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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 1093개로 ‘기술혁신의 제국’ 초석 놓다

1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끈 축음기 2 에디슨의 걸작인 전등 3 전화기 초기 모델


인구 3억2000만 명의 미국은 현재 세계 최고의 부국이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14년 17조3480억 달러(명목금액 기준)에 이른다. 전 세계 GDP의 22.45%를 차지하면서 압도적인 1위다. 2·3·4위인 중국(10조3565억 달러), 일본(4조6023억 달러), 독일(3조8744억 달러)을 합친 액수와 엇비슷하다. 인구 5억800만의 유럽연합(EU) 28개국 전체(18조5271억 달러)와도 별 차이가 없다. 1인당 GDP(명목금액 기준)은 5만5805달러로 인구가 1000만을 넘는 나라 중에서 1위다.


그 바탕에는 기술혁신의 경제가 자리 잡고 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인터넷 산업, 애플이 대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중심으로 세계의 창조 경제를 이끌고 있다. 테슬라의 전기자동차, 보잉의 항공사, 나사(NASA·미 항공우주국)와 스페이스X의 우주산업 등 첨단기술 산업은 전 세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실리콘 밸리에선 ICT는 물론 온갖 창의 기술이 새롭게 꽃 피우고 있다. 구글의 무인차가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이 아닌 실리콘밸리의 구글 캠퍼스에서 나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와 기술에 금융산업이 결합해 스타트업이 끊임없이 이뤄지고 진화하고 있다. 연구 중심의 미국 대학들은 끊임없이 새롭고 혁신적이며 창의적인 과학기술 연구결과를 양산하고 있다, 산·학·연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지식기반경제를 튼튼하게 뒷받침하는 구조다. 한마디로 미국은 불이 꺼지지 않는 창조경제 발전소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창조경제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쥔 패권국가인 이유다.


 


과학기술의 변방 미국을 선두로 끌어올려미국은 이 같은 과학기술 중심의 창의적 기술산업을 바탕으로 20세기 들어 세계 1위의 경제력을 유지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국제정치에서 글로벌 헤게모니도 쥐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과학기술은 유럽에 비해 뒤떨어진 게 사실이었다. 미국에는 프랑스(폴란드 출신)의 퀴리 부인이나 루이 파스퇴르, 독일의 막스 플랑크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처럼 세상을 뒤흔들 천재적 물리·화학·생물학자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과학기술과 기술경제의 변방이었다.


 

발명품인 축음기 본체를 살펴보고 있는 전 성기의 에디슨(왼쪽). [중앙포토]


하지만 미국에는 수많은 응용기술로 인류의 삶을 바꿔놓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이 있었다. 박사 학위는커녕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에디슨은 일생에 걸쳐 1093건의 특허를 자기 명의로 등록했다. 에디슨은 영국·프랑스·독일에서도 특허를 얻었다.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발명한 수많은 신제품의 영향력이다.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전력 생산과 송전 시스템, 그리고 전구의 발명과 개발을 들 수 있다. 이 발명들은 인류의 에너지 생산과 이용 방식은 물론 생산방식과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전기를 동력으로 쓰면서 인류는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에디슨의 업적 중 인류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바꾼 것이 바로 이것으로 평가 받는 이유다. 이를 통해 가정과 사무실, 공장에서 전기를 이용해 생활하고 업무를 보는 신세계를 만들어냈다. 이는 현대 산업사회로 가는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 파생산업과 상품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에디슨이 1만 번이 넘는 실험과 다른 발명 결과를 참조해 개발했다는 전등은 강한 빛과 긴 수명을 바탕으로 인류의 시간 이용을 늘렸다. 1886년 조선 최초로 경복궁에 불을 밝힌 전기등은 바로 에디슨사의 제품이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에디슨을 ‘의대손(宜代孫)’으로 음차했다. 에디슨의 전구는 소비자는 물론 투자자들도 매료시켰다. JP모건이 대규모 투자를 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와 이를 빛으로 바꾸는 전등이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됐다. 기술과 금융의 투자로 신 산업을 육성한다는 벤처의 논리가 이때 틀이 잡힌 것으로 평가된다.


에디슨이 발명한 음성 녹음기와 영화는 전 세계에 걸쳐 음반과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일으켰다. 아울러 현대 매스컴과 무선통신의 탄생을 이끄는 기술적 원동력으로도 작용했다. 전기차에 이용될 수 있는 배터리도 개발했다. 오늘날 전기차의 개발에도 거의 한 세기 전 에디슨의 발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영향력이 줄어들 줄 모르는 에디슨의 유산이다.


 


녹음기·영화·배터리도 발명에디슨의 업적은 자연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그리고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끈기 있게 실험을 계속해 끝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집념이 바탕이 됐다. 에디슨의 덕목을 살펴보면 과학자와 엔지니어에게 요구되는 그것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의 정신은 1932년 하퍼스 만슬리 9월호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유명한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에디슨은 업적과 정신 모두에서 인류의 삶을 진화시킨 위대한 과학기술자로 평가할 수 있다.


