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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더 위험해진 고환율 정책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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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출범한 브레턴우즈 체제는 안정적인 환율과 국제수지 유지를 세계 경제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들이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이 체제가 무너지고 외환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는 변동환율제가 도입됐다. 이후 환율 정책은 기본적으로 개별 국가의 재량권으로 여겨졌다.

환율조작국 제재 강화 위해
미 BHC 수정법 지난 2월 발효
섣불리 수출 진작책으로 쓰다간
제재는 물론 TPP 가입 못할 수도


하지만 중국이 세계 경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면서 환율 정책이 본격적으로 국가들 간의 분쟁 대상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94년부터 10년 넘게 달러당 8.28위안으로 환율을 묶었다. 중국의 수출이 급증하면서 대미 무역흑자도 가파르게 불어났다. 2000년 약 2000억 달러였던 중국 외환보유액은 2014년 중반 4조 달러까지 치솟았다. 반면 미국의 무역수지는 지속적으로 악화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5년 미국의 상품 무역수지 적자가 680억 달러로 확대됐다. 무역수지 적자액이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할 정도였다.

미국 의회는 환율 조작으로 자국의 무역수지를 악화시키는 국가들에 보복조치를 하는 법안을 계속 만들려 시도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국제무역론의 대가 폴 크루그먼 교수나 워싱턴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버그스텐 소장 같은 학자들까지 대중 무역보복 조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 강력히 반발하며 인위적인 환율 조정은 없다는 완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85년 9월 플라자합의 당시 미국의 압력으로 급격한 평가절상을 감행했다가 장기 침체를 맞은 일본의 사례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와 산업계의 강경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환율 조작을 근거로 무역보복을 가하는 법안은 실제로 입법되진 못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합법성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환율조작국 대응은 88년 제정된 종합무역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재무부가 환율 정책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조작 의심국에 대해서는 환율조작 방지를 위한 협상을 개시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보복 조치가 빠져 실효성이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미국 재무부가 매년 두 차례 환율정책 보고서를 발표했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베닛-해치-카퍼(BHC) 수정법안’에 서명해 분위기가 바뀌었다. BHC 수정법안은 환율조작국을 미국의 정부조달 계약에서 배제하거나 해당국에 대한 투자 지원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IMF를 통한 감시 및 공식 협의 요청도 가능케 했다. WTO 규범에 위배되는 직접 규제는 빠졌지만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강력한 무역 제재가 가능해졌다. BHC 수정법안이 ‘환율 301조’로까지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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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은 특히 미국 무역대표가 무역 협상을 할 때 상대방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됐는지를 고려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투자협정과 한국·일본·대만이 포함된 서비스무역협상,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 협상에 환율 문제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지난해 TPP가 타결된 뒤 나온 재무 당국 간 공동 선언문에도 각국이 환율 정책과 관련한 다양한 통계자료와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환율 정책이 불투명해 보이면 현실적인 불이익을 받는 시대가 됐다.

미 재무부는 지난달 내놓은 2016년 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을 환율조작국이 아닌 관찰대상국으로 분류했다. 제재를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됐지만 마냥 안심할 상황도 아니다. TPP 가입과 대미 투자유치에서 한국의 환율 정책이 장애요인이 될 불씨는 남아 있다. 특히 대미 무역흑자 규모가 큰 독일·일본·대만뿐만 아니라 BHC 수정법안의 핵심 타깃인 중국까지 일괄적으로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된 점을 주목해야 한다. 미국이 환율 관찰대상국 리스트에 올렸다는 것은 조만간 닥칠 전면전에 앞서 선전포고를 한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 정부는 수출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0년대 들어 정체하던 수출이 지난해부터 급격히 감소하며 경기를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신산업 육성, 시장 다변화 같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회복해 자연스레 수출을 늘리자는 합리적 방안이다. 그런데 산업계와 정부 일각에서 환율을 수출 확대의 도구로 꺼내 쓰자는 주장이 제기돼 걱정스럽다. 장기적인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고 부작용만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반갑잖은 불황형 흑자가 지속되고 있다. 우리 환율 정책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미국과의 통상 마찰이 빚어질 여지가 큰 상황이다. 수출을 늘리는 고환율 정책의 유혹은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 우리 경제의 구조적 약점인 과도한 수출 의존을 벗어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려울수록 거시적이고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균형 잡힌 경제정책을 써야 한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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