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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미술] 누구의 그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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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평론가

이른바 ‘조영남 대작 논란’으로 5월의 미술계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엇보다 타인의 조력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는 게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조영남의 말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국내 미술가 대부분이 그렇게 한다는 취지로 잘못 해석될 수 있어 그 발언은 훨씬 정제됐어야 했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조력자를 고용해 작품을 제작하는 일은 결코 새로운 일도 아니고 극히 드문 일도 아니다. 논란이 크게 증폭된 데는 ‘그림은 작가 홀로 제작하는 것’이라는 일반의 관념과 ‘꼭 그렇지만은 않은’ 미술의 역사 및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적잖이 작용했다고 본다.

‘조영남 대작 논란’을 보며


따지고 보면, 서양에서는 예부터 조수를 써서 미술품을 제작하는 전통이 있었다. 중세 때는 길드 체제에서 장인과 조수, 도제로 이뤄진 미술공방이 그림을 생산해냈고, 길드 체제가 약해진 르네상스 이후에도 렘브란트나 루벤스, 다비드의 예에서 보듯 조수를 고용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많았다. 물론 르네상스 이래 천재 개념이 부상하고 개성이 중시되면서 미술품이 예술가의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라는 의식이 강화되지만, 화가가 조수의 도움 없이 홀로 작업하는 게 대세가 된 것은 불과 19세기 인상파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근대적인 현상도 20세기 개념미술과 팝아트 이후, 특히 앤디 워홀 이후 다시 예전처럼 조수들의 조력을 받는 양태가 확산되면서 많이 와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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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화가 루벤스의 ‘마리 드 메디시스의 마르세유 상륙’. 루벤스는 이 그림 계약서에 조수들의 조력을 받되 인물만큼은 자신이 그리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현대의 양태와 과거의 양태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과거의 화가들은 조수에게 단순한 고용자가 아니라 스승이고 멘토였다. 하지만 현대의 미술가들, 특히 데이미언 허스트나 제프 쿤스처럼 100명 이상의 조수를 고용하는 이들은 더 이상 스승이나 멘토가 아니다. 그들은 최고경영자(CEO)에 가깝다. 그래서 허스트는 버는 것에 비해 조수에게 임금을 박하게 준다는 비판을 듣고 쿤스는 조수들의 이직률이 지나치게 높다는 책망을 듣는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재료를 갖가지 기술로 다뤄야 하는 미술에서는 애당초 조력을 얻는 일이 매우 중요했고 광범위하게 이뤄져 왔다.

이런 현상이 현대에 와서 좀 더 복잡해진 것은 개념미술의 등장 때문이다. 개념과 의도를 중시한 개념미술은 개념과 표현을 분리했고, 전자를 후자보다 중시했다. 라우션버그의 ‘지워버린 드 쿠닝의 드로잉’을 예로 들어보자. 제목 그대로 라우션버그는 선배거장 드 쿠닝의 드로잉을 지워버렸다. (흔적은 남았다) 비록 지워졌어도 그린 이는 드 쿠닝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작가는 라우션버그다. 이런 개념미술의 정신에 입각해 본다면 타인이 개성적인 터치로 조력한 회화도 그걸 내 작품으로 규정하는 개념화의 과정을 밟는다면 얼마든지 내 작품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의도와 개념, 프로세스가 미술계에서 명료히 인지되고 공감되었느냐의 문제다.

조영남은 거기서 실패했다. 그가 조력자를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와 의도는커녕 조력자를 사용한다는 사실조차 미술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꼭 형사 처벌해야 하는 걸까. 복잡다기한 미술의 역사를 의식하는 눈으로 볼 때 검찰의 접근 방식이 왠지 아슬아슬해 보인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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