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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한계에 부닥친 인류에게 희망 줄 것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 점고개. 우리나라 하천 중에서 열목어가 가장 많이 산다는 인복천 너머 민통선을 지나 산 하나만 넘으면 바로 내금강으로 이어지는 남녘 땅 동쪽 끝이다. 그곳에 높지 않은 구릉을 따라 녹슨 쇠와 나무로 나지막하게 지어져 얼핏 보면 눈에 띄지도 않는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으로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이다.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어 통일된 새로운 문명사회로 전진하겠다’는 취지로 2008년 창립된 사단법인이다.

생명이니 평화·통일·문명같이 좋은 말은 다 들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 어떻게 성취하겠다는 건지 궁금해 원통행 시외버스를 탔다. 인제·원통 쪽에 배치를 받은 장병들이 크게 실망해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건 옛말이고 지금은 오히려 선호지역이 됐단다. 길이 잘 닦여 서울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가 된 데다 전방지역에서 근무하면 휴가일수가 더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작은 변화 하나가 통일이 한 걸음 더 다가왔음을 웅변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서 내리는데 작고 깡마른 체구지만 형형한 눈빛이 범상치 않은 백발 노인(71세를 노인이라 부르기 민망한 시대지만)이 기자를 맞는다. 정성헌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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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까워졌네요.
“그렇죠. 예전엔 서울에서 8시간 걸렸으니까. 요즘 병사들은 택시 타고 외박 나가요. 넷이 한 차 타면 버스요금과 큰 차이 없거든.”

그는 대뜸 기자를 ‘생명살림오행동산’이란 곳으로 이끌었다. 인간에 이롭고 생명을 살리는 나무와 약초, 농작물 300종 이상을 오행(五行)과 그에 상응하는 인체 부위에 맞춰 심어 놓은 정원이다.

“요즘 정원들은 정체성이 없어요. 서양 것도 아니고 동양 것도 아니고, 우리 것은 더더욱 아니야. 본질을 외면해서 그래요. 의학도 그렇지. 우리 전통 의학은 생명에 이롭게 하는 습성(習性)의학이었어요. 그런데 한의학과 양의학에 밀려 파편처럼 흩어져 버렸지. 그 흩어진 걸 조금이나마 모아놓은 곳이 여기예요. 내가 ‘배달조선의학’이라고 이름 붙였지.”

| 본질 천착 없는 사회개혁 공허해
생명가치 우선 생각하는 교육 필요
연간 80명씩만 지도자 교육해도
10년 내 우리 사회 확 바뀔 것

 
기록이 남아 있는 게 있나요.
“역시 흩어져 버렸어. 그걸 모아 연구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데 학위도 없고 하니까 인정도 못 받고 이용만 당했지. 누가 그에게 나를 소개했던 모양이야. 어느 날 찾아왔더라고. 그와 함께 연구해서 만든 게 이 정원입니다. 우리 큰아들도 그를 사부로 모시다 나중에 의대 들어가 의사가 됐지요.”
생명을 살리는 정원에 사람 잡는 탱크가 있네요.
“낡아서 못 쓰는 건데 군에서 빌려줬어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만든 김운성 조각가가 아이디어를 내 교육 온 학생들하고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색동 칠을 했지. 포신에는 북한 국화인 진달래와 남한 국화인 무궁화 다발을 꽃아 놨어요. 포탄 대신 평화를 쏘란 뜻이지요. 뒤쪽에 천지인을 상징하는 삼태극이 있죠? 남과 북의 통일뿐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신(新)문명 통일을 기원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생명·평화·통일·문명 이야기가 다 나왔다. 그것을 어떻게 엮어서 이뤄 낼까. 산책길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행여 밟을까 조심해야 했던 곰취와 미나리, 부추 등 나물 반찬의, 보기만 해도 건강해질 듯한 점심식사를 함께한 뒤 그가 말했다.

“총선 뒤에 5개 당의 정당 공약집을 다 읽어 봤어요. 근데 모두 깊이나 성의가 없어. 수백 가지를 나열한 것은 결국 하나도 안 하겠다는 거 아냐. 본질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 그래요. 근본에 대한 천착 없이 사회개혁을 얘기해 봤자 공허할 뿐이지. 힘이 생길 수 없고.”
그럼 본질이 뭡니까.
“생명이죠. 모두 살자고 하는 짓이잖아요. 인간 생명뿐 아니라 뭍 생명이 중요하고 그것의 관계가 중요한 거죠. 그래서 20세기 들어 서양에서 생태계 보존 얘기가 나왔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추구해 왔던 가치가 그거예요. 노자의 ‘도법자연(道法自然:도는 자연을 본받는다)’이 그 말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돈만 좇다 보니 지구가 고열에 신음하고 사회는 과열돼 국경 없는 무한 경쟁으로 사람들을 몰고 가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다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 생명 가치를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분야건 본질적인 해답에 이를 수가 없다는 거지. 인간사회 민주주의를 생명사회 민주주의로 승화시켜야 하는 겁니다.”
본질을 생각하기 위해 우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육이지요.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는 ‘시험 선수들’만 육성하는 교육을 실시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같아요.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그렇고 민초들도 그래요. 흙수저니 뭐니 하지만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불만만 늘어놓는 젊은이도 적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제일 역점을 두는 게 교육입니다.”
어떤 교육을 하나요.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주변 군부대의 젊은 병사들에 대한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군에 있는 20개월 정도만이라도 제대로 이용하면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생명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죠. 하다못해 태양광 발전 기술을 배워 사회에 나가서도 써먹을 수 있게 되잖아요.”
기술교육도 합니까.
“군에서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도 군이 태양광 이용률을 더욱 높일 필요가 있어요. 생태계 보존과 예산 절감, 재교육 1석3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요. 에너지 부족 탓도 있겠지만 오히려 북한에서 태양광 발전에 더 적극적이란 얘기를 들었어요.”
정부에 제안은 해보셨나요.
“물론이지요. 그런데 들을 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막상 실행으로 옮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것 역시 본질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때문이지요. 당장 도움이 안 되니까 미뤄 두는 거지. 그래서 지도자 교육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농촌과 공장에서 현장을 피부로 느끼고 생명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면 각종 정책 결정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지요. 연간 70~80명 정도만 해도 10년이면 나라가 확 바뀔 거예요.”

