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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함께 분노하는 게 그리 어렵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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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대학 때 일이다. 단과대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페이퍼를 쓰다 어두운 캠퍼스를 내려가는데 불쑥 남자 둘이 나타났다. 한 명이 물었다. “기숙사가 어느 쪽이죠?” “아, 기숙사는 저기…” 하며 몸을 돌리는데 별안간 다른 남자가 팔로 내 목을 휘감으며 입을 막았다. 순간 등줄기가 찌릿하면서 ‘이렇게 죽는구나’ 정신이 멍해졌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들은 사라지고 어딘가에서 달려온 남녀 학생 서넛이 “괜찮아요?” 묻고 있었다. 그 구원자들은 인근 벤치에서 밤데이트를 하던 연인들이 아니었을까, 나중에야 생각했다.

여자들은 안다. 어두운 골목길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나를 따라 걷기 시작할 때, 새벽 시간 택시 기사가 낯선 길로 핸들을 꺾었을 때, “집 앞이니 당장 나오라”는 헤어진 남자친구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할 때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그 공포. 강남 노래방 화장실에서 일어난 20대 여성 살인 사건의 파장이 이렇게 큰 건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이미 여자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공포를 경험했고, 그럴 때마다 무엇을 잘못했나 스스로를 검열했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분노가 폭발한 지점이 ‘강남역 10번 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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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마다 자신의 경험담을, 말하지 못했던 울분을 털어놓는다. “엄마 배 속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죽을 뻔했는데” “무엇을 어떻게 더 조심하면 안전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들. 여자들의 절규에 놀란 남자들은 “왜 남성 모두를 잠재적인 가해자 취급하느냐”고 화를 낸다. 지나친 비약이다. 여자들은 ‘남자로 태어난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여성 혐오’의 의식구조하에서 가해진 유·무형의 폭력을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많이 읽힌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사진)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지만, 모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당신의 아내나 여자친구, 엄마와 딸, 누나와 여동생이 겪은 불합리한 공포에 함께 분노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일까. 정말 모르겠다.

이곳은 원래 문화콘텐트를 소개하던 칼럼이다. 이번엔 무엇을 쓸까 고민했지만 강남역 10번 출구 앞 포스트잇 글귀들만큼 마음을 뒤흔든 것은 없었다. 악마와 좀비까지 등장하는 화제의 호러영화나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나오는 베스트셀러 소설보다 이곳에 적힌 진짜 이야기가 몇 배는 더 무섭고 슬펐기 때문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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