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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5)

만송원 쓰시마섬 이즈하라시에 있다. 쓰시마섬의 토착 영주인 소씨(宗氏)의 원찰이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통해 세종에게 군권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쳤다. 쓰시마섬=사진가 권태균


? 조선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은 사대교린이었다. 중국에는 사대하고 일본을 비롯한 여타 국가와는 사이 좋게 지내는 정책이 교린이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주의는 통일제국 명(明)과 공존하기 위한 실리 외교였다. 사대는 국체 보존을 위한 소국의 외교정책이었다.


? 세종도 태종의 사대 외교정책을 계승했다. 세종이 사대 외교에 주력한 이유는 강대국 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북방 강역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명의 신뢰 획득은 중요했던 것이다. 세종은 재위 14년(1432) 2월 10일 “우리나라의 근심은 북방에 있다면서 북방 야인(野人:여진족)들의 침략에 대비해 연대(烟臺:높은 포대)를 쌓고 화포(火砲) 등을 준비하게 했다. ? 드디어 그 해 12월 9일 여진족 400여 기가 여연(閭延) 경내에 침입해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은 크게 분노해 대규모 정벌을 결심했다. 문제는 자칫하면 명나라와 분쟁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종은 “우리나라에서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는 것은 상국(上國:명)의 경계를 마음대로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러한 뜻을 갖추어 중국에 주문(奏聞)하는 것이 어떻겠는가(세종실록 14년 12월 9일)”라고 말했다. 이런 뜻으로 세종이 명나라에 보낸 국서는 극도로 공순한 말 속에 칼날이 숨어 있었다.?


“홍무(洪武) 18년(1385) 태조 고황제(高皇帝:주원장)의 조지(詔旨)에 화외(化外:이민족 지역)를 구별하지 않고 일시동인(一視同仁:모두 평등하게 사랑함)한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본국은 이미 동인(同仁)하시는 안에 있으니 성자(聖慈)를 입은 것이 밝게 내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야인들이 전처럼 작란하면 우리나라에 영(令)을 내리셔서 태종 문황제(文皇帝:영락제)께서 선유하신 성지의 뜻에 따라 편의대로 대책을 세워 쫓아가 잡도록 한다면 온 나라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세종실록14년 12월 21일).”


? 조선이 편의에 따라 만주의 여진족을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은 이 국서에서 태종 10년(1410) 여진족 올적합 금문내(金文乃) 등이 경원부를 공격하자 길주도 도안무 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 조연(趙涓)이 “군사를 거느리고 두문(豆門)지방까지 추격했다(領兵追到豆門地面)”고 말했는데, 두문은 곧 압록강 북쪽 토문(土門)이었다. 태조실록은 현재의 두만강 연안 경흥 동쪽 러시아령에 알동이 있고 그 서북쪽 120리 지역에 두문성이 있다고 전해주고 있으니 두문은 곧 만주에 있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세종 때에야 국경이 압록강까지 확대된 것처럼 서술해왔다. 그러나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12월 14일자는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강 연변 1000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고 말해 태조 때 이미 조선의 국경이 압록강임을 명시하고 있다.


? 여진족이 여연을 공격하자 세종은 재위 15년 3월 최윤덕을 평안도 도체찰사로 삼고 황해·평안 양도의 군사 1만5000여 명으로 만주 지역을 공격해 180여 명을 사살하고 25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여진족이 다시 준동하자 세종 19년(1437) 무렵 이 지역을 포기하자는 견해가 대두했다. 세종은 재위 19년 9월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에게 8000명의 군사를 주어 공격하게 했는데 만주 깊숙한 오라산성(兀刺山城:현 환인현 오녀산성)까지 진격했다. ? ? 세종은 외교와 전쟁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육진 개척의 주역인 무신 최윤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전조(前朝:고려)와 국초(國初)에 간혹 무신으로서 정승을 삼은 이가 있는데, 어찌 그 모두 최윤덕보다 뛰어난 자이겠는가. 그는 비록 수상(首相:영의정)이 되더라도 가할 것이다(세종실록14년 6월 9일).”


