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북한 리포트] 일본 초밥장인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은 면담 막전막후

북한에 아내와 딸 생존하나 아들은 2012년 방북 직전 의문의 죽음… 후지모토 겐지 5월 말 방북 시 북일관계에 새로운 돌파구 열릴까?
기사 이미지

2012년 7월 북한을 방문 당시 만찬장에서 김정일 제1위원장에게 와인을 따르고 있는 후지모토 겐지. [사진 슈칸겐다이]

방북을 마친 후지모토가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시점은 4월 25일 밤. 콘도 기자는 수많은 취재진을 따돌리고 후지모토를 차에 태워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그 호텔의 방을 잡아 모두 5시간에 걸쳐 후지모토의 방북 스토리를 청취했다. 이렇게 작성된 방북수기엔 김여정이 결혼했을 것이란 국내 북한학계의 견해를 뒤집는 증언이 나왔다.

“지금 막 평양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왔네. 이번 방북은 갑자기 성사된 일이라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녀왔어. 김정은 대장과는 이번에도 3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네.” 
기사 이미지

2012년 7월 방북 만찬장에는 김정은의 부인 이설주도 참석했다. 후지모토 겐지와 인사를 나누며 악수하고 있다.

후지모토 겐지(69) 씨가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연락해 온 때는 4월 23일이었다. 그는 같은 달 12일 평양에 들어가 총 12일에 걸쳐 체류했다고 말했다. 후지모토 씨의 이번 방북은 2012년 7월 이후로 3년 9개월 만에 이뤄졌다.

후지모토 씨는 1947년 아키타현 출생으로 초밥 장인이다. 1982년 북한에 건너가 고려호텔 일식당 등에서 요리사로 일했다. 그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총애를 받았으며 1989년 당시 북한의 국민가수 엄정녀와 결혼해 1남 1녀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2001년 4월 처자식을 북에 남겨둔 채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출판한 저서 <김정일의 요리사> <김정일의 사생활>을 통해 그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김정일 패밀리의 사생활을 폭로해 세계적인 화제를 불렀다.

당시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하면서 “김정일 총서기(국방위원장)의 후계자는 김정은 이외에는 없다”고 예견했다. 1983년에 태어난 김정은 제1국방위원장이 7세가 되던 무렵 후지모토 씨는 그의 놀이친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내가 후지모토 씨를 처음 취재한 것은 2003년이었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북한을 전격 방문해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이 개최됨에 따라 나도 기자로서 처음 북한을 방문하게 됐다. 그때 김정일 패밀리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족처럼 지내가다 귀국한 일본인 요리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일본 경찰청이 후지모토 씨를 은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찾아나선 끝에 마침내 그를 만났다. 지난 13년간 50번 이상은 그를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취재했다. 내가 후지모토 씨를 신뢰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에는 거짓말이나 과장이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 “들은 적이 없다”라고 정직하게 이야기한다. 50번이 넘게 그의 이야기를 취재해왔지만, 아직도 후지모토 씨의 입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어쨌든 현재까지도 13년에 걸쳐 김정일 패밀리와 아주 가깝게 지내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제 1 국방위원장의 ‘예기치 않는 만행’을, 오랫동안 그들을 겪어왔던 이심전심의 감으로 예측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의 한마디한마디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과 친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1990년 1월 8일 김정은의 만 7세를 축하하는 생일파티가 열렸다. 김정일 총서기(당시는 서기)는 이날 처음으로 측근 간부에게 김정은을 소개했다. 후지모토 씨도 ‘일본에서 온 요리사’ 자격으로 김정은을 만났다.

후지모토 씨는 “정은 왕자를 보자마자 생긋 웃으며 자기소개를 하고 악수를 건넸다. 그러나 그는 강하게 노려보면서 무시해버렸다. 일제 36년의 원한에 대해 교육받았기 때문에 나를 원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김정일)로부터 ‘후지모토 아저씨와 악수해’라는 꾸중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지못해 내게 손을 내밀었다”고 말했다.

 
l 막내 왕자의 ‘놀이친구’ 되다
기사 이미지

어린 시절의 김정은 북한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그의 어머니로 알려진 고영희(왼쪽). 군복 차림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김정은을 고영희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중앙포토]

어느 날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 총서기의 전용 별장 중 한 곳인 ‘신천 초대소’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김정일 패밀리와 연날리기를 하며 노는 과정에서 김정은과 친해졌다고 한다.

