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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공간 예술의 장인 ‘아가씨’ 류성희 미술감독

제69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 아쉽게도 수상 목록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역대 한국영화 중 최다(176개국) 판매라는 쾌거를 세웠다. ‘아가씨’의 값진 성취는 또 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올해 경쟁작 중 최고의 기술 아티스트에게 주는 벌칸상(The Vulcan Award of the Technical Artist)을 수상한 것. 한국인 스태프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 칸에서 돌아온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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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가씨` 스틸컷]

“류성희가 디자인한 저택 세트는 화려한 영국식 건축과 우아한 일본식 스타일이 탁월하게 뒤섞여 있다. 미술과 캐릭터,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예술적 균형감을 유지한다.”(버라이어티) “히데코(김민희)의 저택은 장면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이상적 배경이다.”(인디와이어) ‘아가씨’의 미술에 대한 해외 매체들의 찬사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인 원작을 1930년대 한국으로 옮겨 오는 작업은 그 어떤 작품보다 창의적인 재해석이 요구됐다. 류 미술감독이 창조한, 동서양의 감각이 아름다우면서 기괴하게 어우러진 공간인 ‘아가씨’의 저택은 영화의 숨은 주인공으로 큰 몫을 해냈다.

예전부터 벌칸상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평소 존경하는 촬영·미술감독님들이 받은 상이라 늘 동경했어요. 막상 받으니 남일 같기만 하고 실감이 안 나요. 사실 저 혼자 잘해서 받은 상도 아니잖아요. 촬영·의상·소품 등 ‘아가씨’의 비주얼을 책임진 스태프 전원에게 주는 상이죠.”

미술 면에서 ‘아가씨’가 특별했던 점은요.
“굉장히 어려워서 오히려 도전이 되는 작품이었죠. ‘암살’(최동훈 감독) ‘국제시장’(윤제균 감독)에서도 과거를 재현하긴 했지만, ‘아가씨’의 미술은 재현을 넘어 캐릭터와 사건의 이면을 함축해 표현해야 했어요. 제가 가장 신났던 부분이기도 하고요(‘아가씨’의 미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magazine M 166호 참조).”

류 미술감독은 홍익대학교에서 도예를 전공하며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어릴 때부터 장인(匠人)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어요. 예술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쌓은 내공을 작품에 응축하는, 기술이 예술이 되는 단계를 꿈꿨죠.”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단지 예쁘게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거실과 잘 어울린다는 이유만으로 팔리는 공예품을 보며 그는 아쉬움을 느꼈다. ‘소통’에 대한 갈증은 자연스레 발걸음을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던 영화계로 이끌었다. 그는 미국 유학 중 한 친구로부터 AFI(American Film Institute·미국영화연구소)에 대해 듣고, 1995년 AFI 진학을 택한다. 영화 미술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1998년 학업을 마치고 이듬해 한국에 돌아왔다.

당시 미국 영화계에 비해 산업적으로 열악한 한국 영화계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AFI 재학 당시 ‘동사서독’(1994, 왕가위 감독)을 보고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이야기나 사건이 순서대로 연결되지 않아도 이미지와 정서, 형식적인 아름다움이 몹시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논리적인 스토리텔링을 가진 영화를 공부했던 제겐 신선한 충격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죠. 아직 성장기에 있던 한국영화 현장에서 그런 참신한 시도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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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라희찬(STUDIO 706)]

입국 후 류 미술감독은 단편영화 포트폴리오 하나만 들고 이름 있는 영화사를 기웃거렸다. 남성 위주였던 영화 현장에 파고들기 위해 주민등록증의 성(姓)도 ‘유’에서 중성적인 느낌이 강한 ‘류’로 바꿨다. 그러나 현장 경험 없는 미술감독을 받아 주는 곳은 없었다. 처음 그를 기용한 이는 송일곤 감독. 류 미술감독은 2001년 송 감독이 연출한 ‘꽃섬’으로 현장에 발을 들였다. 그 후 ‘피도 눈물도 없이’를 통해 류승완 감독과 만났다. 류승완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앞두고 있던 봉준호 감독에게, 봉준호 감독은 ‘올드보이’를 준비 중인 박찬욱 감독에게 류 미술감독을 소개했다. 2000년대 초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명감독들과 함께 보낸 셈이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작업하는 일은 혼자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경우와 크게 다를 것 같은데요.
“늘 예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웃음). (예산을) 막 퍼 주는 프로듀서는 없잖아요. 가끔은 이런 제약이 도리어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 같아요. 기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접근하도록 해 주니까요.”

배우들의 연기에 도움을 주기 위해 캐릭터들이 사는 실제 공간처럼 세트를 만들기도 하나요.
“물론이죠. ‘아가씨’에서 숙희(김태리)가 사는 장물 거래소도 진짜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촬영했어요. 늘 두 가지 순간을 염두에 두고 세트를 만들어요. 첫 번째는 관객이 영화에서 처음 세트를 볼 때, 두 번째는 배우가 처음 세트에 발을 디딜 때죠. 가장 긴장되면서 설레는 순간이에요. 배우들이 처음 세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감정이 자기 캐릭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공간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그 감정과 연기가 오롯이 카메라에 반영된다고 믿어요.”

