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양극화 불만 고조, 동북3성·허난·산시서 마오주의 꿈틀


위안위화(袁庾華·70)는 중국 허난(河南)성 정저우(鄭州)의 빈민가 주택에 사는 독거노인이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그의 유일한 낙은 1995년 자신이 설립한 ‘살롱(중국어 표기론 사룽·沙龍)’에서 정치 토론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반대자들과 맞서 격렬한 토론을 벌이곤 한다. 마오 시대가 독재였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그때는 전 군중이 정치에 참여했고, 노동자계급이 정치의 주역이었다”고 강변한다.


위안위화는 홍위병이었다. 도살공장 직원이던 그는 문혁에 참가해 한때 수십만 명 규모의 허난성 조반파(造反派) 홍위병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76년 마오 사망 후 그는 사인방(四人幇) 등과 함께 문혁의 원흉으로 체포돼 10여 년을 옥살이했다. 석방 후 처음 맞닥뜨린 바깥 사회는 더 이상 그가 알던 중국이 아니었다. “돈 냄새가 천지에 진동하는 사회에서 나는 절망을 느꼈다”고 위안위화는 NHK와의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현재 그는 다시 삶의 확신을 찾았다. 그와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의 주류를 형성할 정도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집 근처 5·1공원에 가면 항상 “퇴직연금이 한 달 450위안인데 집세가 400위안이다. 매일 쓰레기나 뒤지란 말이냐” “50년 넘게 일해도 돈이 없어 병원도 못 가는데 무슨 얼어 죽을 ‘조화세계(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이 내세웠던 중국 사회의 지향 모델)’냐”, 이런 생활고와 정부·관료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으레 ‘평등했던’ 마오 시대에 대한 향수로 이어진다. 어느새 마오를 찬양하는 ‘홍색 가요’를 다 함께 부른다. 위안위화는 “(문혁 당시처럼) 여전히 관료·자산계급은 주요한 적이고 그들과 그 가족이 개혁·개방의 최대 수혜자”라고 강조한다.

1 1966년 8월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홍위병 대회에 마오쩌둥이 모습을 드러내자 19세의 쑹빈빈(오른쪽)이 마오에게 홍위병 완장을 채워 주고 있다.

2 지난 3월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는 먹고 싶다’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나와 임금체불 항의시위를 벌인 룽메이그룹 노동자들.

3 문혁 50주년 이틀 전인 14일 국제걷기대회가 열린 랴오닝성 다롄에서 일부 참가자가 마오쩌둥의 사진과 그를 찬양하는 문구가 쓰인 깃발을 흔들고 있다. [웨이보·중앙포토]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문혁·1966~76)이 발발 50주년을 맞았다. 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주자파·走資派)’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선포하는 ‘5·16 통지’를 내려보낸 것이 문혁의 시작이었다. 이후 76년 마오의 사망과 사인방 체포로 문혁이 종료될 때까지 72만9511명이 박해를 받았고, 이 중 3만4800명이 죽었다는 것이 중국 법원의 공식 발표다. 81년 공산당이 채택한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당·국가·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한 후 문혁은 공개적으로 토론되지 못하는 금기의 역사가 됐다.


봉인된 문혁이 사회 기층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경제 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구조조정으로 인한 국유기업 대량 해고 등으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진 탓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신마오주의자들의 주장을 담은 메시지가 퍼져 나가고 ‘노동자의 희생으로 엘리트의 부를 더욱 늘리고 있다’는 그들의 논리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공산당 내부 구성원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며 현재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포퓰리즘 정치와 유사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좌파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학자와 작가 등 다양한 논객이 마오주의를 전파하고 있다. 이들은 마오의 치세를 “평등하고 역동적이었던 시대”로, 문혁을 “관료들에게 억눌려 있다가 비로소 할 말을 한 전면적 민주주의 실험”이었다고 재평가하고 있다. 78년 이래 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한 개혁·개방에 대해선 “일부 부자만 배 불리고 대다수 노동자·서민을 궁핍에 빠뜨렸다”고 폄하한다. “주자파들이 수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등 문혁 때 쓰이던 ‘주자파’란 용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50주년을 즈음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선 문혁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논의도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위안항이하오(遠航一號)’란 논객은 20일 좌파 사이트 ‘훙써중궈(紅色中國)’에서 세계은행 지표를 근거로 제시하며 “(문혁 기간인) 1965~75년 동안 세계 평균 기대수명은 6년(55세에서 61세), 한국은 7년(57세에서 64세) 길어졌지만 중국은 무려 15년(49세에서 64세)이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도 3.8%로 세계 평균(2.4%)을 훨씬 앞질렀다”며 “문혁이 실제로 노동 군중의 이익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문혁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던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50주년 다음 날인 17일 평론을 게재했다. “역사는 이미 문혁이 이론과 실천에서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증명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혁명과 사회적 진보가 될 수 없다”며 “(우리는) 문혁과 같은 잘못이 재연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혁 재평가’를 통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조반파 홍위병은 자신들이야말로 문혁의 숨겨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위안위화는 “피해자들 하면 흔히 고깔을 쓰고 머리를 땅에 박은 관료나 박해받은 지식분자를 연상하지만 거의 보황파(保皇派) 홍위병의 짓이고, 실제 밝혀진 조반파의 박해 사례는 몇 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홍위병은 문혁 초기에 활동한 보황파와 이후 주류를 이룬 조반파로 나눌 수 있다. 보황파는 대부분 고위 관료 자녀로 문혁 초기 과격한 폭력성을 보였다. 조반파는 서민 출신이 다수로 70년대 들어 농촌으로 하방(下放)돼 마오주의 사상 개조운동을 펼쳤다.