그는 “김정은의 연이 잘 날아오르지 않자 김정일 총서기로부터 ‘어떻게든 해봐라’는 명령을 받고 연에 꼬리를 붙여 정은 왕자에게 건넸다. 덕분에 정은 왕자가 날린 연이 점점 높이 날아 올라갔고 그는 매우 기뻐했다”고 말했다.

후지모토 씨는 이날 김정일 총서기로부터 “앞으로 정철·정은 형제의 놀이상대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부탁받았다고 한다. 이어 그는 김정일이 고(故) 고용희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장남 정철과 차남 정은 가운데 차남을 후계자로 정하게 된 일화를 소개했다. 2000년 8월 정철 씨가 만 18세, 정은 씨가 만 17세 되던 무렵의 일이다.

그는 “당시 김정일 패밀리와 함께 ‘원산 초대소’(원산에 위치한 김정일 전용 별장)에 휴가를 갔다. 그날 저녁 김정일이 장남 정철에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지 질문했다. 정철은 부정적인 답을 했다. 이어 김정일은 차남 정은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는 형과 다르게 긍정적으로 답했다. 그 순간 후계자는 정은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이어 후지모토 씨는 “원산초대소 휴가 이후 가족모임마다 김정일 총서기 옆에 차남 정은이 앉게 됐다. 장남 정철은 고 고용희 부인과 여동생 여정과 함께 ‘그 밖의 사람’ 중 한 명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정일은 평소 장남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후계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김정일은 장남을 두고 “저렇게 계집애 같은 녀석은 안 된다”라고 깎아내렸다. 반면 차남에 대해서는 “정은은 나를 닮아서 호랑이처럼 믿음직스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지모토 씨도 김정일과 비슷한 의견을 드러냈다. 자신이 바도 김정은이 후계자에 더 적합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형제가 농구 시합을 할 때 심판을 봤다. 정은이 이긴 날 정철은 자신의 동료에게 ‘오늘 수고했어’라고 말할 뿐이었지만 정철이 이긴 날 정은은 분노하며 긴급 미팅을 소집해 그날 좋지 않았던 플레이를 철저하게 다시 연습시켰다”고 말했다.

2000년 8월 원산 초대소에서 ‘1호 열차(김패밀리 전용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의 호출을 받아 그를 찾았다. 김정은은 평소와는 달리 다소 가라앉은 모습으로 북한의 장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김정은은 그에게 “일본은 훌륭한 나라다(정은은 가명을 사용해 두 차례 일본을 방문한 적 있다). 그러나 조선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선은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을 보고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로부터 후계 지명을 내정받은 17세 소년은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그를 위해 후지모토 씨는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를 들려줬다.


l ‘오랜 친구’ 취급, 정밀 신체검사 면제해줘
개미는 겨울에 먹을 것을 비축하기 위해 여름 내내 열심히 일했지만 베짱이는 노래만 부르고 게으름을 피웠다. 겨울이 되자 개미는 무사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베짱이는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후지모토 씨가 “그러니까 조선도 열심히 일하면 굶주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질 거다”라고 하자 김정은은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약 13년에 걸쳐 김정일 패밀리와 아주 가깝게 지내오고 있었던 후지모토 씨가 2001년 4월 일본으로 돌연 귀국한 배경에 대해 그는 “무서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대로 김 패밀리와 친밀하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자신도 숙청되지 않을까 두려웠다는 것이다.

결국 후지모토 씨는 “일본에서 초밥재료를 사오겠다”는 구실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북한을 떠나기 전날 김정은에게 호출돼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다짐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귀국 후 ‘평양의 은밀한 그곳’에 대한 최고 기밀을 폭로해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북한 방문은커녕 북한이 보낸 암살자를 두려워하는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럼에도 인연의 끈은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2012년 7월 북한을 재방문했다. 같은 해 4월 조선노동당중앙제1서기에 취임한 김정은이 약 11년 만에 후지모토 씨를 초대한 것이다. 이날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과 약 4시간에 걸쳐 재회의 시간을 가졌다.

