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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나누는 정치 실험 순항, ‘남·원·안’ 조기 등판론 꿈틀

‘잠룡물용(潛龍勿用)’. 『주역』의 한 구절이다. ‘물에 잠겨 있는 용은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치인들에겐 ‘나설 때가 아니면 능력을 기르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라’는 교훈이다. 얼마 전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방송에서 “등 떠밀려 나온 잠룡들이 성공한 경우가 없었다”며 이 구절을 인용했다. 사석에서 만난 ‘잠룡’ 남경필 경기지사에게 이 전 수석의 말을 전했더니 “백번 옳은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는 지난 11일 경기도의회 도정 질문에서 야당 의원이 ‘대권 조기 등판 가능성’을 묻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내년 대선을 앞두고 판짜기에 돌입한 정치권에서 ‘남·원·안’의 조기 등판론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꿈틀대기 시작했다. ‘남·원·안’은 남경필 경기지사와 원희룡 제주지사, 안희정 충남지사를 말한다. 86 세대(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년대생)의 대표주자 격인 세 사람이 주목을 끄는 건 단지 참신한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연정’(남경필)·‘협치’(원희룡)·‘협력’(안희정)의 이름으로 진행중인 그들의 정치실험이 여소야대의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특히 여당의 대선주자 공백상태는 새누리당 소속 남·원 두 사람의 발걸음을 주목케 한다.



“의원내각제 도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소야대 시대, 주목받는 86세대 도지사들

지난 11일 경기도의회 본회의장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남경필 지사를 상대로 한 도정 질문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양근서 의원이 이렇게 물었다. 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선 지방의원이 주 정부의 장관을 맡고 있다”며 경기도에서도 도의원에게 도 장관직을 맡겨보자고 했다. 야당 인사를 부지사에 등용하는 현재의 연정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는 제안에 남 지사는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남 지사 측 관계자는 “경기도의 부통령 격인 부지사 밑에 도 장관급을 신설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



양 의원도 처음엔 연정 반대론자였다. 그는 중앙SUNDAY와의 통화에서 “제도적 장치가 뒷받침 안 되는 연정은 정치쇼가 되고, 도의회의 도 정부 견제도 힘들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이젠 남 지사의 진정성을 인정하게 됐다”고 했다.



남경필의 대표상품인 연정은 2014년 지방선거 당시 공약으로 등장했다. 그는 지사직 출마 선언 때 “부지사와 특보단에 야당 인사를 등용하고 야당 도의원과의 정책협의체를 정례화하겠다”고 말했다. 선거에서 그는 더민주(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김진표 후보에게 0.87%포인트 차이로 신승했지만 도의회는 여소야대(더민주 75석, 새누리당 53석)였다. 연정 제안도 ‘수세적 상황 극복을 위한 술수’로 평가절하됐고 야당은 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남 지사는 때론 술자리에서, 때론 토론으로 반대파를 움직였다.



도의회가 요구해 온 ‘생활임금제’를 남 지사가 받아들이자 연정 반대론이 잦아들기 시작했고, 그해 12월 더민주가 추천한 이기우 전 국회의원을 사회통합부지사(정무부지사)에 임명할 수 있었다.



연정의 길이 꼭 순탄하진 않았다. 지난해 연말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예산 편성을 둘러싼 논란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



더민주는 “누리과정 예산은 중앙정부가 지원해야 한다”며 관련 도 예산을 0원으로 정했다. 새누리당 도의원들이 예산안 처리를 막겠다며 단상을 점거했고 몸싸움도 벌어졌다. 예산안이 처리 안 돼 준예산(불성립 예산) 사태도 일어났다. 결국 누리과정 예산의 일부를 도가 지원하는 내용의 예산안이 통과됐다. 이기우 부지사는 “위기 속에서도 연정이 깨지지 않은 건 누리과정 예산 논란은 중앙정치에서 비롯된 것이고 연정과는 관련이 없다는 공감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득구(더민주) 전 경기도의회 의장은 “지난해 연말 누리과정 예산안을 논의하자고 밤 10시에 남 지사에게 만나자고 했더니 남 지사가 대뜸 ‘수원 영통의 호프집에서 보자’고 하더라. 이런 소통력 때문에 연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밤 늦게까지, 또 휴일까지 결제에 매달렸던 전임자들과 달리 남 지사는 오후 6시 이후엔 결제를 하지 않고 대신 사람들을 만난다. “지사가 모든 걸 다 챙길 순 없다. 권한을 나눠 시스템이 처리하게 하면 된다”는 지론 때문이다.



