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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락된 청혼


김 이사는 동료들과 함께 점심으로 누들박스에서 타이칠리를 먹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반대로 잘하지 못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김 이사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잘 먹지 못한다. 조용하고 능숙하게 식사하는 동료들 속에서 불우한 김 이사는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고 땀을 닦고 콧물을 닦고 다시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며 타이칠리를 먹었다.


그때 누군가 프러포즈 이야기를 꺼냈다. 두 아이의 엄마인 박 대리는 반포대교 밑에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데이트를 하면 항상 집까지 데려다 주던 남자는 그날 어쩐 일인지 박 대리에게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했다. 꼭 남자가 여자를 바래다 주어야 하는 법도 없고 가끔은 이렇게 바꿔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박 대리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반포대교에서 내리는 남자를 따라 내렸다. 반포대교 아래에서 남자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그날따라 피곤했던 박 대리는 이제 그만 가자고 보챘지만 남자는 조금만 더 있자고 달랬고 그러다 반포대교에 불이 켜지고 무지개 분수가 나오자 남자는 이걸 보여주며 프러포즈하고 싶었다고 했다. 동료들은 남편이 멋지다고, 로맨틱하다고 말했지만 김 이사는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라인댄스 동호회에서 아내를 만난 엄 대리는 이벤트 업체를 통해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선배네 집들이 가자고 해서 데려간 곳의 문을 열면 오색 풍선이 가득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이 찍은 사진들이 손발은 물론 솜털까지 오그라들 정도의 자막과 함께 편집되어 영상으로 나오고 케이크와 와인이 나오고. 동료들은 감탄했지만 김 이사는 땀을 닦고 콧물을 닦았다.


외모부터 로맨틱한 박 과장은 프러포즈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거 한번 보세요 하면서 자신의 휴대전화기에 들어있는 사진 몇 장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늘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쪽 경비행기를 탄 아내가 박 과장이 탄 저쪽 경비행기를 찍은 사진. 비행기 본체에는 “훈화야! 결혼해 줄래?”가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아내가 스튜어디스라서 그렇게 프러포즈했다는 것이다. 동료들은 마치 고도 600피트를 나는 것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김 이사는 지상의 식당에서 타이칠리를 먹었다.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고 땀을 닦고 콧물을 닦고 다시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면서.


김 이사는 현기증이 났다. 원래도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경비행기로 프러포즈하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분수도 이벤트도 경비행기도 다 좋은데 프러포즈에서 정말 중요한 건 거절의 가능성이에요. 『사랑의 비밀』에서 메건 트레지더가 이렇게 말했어. “사랑의 모든 의례 중에서 가장 두렵고 어려운 것은 프러포즈다. 그 순간은 결혼의 행위 자체보다도 더 강렬하다. 프러포즈에는 신념의 대담한 도약이 요구되는데, 그 이유는 첫 키스가 그렇듯 미리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일단 말을 꺼낸 뒤에는 취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다들 프러포즈를 언제 했어요? 결혼할 게 확정된 후에 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요즘은 주로 양쪽 집에 정식으로 인사 드리고 상견례 마친 후에 그때 하죠. 우리나라는 결혼을 당사자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양가 부모의 승낙을 얻어야 하거든요. 둘이서 프러포즈를 한다고 그게 정말 결혼이 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프러포즈야. 프러포즈의 드라마는, 클라이맥스는, 거절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말이지. 거절이 배제된, 이미 수락된 청혼이 무슨 프러포즈야. ‘애프터포즈’지. 스포일러 알고 보는 영화처럼 무슨 긴장이 있고, 감동이 있겠어요?


그럼 이사님은요? 이사님은 프러포즈 어떻게 했어요?


나는 다르지. 내가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아내와 연애할 때 하루는 함께 밤을 보내게 됐어.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아내가 그러더라고. 결혼하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내가 그러니까 자기랑 잤으니까 결혼을 해야 된다는 거야. 잠만 잤는데? 아무튼 잤으니까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고. 그래서 결혼했어요.


누군가 중얼거렸다. 뭐 마찬가지네. 거절이 배제된 청혼이기는.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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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