홍위병의 운명은 문혁 이후 확연히 갈린다. 66년 당시 19세였던 보황파 쑹빈빈(宋彬彬)은 베이징사범대부속중학교 당서기였던 볜중윈(卞仲耘)을 몽둥이질 끝에 죽게 만든 인민재판을 주도했고, 천안문광장 집회에서 마오에게 홍위병 완장을 채워 주고 ‘야오우(要武)’란 이름을 하사받아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 3년간의 네이멍구(內蒙古) 하방 생활을 마치고 72년 대학에 진학했고, 국비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의 부친은 80년대 덩샤오핑·천윈(陳雲)·보이보(薄一波) 등과 함께 8대 원로로 불린 쑹런충(宋任窮)이었다.


반면 문혁 중·후기에 주로 활동한 조반파들은 문혁이 끝나면서 박해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지도부급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져 90년대가 돼서야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적극 가담자는 6개월~3년간의 조사와 강제학습에 시달렸다. 학력도 대부분 중·고교 중퇴로 끝나 현장 노동자 외에 구할 수 있는 직업도 없었다.


투옥과 핍박 속에 숨죽여 있던 조반파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 동북 3성과 허난·산시(山西)·쓰촨(四川)성 등 내륙 지방에서 부실 국유기업의 임금 체불과 민영화가 대두되면서다. 조직적인 노동운동의 경험이 없던 젊은 노동자들 대신, 과거 문혁의 경험을 가진 조반파 출신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반파들이 이들 지역에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정저우·뤄양(洛陽) 등지에선 마오주의를 앞세운 조반파의 주장들이 지역사회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고 장윤미 성균중국연구소 협동연구원은 설명했다. 이곳에선 마오쩌둥을 비판했다가 집단 린치를 당하는 일도 벌어지곤 한다.


인터넷도 마오주의 전파의 기폭제가 됐다. 2005년 개설된 ‘궁런왕(工人網)’이 활동 무대가 됐고, 현재는 ‘우유즈샹(烏有之鄕·‘유토피아’란 뜻)’ ‘포투(破土)’ 등에 마오 사상에 관한 글들이 활발히 올라오고 있다. 마오주의자들은 살롱에서 토론을 벌이고, 광장에서 마오를 찬양하는 노래와 발언·구호 등으로 관심을 환기시켰다. 2012년 반일시위 땐 마오의 사진을 시위대에 나눠 주기도 했다.


이렇게 마오주의가 사회 기층에서 확장되면서 정부와 기득권에 대한 저항담론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지난해 말부터 ‘창신(創新)’을 부르짖으며 부실 국유기업의 대규모 감원 등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골자로 하는 ‘공급 측 개혁’을 강하게 압박 중이다. 이에 따라 대규모 부실 국유기업이 포진한 동북 3성과 내륙 지방에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발생했거나 발생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모두 마오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곳이다.


대표적 사례가 지난 3월 헤이룽장(黑龍江)성 국유 석탄기업 룽메이(龍煤)그룹 광부와 가족 1만여 명이 벌인 임금체불 항의시위였다. 루하오(陸昊) 헤이룽장 성장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석상에서 ‘룽메이그룹이 지금까지 임금을 한 푼도 체불한 적이 없다’고 발언하자 흥분한 광부들이 거리로 몰려나온 것이다. 이들은 “공산당은 우리에게 돈을 돌려달라” “우리는 살고 싶다, 우리는 먹고 싶다”는 구호를 외치며 무장경찰과 무력충돌을 벌였다. 백승욱 중앙대 교수는 “동북 지방은 2000년대 초반 대규모 파업 때도 문혁을 경험한 중간 관리자들이 파업을 주도했다. 이번 파업도 노동자들의 집단적 권리와 결사의 자유를 중시하는 문혁 주도 세대의 마인드가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낙후된 동북과 내륙뿐만 아니라 경제가 발달한 연해 지역에서도 마오주의의 영향이 미칠 가능성이 제기된다. 기업 구조조정이 일상화된 광둥(廣東)성의 경우 노동자 파업도 그만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장영석 성공회대 교수는 “광둥성 총공회(노동자 조직) 인사가 ‘일상화된 파업’을 ‘신창타이(新常態·new normal)’라고 표현하더라”며 “광둥성은 원래 계급의식이 희박한 젊은 농민공이 대부분이다. 그런 노동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할 사상적 자원을 마오주의로부터 끌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임금 몇 % 인상’이나 ‘감원 반대’가 아니라 “노동자는 국가의 주인” “정부는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 등 그들이 외치는 구호가 마오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태그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