남 지사의 스마트폰엔 과거 서독의 제2대 총리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걸어 ‘라인 강의 기적’을 일군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진이 저장돼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를 남 지사는 ‘정부가 플랫폼을 깔아주면 민간이 자율적으로 쓰는’ 공유적 시장경제로 발전시키려 한다.



정치적으로는 ‘연정’, 경제적으론 ‘공유적 시장경제론’이 잠룡 남경필의 무기인 셈이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원희룡 제주지사의 공약은 민간과의 협치였다. 2014년 지사 출마선언문에서 그는 “도민의 참여와 협치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12일 제주특별자치도 서울본부에서 만난 그는 “‘제왕적 도지사’란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권한이 도지사에게 집중돼 있었다. 도민들의 다양한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구조가 협치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협치를 ‘민간이 참여하고 협력해 합리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봤다. 야당 또는 정치적 반대 세력과의 협치보다 범위가 더 넓다.



하지만 넘어야 할 벽이 많았다. 취임 첫해부터 ‘예산 전쟁’이 벌어졌다. 2014년 말 제주도의회는 도가 제출한 2015년 예산에서 408억원을 깎은 뒤 다른 항목으로 408억원을 늘린 수정 예산안을 냈다. 제주 정가의 관계자는 “제주에선 도의원들이 자신들의 공약사업을 위해 쓰는 ‘재량예산’이란 관행이 있었다”며 “2014년 말에도 재량예산을 받아내기 위해 도의회가 예산안을 부결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의회 내 다수당은 새누리당이었지만 여당 의원들도 꼭 원 지사 편은 아니었다. 일부는 야당과 함께 원 지사를 압박했다. 하지만 원 지사는 ‘예산 개혁’을 내걸며 제동을 걸었고, 도의회는 “협치를 한다더니 왜 예산 문제는 협치를 안 하느냐”며 예산안 1636억원 삭감이라는 초강수로 맞서면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았다. 이때 원 지사의 편에 선 건 시민사회단체였다. 과거 제주도와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환경단체들까지 “명분은 원 지사 쪽에 있다”고 힘을 보탰다. 원 지사는 의원들도 개별적으로 만나 끈질기게 설득했다. 의원들과 약속을 잡기 위해 30분 간격으로 점심을 세 번 먹은 적도 있었다. 결국 도의회가 삭감 예산의 80%가량을 되살리는 추경안을 통과시키면서 예산 전쟁은 막을 내렸다.



우여곡절 속에서도 협치 실험은 이어진다.



김양훈 제주도청 도시재생담당은 “민간부문과의 협의 때마다 원 지사는 ‘예산은 우리가 댈 테니 그림을 그려 달라’고 강조한다”고 소개했다. 낡은 도심을 되살리는 도심재생 사업은 원 지사가 특히 공을 들이는 민-관 협치의 테마다. 제주도는 당초 도로나 주거를 개선하는 사업으로 생각했지만 지역주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협의 과정에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았고, 그 결과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관덕정 앞 광장을 되살리는 사업이 추진됐다.



‘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시험 전체 수석’의 경력은 그에겐 자랑거리이자 짐이다. 제주도청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고희경(44)씨는 “머리가 너무 좋아 원 지사 앞에선 모두 주눅든다고 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원 지사가 자주 찾는 전복요리집 주인 손명자(61)씨는 “늘 겸손하고 예의 바르다. 종업원에게 ‘고생하십니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는다”고 전했다. 원 지사의 고등학교 동창생은 “공부만 잘하는 샌님은 아니었다. 주말이면 ‘짱축(중국음식 내기 축구)’을 하며 같이 뒹굴었다”고 말했다.



