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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임금체계 개편, 묻지마식 ‘역할직무급’ 도입은 곤란하다

요즘 상당수 기업이 일본식 역할직무급을 전가의 보도인양 여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임금체계의 기본틀이 다른 만큼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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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조건 능력급제인 역할직무급이 능사는 아니다.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은 장기근속을 유도할 수 있는 호봉제가 더 유용할 수 있다. 사진은 인력난 중소기업의 구직광고판.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총선이 끝났다. 정부와 경영계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이젠 경제살리기에 올인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묻어난다. 역시 화두는 노동개혁이다. 고용시장을 바꿔야 청년에게 일자리도 주고, 능력에 따라 일자리를 찾아갈 수 있어서다. 기업도 지금처럼 경직된 인력운용체제에선 글로벌 경기변동에 따른 유연한 대처가 어렵다는걸 안다.

김기찬의 G(글로벌)와 I(나)사이 HR[2]

노동개혁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임금체계 개편이다. 지금처럼 매년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로는 미래가 없다. 일 안 해도 돈이 나오는 구조니 말이다. 더욱이 능력이나 성과 대신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에 따라 호주머니 사정이 달라지니 격차를 해소할 길도 없다. 이대로 가다간 사회적 갈등이 증폭돼 폭동이라도 일어날까 걱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비정규직이라도 성과를 많이 내면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는 임금구조가 절실하다. 그래서 정부는 물론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비롯한 경제단체까지 한목소리로 임금체계 개편을 외치고 있다. 호봉제를 없애고 성과급으로 바꾸자고 한다.
일본식 ‘역할직무급’이 전가의 보도?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성과평가를 한다지만 평가방식에 대한 근로자의 동의 수준은 낮다. 불만이 있어도 참으니 망정이지 제대로 따지면 지금 기업이 하는 성과평가는 법원에서 퇴짜를 맞기 일쑤다. 절대평가가 아니라 줄 세우기식 평가여서다. 법원은 이런 방식을 부당 노동행위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 회사와 근로자가 모두 만족할만한 평가방식을 찾는 게 까다로운 상황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일본의 역할직무급이다. 최소한 어떤 역할(직무)을 맡고 있느냐에 따라 그 역할의 무게 값과 책임 값, 난이도 정도는 측정하고 매길 수 있으니 말이다. 온전한 직무급은 서구에서나 통하는 임금체계다. 일본도 1990년대 초반 몇몇 대기업이 미국의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 임금체계 개편을 의뢰했다. 그 때 컨설팅 회사가 내놓은 게 서구식 직무급이다. 이걸 1년 여 간 적용했지만 대실패였다. 일본의 문화나 일하는 방식, 인력운용체 계와 맞지 않아서다. 수백억 원에 달하는 돈만 날렸다. 그 후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체 연구를 거쳐 개발한 임금체계가 역할직무급이다.

문제는 요즘 상당수 기업이 일본식 역할직무급을 전가의 보도인양 여긴다는 점이다. 전세계에서 호봉제를 운영하는 나라가 일본과 한국뿐이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일본의 호봉제와 한국의 그건 좀 다르다. 일본의 임금체계는 500년 가까이 능력급을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 한국은 혈연과 신분, 나이 중심의 유교적 전통이 임금체계의 기본틀이었다.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일본 기업에 능력주의 시스템이 도입된 건 봉건시대인에도(江戶)시대다. 당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상가(商家)에는 반토오(番頭)제도가 있었다. 역할에 따라 4가지 직급으로 나뉜다. 가장 아래 직급인 뎃치(丁稚) 또는 코조우(小僧)는 잡일을 하는 사환이다. 급사 또는 심부름꾼으로 지금으로 따지면 사원이다. 그 위 직위는 테다이(手代)다. 대리나 계장, 주임에 해당한다. 과장이나 부장급인 관리직은 반토오(番頭)로 불렸다. 총지배인 또는 공장장은 오오반토오(大番頭)다. 반토오(番頭) 직위에 오르면 자택에서 통근하는 게 인정됐다. 복장(하오리)도 차별화했다. 결혼도 할 수 있었다. 대체로 단나(旦那)라고 불리는 오너(사장)가의 데릴사위가 되곤 했다. 역할에 따라 대접이 달랐던 셈이다.

일본은 이런 전통이 있었는데도 임금체계를 지금과 같은 역할급으로 바꾸는데 60여 년이 걸렸다. 1955년 일본경영자단체연맹(이하 일경련)은 ‘직무급의 연구’를 발표했다. 미군정기의 영향이다. 도쿄전력이 그 해 직무급을 도입했고, 야하타(八幡)제철이 67년 적용했다. 그러나 미국식 직무급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일경련은 69년 ‘능력주의 관리’ 라는 600쪽짜리 가이드라인을 발간했다. 능력주의 인사(직능자격제도)의 시작이다. 제1차 오일쇼크 이후 90년대까지 운용됐다. 그러다 버블붕괴와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되면서 성과주의 인사가 확산됐다. 미국 컨설팅사의 모델이 적용된 시점이다. 후지츠 관계자는 “93년 컨설팅사의 모델을 도입했는데 대실패로 끝났다”고 했다. 그 뒤 일본 기업은 성과주의를 표방했다. 일경련은 95년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을 발표했다. 고용의 유연성과 고도 전문성을 추구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년이 65세, 70세로 늘어나고, 비정규직이 확대되면서 소득격차가 심해지자 일본 기업들은 임금체계를 다시 들여다봤다. 그리고 탄생한 게 역할직무급이다.
인력난 겪는 중소기업은 호봉제가 더 유용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일본 에도시대 당시 한국은 태생부터 신분이 정해지는 조선시대였다. 상인집단도 행수라는 단순 직급이 전부였다. 최근 들어 성과형 연봉제가 대세로 받아들여지지만 여기엔 독특한 한국만의 관행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과가 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업에선 일종의 CEO 하사금처럼 성과급에 우월적 지위가 담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부장적 임금지급 관행이다. 일을 잘하면 장기근속을 유도했지 성과급을 주는 데는 인색했던 때도 있었다. 이런 문화가 시대에 뒤떨어진 호봉제를 계속 유지시킨 배경 중 하나다. 경영진이 호봉제를 바꿀 수 있는 기회도 여러 번 있었다. 80년대 호황기나 98년 외환위기 같은 때다. 그러나 호황에 취하고, 위기를 넘기느라 임금문제나 인사조직 개편은 뒷전이었다.

지금 와선 회사 내 조직 구조나 생산성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역할직무급으로 선회하려 한다. 하지만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같은 곳은 호봉제가 더 유용할 수 있다. 장기근속을 유도할 수 있어서다. 또 신입사원에겐 호봉제적 성격이 강한 연령에 따른 근속급이나 직능급을 적용하는 게 낫다. 일을 배우는 단계여서다. 이들에게 역할급이나 성과급을 적용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느 정도 숙련이 된 시점부터 역할직무급이나 성과급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무조건 역할급이나 직무급, 성과급이 통용되는 건 아니다. 회사 사정에 따라 직무와 역할 진단을 받고, 그에 합당한 생산성을 산출해서 정하는 게 맞다. 물론 중소기업이라도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할 땐 역할 급과 같은 것을 채택할 수 있다. 일률적인 호봉제보다 회사 사정에 맞춰 적절히 섞어서 적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인사와 임금문제는 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사안이어서 하는 말이다.

-도움말 일본 아세아대학 장상수 교수

김기찬 -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코리아텍에서 박사과정(인력경영 전공)을 수료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이며, 고용노동 분야 선임기자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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