에디슨의 발명은 초강대국 미국을 이루는 바탕이 됐다. 에디슨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유럽의 중심국가들과 비교하면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미국을 응용기술 면에서 세계적인 혁신국가로 전환하는 견인차 구실을 했다. 한 사람의 과학기술자가 나라의 위상을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경우다.


에디슨은 학술적인 이론을 만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틀을 만든 발명의 방식은 오늘날 과학기술 연구개발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산업 연구 실험실을 만든 주인공으로 평가 받는다. 에디슨은 초기에 개발한 전신기 특허로 벌어들인 돈으로 1876년 뉴저지주 먼로파크에 먼로파크 연구소를 세우고 전업 발명가로서 본격적으로 실험을 계속했다. 산업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목적으로는 전 세계에서 최초로 세워진 연구소다. 실용기술 개발을 통해 기업과 관련 산업, 그리고 나라 경제를 키운다는 발상이 따지고 보면 에디슨에게서 나온 셈이다. 과학기술 지식을 종합해 산업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 기술을 개발해 새로운 기술상품으로 모험적인 사업을 한다는 기술벤처도 바로 에디슨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에디슨은 벤처의 선구자인 셈이다.


에디슨이 설립한 먼로파크 연구소는 연구개발 방식도 바꿔놓았다. 에디슨 이전까지만 해도 발명은 개인이 아이디어를 내서 각자의 실험실에서 혼자서 끙끙거리며 시제품을 제작해 시험해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에디슨은 이러한 수공업적인 발명의 방식을 혁신했다. 발명 작업을 팀 플레이로 바꿔놓은 것이다. 수많은 전문가와 재주꾼이 모여 협업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공동으로 시제품을 만들어 성능을 실험해 새로운 발명품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연구 중심 대학과 기업체나 공공 연구소에서 정착돼 있는 체계적인 연구개발 방식이다. 생산뿐 아니라 발명과 연구개발에서도 대량투입·대량생산의 시대를 연 것이다.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된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기술벤처는 미국 산업과 경제의 얼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런 창의적인 협동 작업으로 연구개발을 하도록 틀을 만들었다는 것 하나만 해도 에디슨은 인류에게 20세기 과학기술 시대의 거푸집을 제공한 혁신적인 과학기술자로 평가 받을 수 있다.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제품을 바탕으로 사업을 벌여 세계적인 산업으로 키우는 데도 누구보다 능했다. 그는 평생 자신의 발명을 사업으로 연결시킬 회사를 14개나 세우고 이를 이끈 대사업가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지금도 세계 굴지의 기업인 GE가 포함된다.


에디슨은 연구 개발 성과와 권리를 보호하고 이를 연구자의 이익으로 실현하기 위해 발명특허의 중요성에 눈을 뜬 인물로 통한다. 이런 발명가 에디슨 덕분에 그의 나라 미국의 신기술을 바탕으로 20세기 기술산업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었다.


 


1%의 영감과 99%의 노력”에디슨의 성장과정도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 어려서 에디슨은 미시간 주의 포트 허드슨과 디트로이트 사이를 오가는 열차에서 신문과 사탕을 팔았다. 창의적인 발명으로 세상을 바꾼 에디슨이 처음으로 한 일은 신문 판매였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해 채소도 팔았다.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신문이나 책을 읽으면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열차 빈 칸에서 여러 가지 화학적 분석과 실험을 했다. 이처럼 에디슨을 만든 것은 바로 호기심이었다.


신문 판매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신문 제작에도 나섰다. 가판용 신문 발행권을 얻은 에디슨은 4명이 직원을 채용해 ‘그랜드 트렁크 헤럴드’라는 신문을 자체 제작해 다른 신문들과 함께 판매했다. 에디슨이 일평생 벌인 벤처 사업의 시초는 신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느 날 신문 가판을 정리하고 철도 전신기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얻었다. 철로에서 달려오는 기차에 치일 뻔했던 세 살 소년을 구했는데 그의 아버지인 매킨지가 일자리를 연결해준 것이다. 1866년 19세가 된 에디슨은 전신회사인 웨스턴 유니온 직원으로 켄터키주 루이스빌의 AP통신 지국의 전신을 담당했다. 에디슨은 야간 근무를 자원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이 좋아하는 독서와 과학실험으로 보냈다. 문제는 에디슨이 평생 집착했던 이 두 가지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1867년 산화납축전지를 시험하던 중 강산성 물질인 황산이 넘쳐 복도를 지나 상사의 책상 아래까지 적셨다. 황 냄새와 부식된 바닥재에 화가 난 상사는 그날로 에디슨을 해고했다.


최대의 위기를 만난 에디슨은 이를 인생 역전의 기회로 만들었다. 전업 발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뉴저지주에 있는 선배 전신기사 프랭클린 포프의 집 지하실에서 실험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전신기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신 띠와 같은 관련 발명에 집중했다. 1869년 자동 투표 기록기로 첫 특허를 획득했다. 에디슨이 대발명가로 떠오르기 시작한 계기였다. 에디슨이 걸은 길은 시작은 초라했으나 결말은 창대한 벤처 기업인의 모델이 됐다. 기술을 바탕으로 한 모험적인 창업은 지금도 미국 경제의 DNA가 되고 있다. 오늘날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는 귀감이기도 하다.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chae.inta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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