? 세종은 조선을 서생(書生)들의 나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 태종과 세종은 외형상 명나라에 사대(事大)했다. 두 임금은 사대라는 형식적 관계를 통해 대국인 명과의 분쟁을 방지하면서 강역 문제에 대해선 실리를 꾀했다. 태종과 세종은 조선이 명과 전쟁을 회피하면서 확보할 수 있는 북방 최대 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의 공험진이라고 보았다. 고려 예종 3년(1108)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이 17만 군사를 이끌고 북진해 성을 쌓은 곳이 공험진이다. ? 태종은 조선이 고려를 계승했으니 고려의 북방 경계는 자연히 조선의 강역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4년(1404) 예문관 제학(提學) 김첨(金瞻)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 “본국 동북지방의 공험진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의 고을이 모두 본국의 영토입니다”라는 국서를 보냈다.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가 조선의 강역이라고 설명하는 국서였다.


?그러나 그 강역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세종이 비로소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종은 강역을 공험진까지 확장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먼저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세종은 신하들에게도 이를 숙지하게 했다. 세종은 재위 15년(1433) 1월 최윤덕을 평안도절제사로 보낸 후 그해 3월 여러 신하에게 공험진에 대한 숙제를 준다.


“윤관이 주(州)를 설치할 때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명 고조)가 조선 지도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조선 경계라’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해서 아뢰라.(세종실록 15년 3월 20일)”


 

송조천객귀국시장(送朝天客歸國詩章)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종이 취한 명과의 사대 외교는 다양한 포석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세종이 ‘윤관이 설치한 길주와 지금의 길주가 같은 지역인가’라고 물은 것은 의미심장했다. 원래 길주는 함길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지 않았느냐는 뜻이기 때문이다. 길주를 비롯해 윤관이 쌓은 4성이 모두 공험진 근처에 있으리라고 세종은 생각했던 것이다. 지명이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변천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서 330여 년 전 고려에서 설치한 길주가 만주에 있었다는 세종의 견해는 타당한 것이었다.? 공험진에 대한 이런 화두를 던진 세종은 재위 14년(1432) 12월 좌대언(左代言:좌승지)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감사로 삼아 두만강 북쪽 강역을 확장하게 했다. 김종서를 함길도 감사로 삼기 10개월 전인 그해 2월 활과 화살을 내려주면서“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고 말했다. 문신에게 활을 내려주며 항상 차고 있으라고 당부한 것은 그에게 북방 강역 확장의 임무를 맡기겠다는 포석이었다. 무신이 아닌 문신을 쓴 이유는 단순하게 군사력으로 여진족을 밀어내는 것만으로 강역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여진족을 회유해야 하고 무엇보다 조선 백성들을 이주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 김종서는 토관직(土官職:지역인들에게 주는 관직)을 대거 신설하고 일반 백성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허용하는 특혜를 주면서 함길도 이주를 권했으나 먼 북관(北關)으로 이주하려는 백성은 많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김종서는 벼슬을 주고 양식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으로 육진 거주 백성을 늘렸다. ?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세종은 재위 21년(1439) 3월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이 조선 경계’라고 선언했다. 세종은 태종이 이미 사신 김첨(金瞻)을 보내 공험진 남쪽이 조선 영토라고 말했음을 상기시켰다. 명의 시조 주원장이 공험진 이남을 고려(조선) 영토로 인정했다는 논리에 명나라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 세종은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운 공험진 선춘점을 찾으면 조선의 국경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실록에는 김종서의 보고 내용은 실려 있지 않지만 김종서가 공험진과 선춘점의 위치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해 보고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보고 내용은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해 조선 초기의 각종 지리서를 편찬할 때 사료로 이용됐다.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조항이 이를 말해준다.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다…고려 예종 2년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을 쌓아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세종실록 지리지함길도)”


? 고려의 윤관 장군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 9성을 쌓고 ‘고려지경’이란 비석을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함길도의 사방 경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함길도의)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 경계는 철령(鐵嶺)이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했는데, 높은 봉우리가 백두산에서부터 기복(起伏)해 남쪽으로 철령까지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다. 북쪽은 야인(野人:여진족)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 철령에서 공험진까지 1700리가 함길도의 남북 길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조는 공험진의 위치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두만강과 접해 있는 경원에서 “북쪽으로 공험진까지 700여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까지 700여 리”라는 것이다. 세조 때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작성한 동국지도(東國地圖) 역시 공험진과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과 명의 북쪽 국경은 두만강 북쪽 700여 리 지점이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세종 때의 조선 국경을 두만강으로 축소시켰지만 당대의 많은 기록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명나라로부터도 인정을 받은 국경선이라는 점이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62호 2010년 4월 18일, 제163호 2010년 4월 25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404http://sunday.joins.com/archives/4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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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