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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정부 갑질’ 조장하는 공공SW 일괄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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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민
경제부문 기자

“전 잘 모르니까 대충 알아서 해주세요”. 집주인이 도배공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치자. 그런데 이틀 후 도배가 끝난 집을 보고는 집주인이 인상을 찌푸린다. “조금 더 밝은 색이 들어간 걸로 바꿔주세요”. 할 수 없이 벽지를 싹 뜯어 다시 도배를 했다.

일괄발주, 행정 절차 편하지만
요구사항 수시로 바꿔 업체 부담
한국도 일본처럼 분할발주 논의
활성화 되려면 공무원 의지 중요


그랬더니 이번엔 질감이 마음에 안 들어 바꿔달란다. 이런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 하는 김에 장판까지 깔아달라는 억지 요구에 작업은 예정보다 보름 이상 지연됐다. 그만큼 인건비와 재료비가 더 들었다. 당연히 도배공은 추가비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배째라’다. 작업의 추가·변경과는 상관 없이 처음에 정한 돈만 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정부가 발주하는 공공 소프트웨어(SW) 사업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여기서는 정부가 집주인, SW업체가 도배공이다.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에 지난해 접수된 공공소프트웨어 사업 분쟁 사례에는 불공정 과업변경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발주 부처의 일방적 요구로 설계가 변경됐는데도 사업 금액은 조정하지 않거나 처음엔 투입 인력을 상주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합의해놓고 계약 후엔 상주 직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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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이 SW업체와 정부부처·공공기관 간 소송까지 가는 사례도 있다. 일례로 SW업체 N사은 2011년 L공공기관을 상대로 작업 변경으로 인한 추가 용역대금 4억원을 청구했다. 이에 L기관은 작업이 늦어진 건 업체의 책임이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지체로 인한 보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긴 공방 끝에 법원은 최근 N사의 손을 들어줬다. 작업 변경과 기간 연장이 발주 기관의 책임이므로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게 판결 내용이다. 유호석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불이익을 우려한 업체들이 쉬쉬해서 그렇지 비슷한 소송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불공정 관행의 원인을 발주 방식에서 찾는다. 현재 공공SW 용역은 한 업체를 선정해 설계와 구축을 한꺼번에 맡기는 ‘일괄발주’다. 공무원 입장에선 행정절차나 작업지시가 간편하다. 그러나 발주자의 전문성이 떨어져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아 작업 변경과 이로 인한 추가 작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가 공공SW사업을 수행한 111개사를 조사한 결과 절반 가량이 과업 요구사항이 불명확해 작업이 추가·변경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과도한 업무량과 추가비용은 업체가 떠안는다. 업계에서 “애초에 지침을 정확히 주지 않아 시간과 비용을 낭비시켜놓고 일한 만큼의 대가는 지불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과로와 저임금에 지친 인력이 업계를 떠나면서 이런 관행이 국내 SW산업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과 일본은 같은 문제를 각각 전문성과 제도로 해결했다. 미국은 공무원이 일정 수준 이상의 IT 역량과 담당 업무 전문성을 갖추도록 해 용역 사업에 대한 지시사항이 뚜렷할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은 분할발주를 도입했다. 설계와 구축 작업을 별도로 계약하는 방식이다. 설계 단계에서 발주자의 애매한 요구를 명확하게 반영하고 구축 업체는 설계를 토대로만 작업을 진행해 분쟁 소지를 줄이는 것이다. 일본발주자협의회에 따르면 분할발주 의무화 후 재작업 비율은 40.3%에서 2.2%로 감소하고 품질만족도는 44%에서 70%로 증가했다.

국내에서도 분할발주 도입이 논의 중이다. 조달청도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4월 공공소프트웨어 분할발주를 시범 도입했다. 그러나 일선 공무원 조직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지시할 전문성은 부족한데, 강제성이 없다 보니 굳이 번거로운 방식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무능’과 ‘무관심’의 문제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정부가 이 중 하나만 해소해도 SW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데, 한국은 둘 다 가진 듯해 안타깝다.

함승민 경제부문 기자 s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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