| 생명 복원의 역설인 DMZ 평화공원
민족 넘은 인류의 문화유산 되려면
주민과 세계 평화 애호가 이끌어야
지뢰탐지기 보낸다는 사람도 있어

 
생명운동을 DMZ(비무장지대)에서 하는 이유가 뭔가요.
“생명 가치를 지키는 데 평화가 필수고 최우선이니까. 살육 전쟁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고, 여전히 분단과 대결의 공간이지만 DMZ 일대는 자연과 생명의 역동성으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생명의 복원’을 이뤄 낸 역설의 현장이잖아요. 생명의 상징적인 공간이 될 수 있죠.”
DMZ 안에도 시설이 있습니까.
“우선 부지만 잡아 놨어요. 30만 평 정도 되지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아직 시작은 못하고 있지만 고무적인 것은 북한이 대놓고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잖아도 DMZ 세계평화공원이 추진되고 있는데요.
“나는 파주와 철원, 고성 세 군데에 평화공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파주는 남북의 군사대치가 집중된 곳으로 평화공원을 만들면 긴장완화의 효과도 얻을 수 있고, 고성은 설악산과 금강산이 이어지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죠. 철원의 경우 역사적으로 궁예가 이상향을 만들려고 시도했던 곳이니만큼 남북을 초월한 민족 이상의 실현이라는 상징성이 있지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을까요.
“평화공원을 만드는 과정에 전문가와 기업만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그곳이 삶의 터전인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하지요. 그들의 삶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야 생명력 있는 공원이 될 수 있어요. 공원이 딴 세상은 아니잖아요. 또 세계평화공원인 만큼 전 세계의 평화애호가들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평화생명동산에도 지난 5년 동안 100개가 넘는 나라의 사람들이 다녀갔어요. 그들은 말합니다. 언제든지 평화공원이 만들어진다면 10달러라도 내겠다고요. 지뢰탐지기를 보내겠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 자발적 참여를 많이 이끌어내야 명실상부한 인류의 자연문화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이 협조를 안 하고 있지요.
“북한이 거부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도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돼요. 우리라도 먼저 시작해서 세계 평화시민들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북한도 조금 미안한 마음도 생기고 돈도 되겠다 생각하고 동참할 겁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통일에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요.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통일은 내부통일과 소통일, 대통일의 과정을 거칩니다. 내부통일은 대한민국 공동체 내부에서 통일에 대한 합의를 키우고 준비를 충실히 하는 걸 말합니다. 이를 위해 서로 다른 관점을 용납하고 더 좋은 것을 합의해 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소통일이란 남북이 꾸준히 대화·협력하고 신뢰를 높이다 조건이 무르익으면 통일에 도달하는 걸 말하지요. 통일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준비된 대로 이뤄지지는 않을 겁니다. 지나친 형식논리에 빠지지 말고 무엇이든 그 당시의 수준과 현실에 맞는 유연한 통일을 이뤄야 합니다. 대통일이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경제적·문화적 연대를 말해요. 이런 세 가지 단계를 거쳐 통일이 되면 이후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 이후의 모습은 어떨까요.
“한반도 통일은 민족사적 대업을 넘어서 인류사적 위업이 돼야 합니다. 생명가치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통일강국에 이은 경제강국을 넘어선 생명강국으로서 그 가치를 세계에 나눠주는 나라가 돼야 합니다. 그러면 한계에 도달해 어쩔 줄 모르는 인류에게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정성헌 이사장은…

춘천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뒤 한국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과 부회장을 역임하며 오랫동안 농민·민주화 운동을 해 왔다. 2010~2014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다. 당시 차관급에 제공되는 승용차와 기사를 거부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원래 운동은 조금 빠듯하게 부족한 듯 해야 하고, 없던 사람이 갑자기 편해지면 일찍 죽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2009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 자리에서도 그는 당초 책정됐던 연봉 6000만원을 받지 않고 무급으로 일하고 있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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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