북한에 남겨두고 왔던 아내와도 만났지만 그의 아들은 방북 직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최고지도자의 사생활을 폭로해온 후지모토 씨의 방북에 반대하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손에 의해 희생양이 됐다는데 진상은 불분명하다.

2012년 재회 후에도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에게 편지를 꾸준히 보냈다. 이런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건지 올해 5월 조선노동당대회를 앞두고 김정은은 약 4년 만에 그를 다시 초대했다. 4월 25일 방북을 마치고 돌아온 후지모토 씨를 마중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을 찾았다. 이미 공항에는 일본 언론이 쇄도해 있었다. 뜨거운 취재 열기를 뚫고 간신히 후지모토 씨를 차에 태우고 가까운 대형 호텔로 향했다. 다음은 후지모토 씨가 그 호텔 방에서 약 5시간에 걸쳐 밝힌 ‘김정은과의 재회의 이야기’다.

“제7회 조선 노동당대회를 앞두고 김정은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번에 나를 평양에 초대한 것도 그 일환이다. 지난 4월 1일 밤 10시를 조금 넘은 시각 김정은 측으로부터 ‘태양절(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평양에 초대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받았다”는 그는 곧바로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을 찾았다. 평양공항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차 한대가 그를 태우고 평양에 위치한 고려호텔로 향했다. 고려호텔은 80년대 재일 조선인이 세운 평양의 최고급 호텔이다. 후지모토 씨는 1984년부터 약 5년간 이 호텔 지하의 초밥집에서 초밥장인으로 일했다.

그가 이 호텔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자 어느덧 대형 벤츠가 한 대가 10m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그리로 다가가 보니 조수석에는 후지모토 씨가 북한에 머물던 시절 그의 비서로 일했던 김창선 당중앙비서실 부부장이 앉아 있었다. 후지모토 씨는 “운전석을 보고 몹시 놀랐다. 김정은이 직접 운전해 나를 보러 와줬던 거다”라고 말했다. 당시 김창선 부부장은 그에게 “호텔 방에 올라가 몸을 깨끗이 한 다음 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말고 내려와라”고 말했다.

김정은과 면회하기 전에는 누구나 간부전용의 봉화진료소에 가서 혈액검사를 비롯한 정밀한 신체검사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후지모토 씨의 경우 김정은의 ‘오랜 친구’로 인정받으며 신체검사 절차가 면제됐다.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 관저’ 72번 연회장에서 약 3시간에 걸쳐 김정은과 식사했다. 김정은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를 힘껏 포옹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은 갑작스러운 방문인 탓에 미처 선물도 준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해하네. 수고했어. 잘 돌아왔다.”

 
l 김여정은 ‘독신녀’, 여전히 건재한 최룡해
기사 이미지

북한이 자랑하는 쌍둥이 건물인 고려호텔. 후지모토 씨는 1984년부터 약 5년간 이 호텔 지하의 초밥집에서 초밥장인으로 일했다. [중앙포토]

후지모토 씨는 그만 감회가 복받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그는 “김정은이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130㎏의 뚱보’라는 야유를 당하고 있지만 내가 그를 포옹했을 때에는 양손을 그의 허리 뒤에서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여동생 여정 씨도 중앙당 제복에 플레어 스커트 차림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김정은 “여정이 당선전선동부의 부부장으로 승진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에 후지모토 씨가 부부장 승진을 직접 축하하자 김여정은 수줍은 모습으로 “고맙다”고 답했다.

최근 한국와 일본에서는 김여정이 최룡해 서기의 차남과 결혼했다고 하는 설이 돌았지만 후지모토 씨는 “그녀는 아직 독신이었다. 김창선 부부장도 한때 사망설이 돌았지만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었다”라고 말했다.

2012년 방북 당시 만났던 북한의 ‘거물’급 인사 두 명은 보이지 않았다. 2013년 말 처형된 장성택 행정부장과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였다. 공개적으로 장성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었다. 김정은은 자신의 부인이 불참한 것을 두고 “딸 ‘주애(主愛)’가 감기에 걸려 아내도 딸과 함께 격리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에서 감기에 걸린 사람은 완쾌된 후 10일이 지날 때까지 김정은을 만날 수 없다.