원 지사도 모범생 이미지를 깨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지방선거 유세 때는 시장에서 감귤을 담는 플라스틱 박스를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올라가 연설을 했다. 발을 구르는 격정적 연설로 박스에 구멍이 난 적이 많았다. 그는 역대 제주지사 선거 최고 득표율(60%)로 압승을 거뒀다. 원 지사는 “3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를 제주도민이 인정하는 데 2~3년은 걸릴 것이다”며 “협치는 조금씩 전진하는 ‘과정’인 만큼 당장 가시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조기등판론’에 대해선 “국민들이 제주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볼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답했다.



충남은 전통적으로 여당 정서가 강하다.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도입된 뒤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 소속 후보들이 지사가 됐다. 현재 충남도의회도 29(새누리당) 대 11(더민주)로 새누리당이 압도적이다. 그래서 2010년과 2014년 안희정 지사의 연승은 이변이다. 그가 ‘협력의 리더십’을 내걸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협력정치는 말처럼 쉽지 않다.



지난 3월 해결한 도교육청과의 학교용지부담금(신도시에 학교 건립시 시·도가 교육청에 지급하는 비용) 갈등이 대표적이다. 충남도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 도교육청에 보내야 할 1024억원의 학교용지부담금 가운데 596억원만 보냈다. 지방재정 악화로 재원 마련이 어렵다는 이유로 나머지 428억원은 미지급 상태로 남았다. 충남도는 미지급금의 단계적 지급을, 도교육청은 일괄 지급을 요구했다.



물꼬를 튼 건 중재를 맡은 도의회였다. 도의회가 나서면서 충남도와 도교육청은 도교육청의 요구대로 부담금의 일괄 지급에 합의했다. 수입을 확보한 도교육청은 누리과정 예산 편성 때문에 악화된 재정난까지 덜어냈다. 모든 공은 중재에 나선 도의회에 돌아갔지만 사실 자신은 뒤로 빠지고 도의회가 앞에 나서도록 밑그림을 그린 안 지사의 보이지 않는 공이 컸다.



안 지사는 중앙SUNDAY 기자에게 “도지사의 성과로만 여겨지면 도의회가 소외될 수도 있어 주요 이슈는 가급적 도의회가 주도적으로 나서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여소야대의 환경에서 안 지사가 묵은 숙제들을 해결해 온 비법이기도 하다. 그는 2006년 12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쌓인 소방공무원 1862명의 미지급 초과근무수당 419억원을 2012년 일괄 지급했다. 99년 개소 이후 과도한 시설투자와 적자누적으로 운영이 중단됐던 중부농축산물류센터의 국고보조금 228억원도 2013년부터 3년간 분할상환했다.



안 지사는 “민주주의 핵심은 절대주의가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는 상대주의”라며 “그래서 협력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조는 “남의 얘기를 잘 듣자”다. 2014년 3월 관용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서산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설치 반대’ 집회에 참가한 서산·태안 주민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서산에서 정부세종청사까지 ‘300리 도보행진’ 중이었다. 안 지사는 일부러 차에서 내려 주민들의 얘기를 직접 들었고 이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됐다. 이후 찬성 주민, 반대 주민, 전문가가 함께 대안을 마련하는 기구가 만들어졌다. 박병남 충남도청 거버넌스정책팀장은 “안 지사는 당시 발에 물집이 잡힌 주민 걱정까지 하더라”고 말했다.



안 지사에 대한 도청 주변의 평가는 후한 편이었다. 도청 주변 ‘삼거리갈비’에서 만난 이충남(75)씨는 “2010년엔 새누리당 후보를 찍었지만 2014년엔 ‘안희정’이란 이름을 보고 찍었다. 일을 잘한다”고 했다.



안 지사는 ‘조기등판론’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는 “모든 일엔 때가 있다. ‘때’는 인간이 도전하는 영역일 수도 있지만, 시대가 만들어내는 결정일 수도 있어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시대의 요구가 있는 것 같나’는 질문엔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지, 준비가 충분히 돼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 중”이라고만 말했다.



당초엔 차차기 주자로 분류됐던 ‘남·원·안’의 조기 등판을 위해선 넘어야 할 과제도 있다. 정치감각이 탁월한 남 지사는 더 중량감을 키워야 하고, 신념이 강한 원 지사에겐 유연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도지사 연임으로 안정감을 보여온 안 지사는 ‘노무현 키즈’라는 출신성분이 브랜드인 동시에 넘어야 할 벽이다.



 



 



이철재·이충형·추인영 기자?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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