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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국 정중앙, 로마시대 지도에 나온 ‘인도양의 진주’

1 스리랑카 해변에서 주민들이 장대로 만든 받침대에 올라가 낚시하고 있다.

2 배를 타고 스리랑카에 온 무슬림을 표현한 그림. 3 고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에 그려진 스리랑카. 1478년 로마에서 다시 그려졌다.

4 스리랑카에서 발견된 알렉산더 대왕 시절 동전. [사진 주강현]


스리랑카는 고대 인도인이 부르던 랑카(Lanka)에서 비롯됐다. 이번에 다녀온 스리랑카는 세계 해양 실크로드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세계의 배꼽’이었다. 굳이 중화(中華)사상을 들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신을 중심에 두는 생각은 진부하기조차 할 수 있다. 이스터처럼 격절된 태평양의 도서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적어도 해양 실크로드에서만큼은 유럽과 아랍, 중국을 오가는 항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항로의 허브’ 또는 ‘인도양의 진주’라고도 불렸던 스리랑카가 명실상부한 ‘세계의 배꼽’이었다는 것은 여러 현장과 문헌을 뒤진 결과 도출된 결론이었다.


최초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에서 발견된 7~8세기의 만다라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만다라는 스리랑카 남서부의 네덜란드가 만든 식민항구 골의 해양박물관에서 만났다. 거대한 둥근 돌판에 지도가 각인돼 있다. 스리랑카를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한 일종의 만다라 형상의 고지도다. 일찍이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할 정도의 고대적 해양관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스리랑카의 전통 선박 아웃리거(outrigger)와 삼각돛배 다우(dhow)도 동서문명 교류의 생생한 물증으로 남아 있다. 현외(舷外) 장치가 달린 아웃리거는 주로 남동부에서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나 미크로네시아에서도 아웃리거는 일반적인 선박 형태다. 선박 구조로 볼 때 동남아와 태평양과 상관관계가 있다. 반면 중부해안 서쪽의 콜롬보 항구에서 만난 배들은 다우였다. 인도양에서 보편적인 형태다. 아라비아의 강력한 자장권역임이 확인된다. 이처럼 스리랑카는 동서를 모두 흡수한 융·복합 해양 문명의 중간지대로 파악되었다.


유럽 지도에 스리랑카만큼 일찍 등장한 아시아의 섬도 없을 것이다. 유럽-스리랑카 해양 실크로드의 비밀을 알려면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에 가서 포이팅거(Peutinger)라 불리는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 보면 된다. 12세기, 혹은 13세기 초반에 제작된 도로지도다. 그러나 고지도 전문가들은 1세기께 제작된 것을 4세기께에 다시 만들고 중세에 복사한 것으로 파악한다. 아일랜드와 영국으로부터 스리랑카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적어도 2000여 년 전부터 유럽인이 스리랑카에 이르는 노정을 파악했다는 결정적 증거물이자 해양 실크로드의 고대적 실체다.


그리스·로마·중국 등 다양한 동전 발견스리랑카의 지리적 중요성은 이미 프톨레마이오스(83~168년께)의 지도에 등장할 정도다. 그는 스리랑카를 너무 크게 생각해 인도의 3분의 1, 인도양의 25분의 1쯤 크기로 생각했다. 지도 원본은 알렉산드리아도서관 대화재로 소실됐다. 1478년 로마와 볼로냐에서 다시 제작된 지도는 스리랑카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항구, 산과 강, 수도인 아누라다푸라, 심지어 코끼리 서식지까지 나온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리랑카 동남부에 ‘cetacean promont(고래 포인트)’라 적혀 있다는 점. 오늘날에도 이 해역은 고래의 길목이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는 그리스·로마·페르시아·중국 등의 다양한 동전이 발견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으로 이미 인도 북서부 펀자브까지 그리스인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스리랑카를 드나들었음은 발굴된 당대의 동전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스인은 남인도 말라바르 해안이나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의 타밀 해협에서 향료를 구하고 있었다.


홍해, 페르시아만 무역 상인이 동아시아로, 중국 상인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스리랑카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아랍의 가장 오랜 항구 아덴과 남인도 말라바르 해안 사이의 교역은 스리랑카의 부상에서 그 동력을 얻었다. 그런 와중에 스리랑카 북서쪽 만타이같이 거류민단이 형성되고 국제무역 거점으로 부각된 고대항구도 생겨났다. 광저우(廣州)·푸저우(福州) 등 중국 남부에 줄기차게 당도하던 아랍 상인 다수도 스리랑카를 중간 거점 삼아 거쳐 들어왔을 것이다.


스리랑카 해양교섭의 핵심은 역시 인도대륙이 아닐까. 콜롬보 국립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코뿔소·사자·호랑이·하마 등의 뼈 화석은 이들 동물이 적어도 1000여 년 전에는 다수 생존했음을 시사한다. 인도대륙으로부터 가까운 바다를 통해 스리랑카로 건너왔을 것이다. 오늘날 스리랑카 국기와 궁궐, 사찰 할 것 없이 사자 상징이 등장함은 고대에는 흔했다는 예증.


