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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으로] 쇠락하던 지하상가, 청년들 ‘창업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50년 맞은 서울 ‘땅속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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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지하상가 내 창작아케이드 입주 작가들. 기둥에는 중앙시장의 풍경을 담은 홀로그램이 설치돼 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땅 밑에는 또 하나의 도시가 있다. 서울 전역에 퍼져 있는 25개의 지하상가다. 이들 지하상가는 1967년 현재의 시청역 부근에 ‘새서울 지하상가’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축구장 20개를 합친 것보다 넓은 이 지하도시에는 모두 2788개의 점포가 있다. 한때 쇼핑의 천국으로 불리며 호황을 누렸지만 90년대 외환위기를 겪으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강남과 달리 종로·을지로 등 강북권 지하상가에선 폐점 업체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최근 지하의 가치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젊고 새로운 공간으로 속속 탈바꿈하고 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지하로 내려가 봤다.

25곳 2788개 점포, 축구장 20개 면적
공방·청년가게 몰린 신당동·종로4가
지하도 연결, 답답한 디자인 개선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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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집타운 옆 공방 장인들의 놀이터

지난 7일 서울 중구 중앙시장 앞. 노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긴 통로가 나타났다. 양옆에 늘어선 횟집타운을 지나자 이번엔 아기자기한 공방이 눈에 띄었다. 피규어와 도자기·금속 등 각종 공예작품이 길을 따라 전시돼 있고 공방 안에선 작가들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복도 기둥엔 상인을 모델로 한 홀로그램과 독특한 공예품을 걸어놔 마치 전시회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곳 신당지하쇼핑센터는 방공호로 만들어졌다가 71년부터 상가로 운영됐다. 한때 환전소가 3곳이나 있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2000년대 들어 중앙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면서 함께 쇠락했다. 상가의 절반 이상이 비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9년부터 서울시가 젊은 작가들에게 기존 임대료의 10% 가격에 빈 점포를 빌려주면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매년 공모를 통해 입주 작가를 뽑는데 올해는 경쟁률이 7대 1에 육박할 정도였다.

지금은 금속·매듭·도자기 공예 등 40곳의 공방이 자리하고 있다. 피규어 작가인 박세홍씨는 “지하라 바깥 날씨에 상관없이 작업에 집중할 수 있고 다른 작가와 교류도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초기엔 격렬하게 반대하던 기존 상인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30년 넘게 횟집을 운영 중인 함형수씨는 “젊은 작가가 많아지면서 지하상가에도 생기가 도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이곳에선 공예품 감상뿐 아니라 직접 체험도 할 수 있어 상인과 주민들에게도 인기다. 한쪽에 마련된 공동 교육장에선 칠보공예 수업이 한창이었다. 칠보는 금·은·구리 등의 바탕에 유리질의 유약을 녹여 붙여 무늬를 만드는 공예다. 수업에 참여한 박은실(53)씨는 중앙시장에서 순댓국집을 하고 있다. 그는 “바쁜 시장 일을 하다 잠시 내려와 이렇게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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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4가 지하상가의 홈데코숍 라미아스텔라.

 광장시장 앞에 위치한 종로4가 지하상가도 ‘청년 가게’들로 유명하다. 한복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모란나비 한복’이나 서양식 매듭공예품을 파는 ‘돌림’, 수제 아기용품 가게 ‘온유온유’처럼 20~30대 사업가들이 꾸린 상점 10여 곳이 입점해 있다.

과거 양복점·금은방 등 혼수용품 전문상가로 유명했던 이 지하상가는 2000년대 들어 지상에 횡단보도가 설치되면서 상권이 쇠퇴했다. 하지만 2013년부터 월 20만원 수준의 싼 임대료 덕에 청년 사업가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고 공방, 디자인 업체, 의류점 등 젊은 감각의 상점들이 생겼다. 수십 년 된 기존 상점과 청년들의 독특한 가게가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청년 사업가들은 블로그·SNS 등을 통한 온라인 판매나 홍대·이태원 등에서 열리는 플리마켓(벼룩시장) 참가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물품을 판다. 모란나비 한복의 강경리 대표는 “횡단보도 탓에 지하를 찾는 손님이 많지 않아 주로 인터넷이나 지인을 통해 주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시청에서 동대문까지 지하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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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지하상가에 전시된 송진수 작가의 철사 드로잉 작품(왼쪽).


서울시청 광장 지하에서 시작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연결되는 을지로지하상가는 2.8㎞에 이르는 국내 최장의 지하상가다. 83년 지하철 2호선을 만들면서 조성됐는데, 시청역에서 출발해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닿을 수 있다.

