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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라의 아이슬란드 오디세이] <18> 고독과 위로의 검은 해변, 레이니스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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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해변의 노래

아이슬란드 최남단 마을 비크(Vik)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날씨는 재앙에 가깝도록 매몰찼고 한 달여 간 이어진 강행군에 몸 상태는 바닥을 쳤다. 설상가상 서울에서는 안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괜찮을 거라 믿었던 걱정거리들은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잔뜩 곪아 커다란 종양 덩어리가 되었다. 마음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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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를 찾았다. 해변의 이름은 레이니스피아라(Reynisfiara), 석탄보다 까만 모래 자갈이 바다만큼 넓게 펼쳐져 있고, 거대한 주상절리 동굴이 병풍처럼 둘린 곳이었다. 비바람은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을 만큼 세차게 몰아쳤다. 바다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달 위를 걷는 것처럼 느리고 힘겨웠다.

해변에 섰을 때 나는 다른 행성 바닷가에 혼자 던져져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바다는 두렵도록 넓었고, 파도는 사람 키를 훌쩍 넘길 만큼 크고 사나웠다. 바라만 봐도 울렁이는 바다 한켠에는 레이니스드랑가르(Reynisdrangar)라 불리는 바위들이 유령처럼 흔들거렸다. 쓸쓸함을 그림으로 그리라면 이곳을 떠올릴 만큼 적막하고 고독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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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게 떨어지는 비를 피해 주상절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에는 현무암 돌기둥이 수정처럼 가득 박혀있었다. 이곳에 주저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파도는 거대한 포말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코앞까지 돌진했다가 잠잠하게 물러나길 되풀이했다. 그때마다 검은 모래사장에는 하얀 그럼이 새겨졌다 지워지길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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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슬프게 일렁일 때 바다를 떠올리는 이유를 생각했다. 부딪히고 흔들리고 찰싹이며 성을 내다가도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가 또다시 흐르는 것이 우리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와 닮은 것들에게서 위안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이 검은 해변과 많이 닮아 있었다. 바다와 바람이 만나 휘휘 대며 노래를 불렀다. 나와 닮은 그들의 노래는 나에게 진실한 위로로 다가왔다. 노랫소리는 어느새 동굴 가득 번져 있었다.




더글라스 수퍼 DC-3

해변을 떠나 서쪽으로 20여 분을 더 달렸다. 별다른 표지판 없는 샛길로 방향을 틀어 길 같지 않은 길을 따라갔다. 사방은 아무것도 없이 검기만 했다.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이고 들리는 것은 차바퀴에 모래가 저걱저걱 갈리는 소리뿐이었다. 몇 분을 더 달렸는지는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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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헛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비행기가 추락해 있었다. 나는 사실 이곳에 비행기 잔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을 연신 비빌 수밖에 없었다. 하얀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를 등진 검은 땅 위로 비행기가 꽂혀 있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시공간을 조각내어 흐트러뜨린 후 제멋대로 다시 합친듯한 이 괴상한 장소의 뒷이야기는 이렇다.

이 비행기가 살아 있을적 이름은 더글라스 수퍼 DC-3, 미 해군에 소속된 수송기였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참전했던 이 베테랑 비행기는, 1973년 11월 아이슬란드 남쪽 외딴 해변에서 별안간 생을 마감했다. 기계적 결함이 문제였다. 다행히도 비행기에 타고 있던 모든 크루는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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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웬일인지 그 누구도 비행기의 잔해를 치울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더글라스 수퍼 DC-3은 43년을 이곳에 갇혀있게 되었고, 미스테리를 찾아 사서 고생을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가까이서 본 비행기는 반쯤 부서져 너덜너덜 그 자체였다. 기체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있고 한쪽에는 흉측한 그라피티까지 그려져 있었다. 불시착의 여파였다기 보다는 아이슬란드의 거친 날씨와 여행객들의 짓궂은 호기심이 합쳐진 결과였다.

처참한 비행기의 모습과 쓸쓸한 바다 배경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했다. 비행기 주변을 맴도는 동안 한 상상들의 개수를 합치면 어수룩한 소설 한 편은 나올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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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찌감치 서서 홀린 듯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미간이 찌부러졌다. 또 헛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추락한 비행기에서 탈출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기체에서 연기까지 나고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아, 분명 알고 왔는데. 내가 드디어 미친 것인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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