초대된 인사 20여 명이 모두 동석하자 김정은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후지모토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후지모토 씨가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간부 여러 명과 김여정에게 댄스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초대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김정은의 오른편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최룡해 서기(고 최현 국방장관의 차남)였다. 최룡해는 지난해 실각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건재했다. 최룡해는 과거 김정은의 ‘놀이친구’였다. 후지모토 씨에게 그는 “정말 오랜만이네”라며 환대했다.

이날 모임에서 등장한 술은 고급 보르도 와인이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글라스를 다 비우려 하지 않았다. 후지모토 씨가 김정은 앞에 가서 건배를 청하자 그는 “며칠 전에 보르도 와인 10병을 마셨더니 위 상태가 조금 나빠진 듯하다. 한 잔 정도라면 괜찮겠지. 후지모토도 오늘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라고 말했다.

그 말에 후지모토 씨는 순간 부끄러워졌다. 지난 방북 당시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1년 만에 김정은과의 재회였던 터라 긴장한 나머지 상어 지느러미만 몇 숟가락 겨우 입에 대고 술만 연거푸 마셨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안색이 안 좋아진 후지모토 씨를 보고 김정은은 “지난 일은 이제 상관없다. 과거일 뿐이야”라며 위로를 건넸다. 보르도 와인에 이어 등장한 술은 바로 평양소주였다. 이전보다 맛이 월등히 좋아진 평양 소주 한 잔을 건네며 김정은은 후지모토 씨의 신상을 걱정했다.

“후지모토가 보내주는 편지는 전부 읽고 있다. 하코네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지?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고생 따위 하지 말고 다시 평양에 와서 일하면 좋지 않은가?”

“저는 장래에 그곳에서 라면집을 경영하고 싶습니다.”

이에 김정은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평양에 만든 미래과학자대로를 한번 보고 와라. 올해 여명대로도 정비한다. 평양에 여러 가지를 건설했으니 전부 봐둬라. 내일 김창선이 안내할 거야. 나중에 그곳에 라면집을 내면 좋을 거야.”

후지모토 씨는 감격하는 모양새로 “알았습니다. 어디에 차리더라도 첫 손님은 (김정은) 대장과 부인, 아가씨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l 김정은은 식민지배상 문제 해결 원해
기사 이미지

북한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사출실험 현장. 북한은 지난 4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참관한 가운데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SLBM) 수중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중앙포토]

이 자리에서 김정은은 북일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계획을 밝혔다. 그는 “북한과 일본과의 국교가 맺어지면 후지모토도 바빠져. 네 딸이 조선과 일본의 가교가 되면 좋겠다”면서 “지금 네 딸을 여기로 부를까?”라고 묻기도 했다.

1989년 후지모토 씨는 김정일의 중매로 당시 국민가수였던 엄정녀와 결혼해 딸 엄정미(현재 24세)를 낳았다. 최근 정미 씨는 평양회계학교를 졸업했다.

이날 저녁 메뉴는 프랑스 요리였다. 냉야채, 콩소메 수프, 구운 대구요리에 이어 중화풍의 소스를 얻은 고기요리가 나왔다. 디저트로는 케이크와 멜론이 대접됐다. 평소 김정은이 즐겨 먹는 스테이크는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추억담이 등장했다. 김정은은 유년 시절 후지모토 씨와 테니스, 농구를 하며 놀았던 일을 떠올리며 후지모토 씨에게 친근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그를 초대한 목적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일본은 요즘 우리나라(북한)를 어떻게 보고 있지?”

후지모토 씨는 망설였지만 과감하게 답했다. “최악입니다. 올해에 들어 핵 실험이나 미사일 실험이….”

그러자 김정은은 “로켓이나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것은 미국 탓이다. 미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험악하지만 사실 나는 전쟁할 마음은 없다. 그래서 어디에도 피해 주지 않도록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있지 않은가? 내 발언은 공개해도 상관없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데 후지모토, 이제 정치가가 다 된 것 같구나?”라며 웃어 보였다. 후지모토 씨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농담은 이어졌다. 그러나 그 농담에서 김정은의 어떤 진심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후지모토와는 정치를 하지 않을 거다.”