올해 데뷔 16년을 맞은 류 미술감독은 “이제 이 세계(영화 미술)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라며 “왜 할리우드 영화 스태프의 전성기가 대부분 그들의 만년에 찾아오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영화 현장은 스태프의 평균 나이가 무척 젊어요. 누군가 제게 ‘이제 나이도 있고 상도 받았으니 은퇴하라’ 말할지도 모르죠(웃음).” 류 미술감독은 “AFI 은사인 프로덕션 디자이너 헨리 범스테드 역시 ‘현기증’(1958,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부터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까지, 타계 직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촬영·미술 같은 분야는 재능만큼이나 오랜 시간 쌓아 온 경험도 중요해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2015, 드니 빌뇌브 감독)의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처럼 환갑이 넘어서도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드는 노장들이 있잖아요. 그들처럼 현장에서 멋지게 나이 드는 게 꿈이죠.”

자신이 볼 때도 ‘정말 잘했다’ 싶은 영화가 있나요.

“글쎄요. 제겐 영화 속 인물과 이야기를 하나의 세계로 살아 움직이도록 시각적으로 잘 구현했느냐가 관건이에요. ‘살인의 추억’ ‘변호인’(양우석 감독)이 80년대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이었다면, ‘아가씨’나 ‘올드보이’처럼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공간들도 있었죠. 좀 아쉬운 작품도, 만족스러운 작업도 있지만 그 별점은 공개할 수 없어요(웃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영화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순응자’(1970)요. 베르톨루치 감독이 20대 후반에 찍은 영화인데, 연출·미장센·의상 등 하나 같이 도전적이면서 완벽한 작품이죠. 제겐 ‘기적’ 같은 영화랄까요.”

영화 미술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하신다면요.
“영화 미술만을 공부하는 데 몰두해 다른 경험을 소홀히 하지 마세요. 자기 안에 맴도는 여러 가지 궁금증을 자유롭게 따라가며 영화보다 더 폭넓은 경험을 하길 바라요. 영화 속 세계를 창조하려면, 이미 그 세계의 바탕이 되는 무궁무진한 세계가 우리 밖에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필모그래피
아가씨(6월 1일 개봉), 암살(2015), 국제시장(2014), 변호인(2013), 고지전(2011), 만추(2011), 마더(2009), 박쥐(2009), 헨젤과 그레텔(2007),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괴물(2006), 달콤한 인생(2005), 쓰리, 몬스터(2004), 올드보이(2003), 살인의 추억(2003), 피도 눈물도 없이(2002), 꽃섬(2001)    ※최근 개봉순
 
류성희 미술감독이 만든 영화 속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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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아가씨’
류 미술감독은 평소 “이질적인 두 요소가 혼합된 풍경”을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에게 동서양 문물이 기이하게 충돌하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녹아드는 저택을 선사했다. 코우즈키(조진웅)의 변태적인 취향이 반영된 영화 속 서재는 특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공간. “감각적으로나 이성적으로나, 완성도 면에서 이제까지 작업했던 영화 세트 중 가장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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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암살` 스틸컷]

‘암살’
1930년대 백화점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에, 미츠코시백화점 세트를 제작하며 약간의 상상력을 보탰다. 황금색과 대리석을 풍부하게 사용해, 당시 경성의 물질적 풍요를 대변하는 호화로운 공간으로 만든 것. 중국 처둔 세트장에 지어진 이 세트는 “국내 영화에 등장한 단일 세트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고. 류 미술감독은 “세트에 압도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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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살인의 추억` 스틸컷]

‘살인의 추억’
실제 경찰서를 섭외해 촬영하길 원했던 봉준호 감독과 반대로, 1980년대 시골 경찰서의 풍경을 되살린 경찰서 세트를 끝까지 고집했던 류 미술감독의 일화는 업계에서 유명하다. “1980년대 세트부터 로케이션까지, 마치 실제 존재했던 세계처럼 보이고 싶었다”는 류 미술감독의 말처럼 영화 속 넓은 들판과 쓸쓸한 정취는 오래전 ‘살인의 추억’의 세계로 관객에게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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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올드보이` 스틸컷]

올드보이
‘아주 높은 탑에 갇힌 외로운 왕자.’ 우진(유지태)의 자기 소개처럼, 그가 사는 펜트하우스는 곧 인물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실제 부유층의 집처럼 고급 가구로 꾸미기엔 턱없이 예산이 부족해, 류 미술감독은 ‘어설프게 타협할 바에야 아예 낯선 풍경을 보여 주자’고 생각했다. 그 결과, 물에 빠져 죽은 누나(윤진서)에게 집착하는 우진의 트라우마를 반영해 방 안에 수로가 있는독특하면서도 삭막한 공간이 탄생했다.

글=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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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