퍼렇던 DJ도 채찍만 든 건 아니다. ‘자금 출처 면제’ ‘세정(稅政) 지원’ 같은 당근도 함께 줬다.

임종룡도 당근을 말하기는 했다. 조 회장에게 한진해운 주식 우선매수청구권을 주겠다고 했다. 부실 기업이 정상화한 뒤 제일 먼저 되살 수 있는 권리다. 박삼구 회장이 금호산업을 되찾은 방식이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경우가 다르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 부실 책임이 거의 없다. 제수(고 조수호 회장의 부인)가 망쳐놓은 회사를 떠맡은 게 죄라면 죄다. 2년간 약 2조원을 털어 넣었다. 월급 한 푼 안 가져갔다. 더 지원하려도 할 능력이 안 된다. 이미 한진그룹이 휘청거릴 지경이다. 그룹의 주력 대한항공은 1분기 3233억원의 영업이익을 냈지만 순이익은 1749억원 적자였다. 한진해운을 지원했다 물린 손실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채권단 관계자가 “(한진그룹에 돈을 넣으라고) 압박할 것도 없는 딱한 상황”이라고 말하겠는가.

이쯤에서 발상을 통 크게 바꿔보자. 어차피 곧 산업은행이 두 해운회사의 주인이 된다. 그러니 아예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지주회사로 묶는 것은 어떤가. 그래 놓고 지주회사 지분 참여를 통해 사재(또는 외부 자금)를 넣도록 하는 것이다. 이때는 부실기업 지원이 아니라 정당한 투자가 된다. 배임죄에 걸릴 우려도 없다. 조양호 회장 입장에선 한진해운 한 곳에 올인하는 것보다 위험이 줄어든다. 투자 규모에 따라 훗날 한진해운+현대상선 합병 법인의 대주주가 될 수도 있다. 사재 출연이 아니라 사재 출자(出資)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이유든, 어떤 형태로든 사재 출연이 공공연히 부처 장관의 입에서 말해지는 나라는 시장주의라고 할 수 없다. 사재 출연은 ‘지분만큼 책임진다’는 자본주의 원칙을 정면에서 거스른다. 법 위의 법, 초법이다. 초법은 아무리 정의란 이름의 외피(外皮)를 두텁게 두르더라도 양의 탈이 벗겨지면 결국 드러나는 늑대 본색 같은 것이다. 희생양을 찾아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할퀴고 잡아먹는 늑대, 결국 모든 양을 갈가리 찢어놓은 뒤에야 폭주를 멈추는 그 늑대 말이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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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