9일 시청역 지하로 내려가 보니 30도 넘는 더위를 피해 지하 통로로 걷는 시민들이 제법 됐다. 지하를 오래 걸으면 지루할 만도 하지만 곳곳에 숨은 매력을 찾는 재미가 있다. 을지로입구역으로 가는 길엔 서울의 1호 지하상가가 있다. 67년 준공된 새서울 지하상가다. 구식 타자기와 출퇴근 기록기를 파는 사무용품점, 오래된 명반을 전시한 레코드 가게에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 김구 선생 등 유명인사들의 초상화가 걸린 가게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이곳에서 30년 넘게 화실을 운영하고 있는 작가 김진삼씨는 한 중년 여성의 사진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 그는 “사별한 부인을 그림으로라도 추억하고 싶다는 의뢰를 받고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정주영 회장 등 유력가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지만 요즘에는 사진에서 볼 수 없는 그림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손님들이 간간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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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3가와 4가 사이 지하상가의 정글 테마존.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을지로입구역으로 내려가는 피아노 모양의 계단은 밟을 때마다 각기 다른 음계 소리가 나기 때문에 어른·아이 모두에게 인기가 많다. 을지로3가역과 4가역 사이의 ‘정글 테마존’은 녹색 LED조명을 비춰 색다른 재미를 줬다. 지하상가를 관리하는 서울시설공단은 올해부터 ‘걷고 싶은 거리’를 목표로 본격적인 개선작업에 나선다. 연말까지 지하상가 내에 버스킹 공연 등을 위한 문화공간 두 곳과 휴식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이한철 서울시설공단 상가활성화팀장은 “시민들이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산책로를 만드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복고풍 감성을 즐길 수 있는 남대문로·회현 지하상가가 있다. 회현 지하상가에선 중고 LP, 우표, 수동 카메라 등을 만날 수 있어 수집가들에겐 이미 명소가 됐다. 남대문로 지하상가에 위치한 금선아트 역시 3대째 이어져 온 칠보공예 전문점이다. 김선희 대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었던 이방자 여사도 저희 가게 단골이었다”고 소개했다.

지하 공간의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주요 명소를 지하로 잇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광화문과 종각을 땅속에서 연결하는 지하도는 지난달 25일 1차 구간을 개통했다. 광화문과 종로구청, 청진공원의 240m 구간이 연결됐고, 종각역~그랑서울 빌딩 350m 구간에도 지하보행로가 만들어졌다. 종로구는 나머지 구간도 순차적으로 연결할 계획이다.

반면에 남대문시장과 소공로 일대의 지하상가를 하나로 연결하는 방안은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번번이 좌절됐다. 20년 넘게 모자를 팔고 있는 류용복 ‘밀라노’ 대표는 “그나마 있던 어르신 단골들도 계단을 오르내려야 해서 힘들어 한다”며 “시민들이 쉽고 편하게 지하도로 다닐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구청이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남대문시장과 명동·을지로를 하나의 거대한 지하도시로 묶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서울시는 신중한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하상가를 연결하려면 지상 상인들과의 갈등, 제도적인 보완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답답한 실내 디자인과 공기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최근 지하상가를 떠난 한 상인은 “오랫동안 지하에 있다 보니 공기도 안 좋고 답답한 느낌이 들어 지상으로 옮겼다”며 “사람들이 지하상가를 찾게 하려면 더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총 연장 32㎞ 몬트리올 ‘언더그라운드 시티’ 혹독한 추위 피하려고 만들어

지하상가는 지상 못지않게 도시의 특색이 반영된 공간이라 해서 ‘제2의 도시’로도 불린다. 지하철역을 연결한 지하 통로에 상점 등이 들어선 형태는 유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산업·위치·기후 등 그 도시만의 생활양식이 깃들어 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언더그라운드 시티’는 전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지하상가로 꼽힌다. 총 연장(延長) 32㎞에 달하는 이곳엔 쇼핑몰·식당·은행·극장·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고 대형 호텔이나 대학, 기업 사옥 등도 연결돼 있다. 이곳의 지하철역은 10개, 출입구 수도 150개가 넘는다.
1966년 지하철과 함께 생긴 이곳은 혹독한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방편(方便)의 공간이다. 몬트리올은 한겨울엔 영하 20도 가까이 떨어지는 혹한의 도시다. 이 때문에 캐나다인들은 지하에 도시 규모의 상가를 구상했다.

스트리트 패션으로 유명한 일본에선 지하상가가 쇼핑의 성지로 통한다. 도쿄·오사카·나고야 등에 있는 대표적인 지하상가는 모두 의류·신발·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대형 쇼핑몰 형태다. 특히 후쿠오카의 텐진 지하상가는 패션 피플에겐 꼭 가봐야 할 코스로 꼽힌다. 길이 400m의 지하도에 1000여 개의 다양한 매장이 있고 다이마루 등 백화점과도 연결된다.

글=천권필·김선미 기자 feeli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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