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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내 마음속의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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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홍
사회부문 차장

용서하는 것과 잊는 것 중에서 어느 게 더 쉬울까. 영어로 용서하다는 forgive, 잊다는 forget이다. 혹자는 주는(give) 게 얻는(get) 것보다 쉬우니 용서가 먼저라고 한다. 정반대의 논리도 만만찮다. 잊을 순 있지만 평생 용서는 못 하겠다면서다. 어찌됐든 용서하기와 잊기는 증오·원망·억울함 등과 맞물려 좀처럼 떨쳐내기 힘든 두 단어다.

누구나 마음속에 증오의 대상을 하나 둘씩은 품고 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겠지만 그게 그리 간단치 않다. 내 뒤통수를 치고 등에 칼을 꽂은 사람을 용서하는 게 쉬운 일인가. 특히 가까운 사람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진다. 회사 동료·선후배에 심지어 가족이나 옛 연인일 수도 있다. 화상은 약과다. 원수도 이런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다.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주변의 타인”이란 사르트르의 말이 절실히 와 닿는 게 이런 경우다.

더욱 좌절하게 하는 것은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잘나간다는 사실이다. 왜 하필 그가 인정받고 승진하는 것일까. 왜 아무도 그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왜 착하게 살려는 나만 이렇게 아파해야 하는 것일까. 애써 잊으려 하면 문득문득 떠오르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 일쑤다. 가족이나 애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평생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영화 주인공에게 100% 감정이입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거다.

증오의 대상은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 내 삶은 왜 이리 불행한가. 세상에 정의는 어디로 갔는가. 이 억울함은 도대체 누가 풀어줄 것인가. 최근 잇따르는 ‘무차별 살인’은 이 같은 분노의 극단적인 분출이다. 특정인에 대한 증오가 불특정 다수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더 큰 위험성을 내포한다.

비극은 막아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용서하고 잊으려는 노력을 중단해선 안 된다. 누구를 증오하면 나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 된다. 욕하면서 닮아간다지 않나. 영화 ‘내부자들’에서도 이강희(백윤식)가 안상구(이병헌)에게 “저주하고 원한을 품고 살면 반드시 자신에게 칼이 돌아오는 법이야”라고 한마디 하지 않던가. 독일 작가 브레히트가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투쟁한 사람들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것”이라며 전후 독일인들의 심리적 불안을 경고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가슴속에 늘 커다란 납덩이를 지고 사는 건 힘든 일이다. 증오의 대상이 하늘의 심판을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병들기 십상이다. 아인슈타인도 “약한 사람은 복수하고, 강한 사람은 용서하며, 현명한 사람은 무시한다”고 했다. 내 마음속 칼날이 나를 찌르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용서하든, 잊든 내려놓자. 나부터 올곧게 살고 볼 일이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고 반듯이 서는 게 진짜 승리하는 길이다. 토닥토닥. 지금까지 잘 버텼다. 이젠 내 마음속 증오를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낼 때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박신홍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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