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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79] 주밍, 린보취 60세 생일 때 "저의 애정을 선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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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오른쪽 두 번째), 주더(왼쪽 세 번째), 저우언라이(왼쪽 두 번째)와 함께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특사 헐리 일행과 회담을 마친 린보취(왼쪽 첫 번째). 1944년 가을 옌안. [사진 제공 김명호]


중국의 20세기는 반역자들의 전성기였다. 출신성분도 빈농, 부잣집 자녀, 교사, 군인, 해외 유학생, 마술사, 연예인, 의사 등 다양했다.

1931년 가을, 일본군이 동북을 점령했다. 전국적으로 애국운동이 벌어졌다. 궁지에 몰린 중공에게는 이런 호기가 없었다. 선전 전문가들이 지혜를 짜냈다. 도시마다 항일 구호가 나붙고, 시위가 잇달았다. 구구절절, 흡입력이 대단했다. 주밍(朱明·주명)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공합작이 성사되고 항일전쟁이 폭발했다. 인구 이동이 시작됐다. 주밍도 부모 따라 항전 수도 충칭(重慶)으로 이주했다. 주밍은 호기심이 많았다. 중공의 항일근거지 옌안(延安)에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있는지 궁금했다. 무조건 집을 나섰다.

검문이 엄격했다. 주밍은 시난연합대학(西南聯合大學)에 응시하러 간다고 둘러댔다. “너는 너무 어리다. 군이나 정부기관에서 발행한 통행증이 없으면 갈수 없는 곳”이라며 제지 당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엔안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국·공합작 초기, 국민당은 시안(西安)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겠다는 중공의 요청을 승인했다. 중공은 린보취(林伯渠·임백거)를 주임으로 파견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지식 청년들을 옌안까지 수송하는 것이 중요 임무였다. 청년들 사이에 린보취에 관한 일화가 오르내렸다. 주밍은 린보취가 영국 외교관에게 했다는 말은 듣고 뭉클했다. “장제스 장군은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를 소멸시키려 했다. 우리는 시종일관 국민의 이익을 대표했다. 국민의 이익을 견지하기 위해 장군과의 무력투쟁이 불가피했다.” 주밍은 10년에 걸친 내전이 장제스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국민당과 장제스에게 가졌던 호감이 싹 가셔버렸다.

38년 11월, 국민정부가 주관한 전시 전략회의가 충칭에서 열렸다. 린보취, 둥비우(董必武·동필무), 우위장(吳玉章·오옥장) 등이 중공 대표로 참석했다. 옌안 행이 좌절된 지 2개월, 집안에서 울분을 삭히던 주밍은 아버지 찾아온 노교수의 말을 엿들었다. “공산 비적 두목들이 충칭에 왔다. 대 지식인으로 린보취가 인솔자다.”

린보취의 강연이 있는 날 주밍이 빠질 리 없었다. 주밍은 넋을 잃었다. 감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국민당 요인과 각 당파, 지방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 저명한 학자들이 린보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린보취는 경제와 고고(考古), 역사와 문학, 중공의 관할구역인 산간닝(陝甘寧) 변구(邊區)및 국내외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노혁명가의 학문과 수양에 경악했다. 나는 옌안에 갈 결심을 굳혔다.”

친척과 친구들은 이구동성, 주밍을 말렸다. “겨울이 잔인한 곳이다. 의료시설과 약품이 귀하고 폐병 환자가 넘친다. 비행기도 힘든 고산 준령을 수없이 넘어야 한다.” 주밍은 개의치 않았다. “린보취가 견딘 고통을 나라고 극복 못할 이유가 없다.”

이듬해 봄, 옌안에 도착한 주밍은 여성 간부 양성기관인 엔안여자대학에 입학했다. 황토 고원과 녹색을 뽐내는 수목, 붉은 단풍, 모두가 신선했다. 린보취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주밍은 글 한편으로 주목을 받았다. ‘원래의 계급에서 해방되기까지’ 자신의 신분과 가정을 배반하는 대담한 내용이었다. 하루는 한 교사가 주밍을 불렀다. “린보취가 너를 만나고 싶어한다.” 충칭의 강연장에서 린보취를 본지 5년 만이었다.

린보취는 토굴로 찾아온 주밍을 보자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부터 물었다. “스물 다섯입니다.” 린보취는 당에서 추진 중인 정풍운동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주밍은 솔직했다. “나의 모든 문제에 관한 인식은 선생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당의 관점에서 출발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개조하겠다는 생각도 선생님의 글을 읽은 후에 들었습니다. 당의 요구는 제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린보취는 당황했다. “나는 너를 혁명으로 인도한 교량에 불과하다. 당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라. 그러지 못하면 모든 게 의미가 없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장칭(江靑·강청)처럼 독서를 게을리 하지 마라.” 주밍의 얼굴이 새빨개 졌다. “저를 장칭 따위와 비교하지 마십시오. 장칭이 어떤 여자인지 잘 압니다.”

항전 승리 5개월 전, 린보취의 60세 생일 잔치가 성대하게 열렸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주더(朱德·주더),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연명으로 ‘鶴髮童顔, 老當益壯’ 8자 글씨를 선물했다. 린보취의 답사는 간결했다. “나는 한 명의 전사(戰士)일 뿐, 쓸모 있는 노병(老兵)이 소원이다.”

그날 밤 주밍은 제 발로 린보취의 토굴을 찾아갔다. 제지하는 경호원에게 일갈했다. “은사이며 인도자인 분에게 생일 선물을 갖고 왔다.” 린보취 앞에서도 당당했다. “저의 애정을 선물로 드리러 왔습니다.

날이 밝자 소문이 퍼졌다. 저우언라이와 차를 마시던 마오쩌둥이 싱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우리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다.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았다. 빨리 결혼시킬 준비나 해라.”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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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