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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계파·지역 등 현실 뛰어넘는 게 하벨의 정치”


경희대 ‘미원렉처’ 박영신 교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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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수십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민주투사인 바츨라프 하벨(1936~2011)이 연단에 섰다. “우리의 혁명은 평화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벨벳 혁명입니다.” 하벨은 반체제 연합인 ‘시민포럼’을 조직해 프라하 시민들의 평화적 행진을 주도하며 ‘부드러운(velvet)’ 혁명을 완수했다. 40여 년간 지속된 독재정권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하벨은 체코 초대 대통령이 됐고 미국과 소련은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16일 오후 경희대 네오르네상스관 대강당. 한국 사회학계의 거장인 박영신(78·사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경희대가 매년 국내외 석학을 초청해 여는 ‘미원렉처’에서다.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70대 노교수는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벨의 이야기를 실감 나게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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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벨

하벨은 1936년 프라하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48년 집권한 공산당 정부로부터 재산을 몰수당했다. 하층민으로 전락한 하벨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택시기사 등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프라하의 한 극장에 무대 기술자로 취직한 그는 연극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틈틈이 작품을 써 온 그는 63년 첫 연극 ‘가든파티’를 무대에 올렸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큰 명성을 얻게 됐다.

그러나 하벨은 공산주의 독재를 비판하는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혔다. 68년 ‘프라하의 봄’을 맞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그는 75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정부에 보내고 77년 시민 인권을 강조하는 ‘77헌장’을 지식인들과 함께 발표하며 체코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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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하벨의 일대기를 풀어놓던 박 교수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 하벨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잠시 객석을 응시하던 박 교수는 “하벨은 훌륭한 정치가 이전에 19편의 희곡을 포함해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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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시절에도 하벨은 본인이 직접 연설문을 쓰곤 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하벨은 늘 책을 가까이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시절 부인에게 쓴 편지는 책으로도 출간돼 체코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박 교수는 “지식인으로서 현실정치에 투신했던 하벨은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설명했다.

하벨 정치철학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정치를 ‘실천도덕’으로 봤다는 점이다. “그에게 도덕은 정형화된 윤리적 틀이나 규범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모습은 무엇인지, 인간적이기 위해 무엇을 갖출 것인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도덕의 본모습이죠.” 그러면서 ‘초월’이란 개념을 통해 하벨의 정치를 설명했다. “정치는 현실적 계산만 따르는 게 아니라 그 한계를 뛰어넘는 ‘불가능의 예술’입니다. ‘초월’적인 게 정치의 본질이란 뜻이죠.”

박 교수는 “정치인들은 권력자와 유권자의 표 앞에서 계파와 지역의 볼모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얘기하지만 이런 불가능한 구조를 뛰어넘어야 진짜 정치”라고 역설했다. ‘현실’이란 이름 뒤에 숨어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 잘못된 구조를 깨뜨리려 하지 않는 것 또한 정치인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란 지적도 곁들였다.

실제로 하벨은 대통령 재임 기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정치력을 보여줬다. 벨벳 혁명이 끝나자 체코는 분열과 갈등의 시간을 맞이했다. 공산독재에 앞장섰던 이들에 대한 처벌이 뇌관이었다. 하벨은 그러나 “역사의 상처를 위로하고 감싸는 게 지혜로운 태도”라며 공존과 화합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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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벨이 강조했던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는 비단 정치인에 대한 주문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평범한 시민들에게도 성숙하고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요구했다.

박 교수는 “시민은 소비자보다 더욱 고결하며 먹고사는 것 이상의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며 “정치권은 ‘문제는 경제’라고 외치지만 진짜 문제는 도덕”이라고 강조했다.
 
◆미원렉처=경희대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의 호 ‘미원(美源)’을 딴 특별강연. 2010년부터 폴 케네디, 피터 카젠스타인 등 세계적 석학을 초빙해 특강을 열고 있다. 지난해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이 ‘매력 국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벨벳 혁명=벨벳(velvet)처럼 부드럽고 평화적으로 혁명을 이뤄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1989년 체코의 공산정권이 무너지면서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가 정점에 달했다. 혁명 직후 미국과 소련은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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