그 말에 후지모토 씨는 단박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김정은은 조선 노동당대회를 마치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결심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양국간의 현안이 되어 있는 일본인 납치 문제와 식민지배상을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김정은이 믿을만한 일본인은 후지모토 씨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김정은은 후지모토 씨를 다시 초대했고 그에게 “북일간 가교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후지모토 씨는 김정은에게 구체적인 제안을 건넸다. “5월 하순 아베 신조 총리와 방북하겠습니다. 일본은 수장의 의향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입니다. 그때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전부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길 청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후지모토 씨의 존재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몰아치고 있다. 후지모토 씨에 긍정적인 입장인 한 국회의원은 “미국을 보라. 트럼프가 보란 듯이 공화당 후보가 되지 않았는가? 지금은 개인이 조직을 이기는 시대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일본 외무성이 35년간 추진해왔지만 달성하지 못한 북일 수교를 ‘위대한 독재자의 일본인 친구(후지모토)’가 완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당연히 아베 정권은 후지모토 씨를 후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역사는 1991년 1월에 시작됐다. 1990년 9월 ‘자민당 최종보스’ 가네마루 신 부총재와 다나베 마코토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에서 ‘북일 3당 공동선언’이 발표됐고 북일 국교정상화 추진을 위한 결의를 확고히 했다.

당시 한국과 북한 모두 유엔에 가입했으며 한국의 노태우 정권 역시 소련이나 중국과의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던 차였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나 북일 양국의 외무성이 주도한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1992년 11월로 갑자기 미뤄졌다. 당시 한국 정부가 발표한 ‘김현희 증언’ 때문이었다.

북일 관계가 친밀해지는 것을 경계했던 한국은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의 주범으로 수감 중이던 김현희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견에서 김현희는 “자신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교사는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성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일본의 조사에 따르면 김현희의 일본어 교수로 지목된 이은혜는 일본 사이타마현 출신으로 현지에서 갑자기 실종된 여성 ‘다구치 야에코’였다. 이에 일본 측이 북한에 다구치 야에코의 행방에 대해 묻자 북한은 크게 불쾌해 했다고 한다. 결국 북일 교섭은 무기한 연기돼버렸다. 일본에서 일본인 북한 납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부터다.

북일 교섭이 재개된 것은 그로부터 8년 후인 2000년 4월. 당시 미국 클린턴 정권의 임기 마지막 해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한 것을 시작으로 김정일도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착수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총서기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된 것도 2000년이었다. 이 회담에 이어 북한과 일본도 4차례에 걸쳐 교섭이 이뤄졌지만 2002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다시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l 일본 외무성 ‘초밥장인’의 조언에 귀 기울일까
기사 이미지

과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 씨가 지난달 김정은의 초청으로 다시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중앙포토]

  당시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방북으로 김정일과 ‘북일평양선언’을 이뤄냈지만 여전히 일본에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고 있었다. 또한 미국 부시 정권의 반대로 ‘북일평양선언’은 장기간 유보되고 말았다.

그 후 2005년 11월과 12월에 걸쳐 북일 교섭의 재개와 중단이 반복되었다.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2012년 11월 교섭이 재개되었지만 곧바로 중단됐고 최근 아베 정권에 들어서는 2014년 3월, 5월, 7월에 교섭이 열렸다. 당시 북한은 ‘일본인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는 물론, 일본인 처, 일본인 유골 등 전반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만 2년이 지난 현재까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올해 2월 일본인 특별 조사위원회의 해체를 발표했다. 북한의 새로운 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일본 독자제재에 대항하는 조치였다.

결국 과거 35년간에 걸쳐 양국 외무성이 추진해온 북일 교섭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듯 ‘공식 교섭’의 한계는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외무성은 여전히 후지모토 씨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일본의 한 외무성 간부는 후지모토 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우리는 외교의 프로다. 초밥장인에게 외교가 가당키나 할 것 같은가? 거기에다 무슨 일이든지 언론에 떠들어대는 후지모토 씨는 애당초 외교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자꾸 제멋대로 굴면 일본과 북한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후지모토 씨는 “5월 초 아베신조 총리와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의 측근과 만남의 가능성이 열렸다”고 말했다. 현재 아베 총리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최근 제7회 조선노동당대회를 마친 후 김정은의 속내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조만간 이뤄질 후지모토 씨의 다음 방북이 현재 불투명한 북일 관계의 승부처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 일본은 김정일·김정은의 공식직함을 각각 총서기·제1서기라고 한다. 후지모토 씨의 발언 중 두 인물에 대한 직함은 일본식으로 표기했다.
 
기사 이미지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