스리랑카의 초기를 장식하던 4개 종족 중에서 나가(Naga)는 특히 강이나 바다 같은 물과 연관된다. 나가는 ‘선박 여행’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보석 무역과도 연관 있다. 석가모니는 갠지스 강가에서 출발해 세 번에 걸쳐 스리랑카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된다. 불교 전파사에서 놀랍고 대단한 사건이다. 오늘날 곳곳의 불적(佛跡)에서 바다를 건너온 산스크리트어 금석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스리랑카의 고대 비밀을 가장 정확히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는 마하밤사(6세기께)다. 사료에 의하면 벵골 왕자 비자약이 들어와서 싱할리 왕조를 세웠다. 기원전 247년에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 3대 왕인 아소카가 아들 마힌다를 보내어 불교를 전파한다.


일찍이 부처가 세 번씩이나 직접 스리랑카를 방문해 설법했다는 것은 그만큼 스리랑카를 훗날 ‘불국토의 섬’이 될 것을 예견했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처 열반 이후에 바다를 건너 부처님 진신 치아를 모셔와 불치사(佛齒寺)를 조성한 점이다. 불치는 왕국의 옥새와도 같아 전란을 겪으면서도 끝없이 새로운 왕도와 함께 이동·전승되어 왔다. ‘바다를 건넌 치아’는 해양을 통한 스리랑카 문명교류의 중요 맥락을 잘 설명해준다.


부처님 진신 치아 모셔와 불치사 세워스리랑카의 내부적 역사는 역시 북쪽 해협을 통한 인도와 연관성이 많다. 스리랑카는 북방 타밀의 습격에 의해 번번이 시달렸다. 2000여 년에 걸친 신할리 왕조의 ‘3대 수도이자 문화 삼각지대’라 할 수 있는 아누라다푸라·폴론나루와·캔디 등은 북방 힌두 세력의 공격을 자주 받아 초토화되기 일쑤였다. 불맥이 끊길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전해 받은 미얀마가 다시금 승려를 보내 불교 재건에 나섰다. 이는 동남아시아 소승불교 교류의 강력한 해상 네트워크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의 타밀 해협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해협의 긴장’은 우리가 일본의 왜구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벌여온 긴장과 일맥상통한다. 2009년 상황이 종료되기까지 북부해안 자프라를 중심으로 타밀호랑이와 스리랑카군이 벌인 전투는 북방에서 바다를 건너 내려온 힌두타밀과 신할라 불교세력의 종교적 갈등이기도 하다.


북서부 만나르섬은 작은 암초와 섬들로 인도와 이어진다. 일명 ‘아담의 다리’라 불린다. 인도와 스리랑카가 손쉽게 이어지는 해협의 현장이다. 섬에서는 아프리카산 수령 700여 년의 바오바브 나무도 볼 수 있다. 아랍 무역 상인이 심었다는 전설의 나무. 일찍이 아랍 무슬림이 정착했다는 증거다. 오늘날 콜롬보 시내의 상당수 장사꾼이 아랍인 후예인 무슬림인 것도 오랜 국제무역의 역사를 말해준다.


해양교섭에서 몬순은 결정적인 동력이다. 스리랑카는 북동과 남서 몬순에 따라 동서 항구를 자연스럽게 번갈아 이용해 문명교류의 출구로 활용할 수 있었다. 북서풍으로 부는 겨울몬순, 남서풍으로 부는 여름몬순으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무역선을 움직였다. 콜롬보대의 고고학자 반다라나야케는 ‘몬순 아시아(Monsoon Asia)’란 표현을 썼다. 적도몬순과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몬순을 모두 포함해 몬순이 해양 문명교류에 지대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이다. 쿠알라룸푸르 이슬람예술박물관의 도록은 이슬람 해상교류 전파를 아예 ‘몬순이 보내온 메시지’로 압축했다.


스리랑카 ‘문화 삼각지’는 내륙 산지에 의지하고 있으나 강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스리랑카의 역사박물관이나 해양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중국 도자기들은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물량 공세의 무역이 있었다는 생생한 증거. 페르시아의 블루-그린 도자기,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도 발견되고 있다. 동방교회, 페르시아교회의 대표격인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지금도 이라크·시리아·이란 등에 살고 있다.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을 따라 스리랑카로 전래해 왔을 것이다.


고대 중국과의 교섭에서 중요 자료는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다. 399년 중국을 떠난 법현은 402년 인도에 당도하며, 두루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귀국길에 스리랑카에 2년여 머문다. 당시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머물렀는데 도시의 도로가 정연하고 5만~6만 명의 승려가 주석했다고 기록한다. 엄청났던 불력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조선인은 이 머나먼 스리랑카를 알고 있었을까.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년)에서 스리랑카를 석란산(錫蘭山)으로 표기했다. “석란산은 큰 바다 속에 있다. 임금은 불교를 숭상하여 코끼리와 소를 소중히 여긴다…나라는 부유하고 땅은 넓으며 인구가 조밀하기로는 조와(자바)에 버금간다. 구슬을 캐는 늪이 있어서 여러 나라 상인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사간다”고 했다. ‘보석의 섬’으로 국제무역 거래에서 스리랑카의 보석이 널리 거래되던 정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멀긴 해도 조선인에게도 그리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는 증거다. 스리랑카 상인도 베트남 호이안이나 남중국 광저우에 자주 출현하고 있었고, 그러한 국제 정보는 조선에도 이미 당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는 스리랑카(하) 해양 실크로드 식민도시 ‘골’을 가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asiabad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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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