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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라는, ‘내 인생의 한 페이지’

일본의 대표적인 소녀만화 월간지 ‘별책 하나또유메(別冊花と夢)’는 올들어 매달 ‘유리가면 40주년’ 엠블럼을 찍어 발매하고 있다. 특집으로 작가 미우치 스즈에(美?すずえ)의 메시지와 명대사 시리즈를 매달 게재하는 등 축제 분위기다. 1976년 첫선을 보인 ‘유리가면’은 비정기적으로 연재되며 2012년 단행본 49권이 나온 이후 “대체 언제 50권이 나오고 언제 완결될 것인가”가 팬들 사이에 초미의 관심사다. 40주년을 맞아 조만간 50권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40년이란 연재초기 10대였던 독자가 손주를 보았을 세월. 작가도 어언 60대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동시에 40주년을 맞은 소녀만화 ‘왕가의 문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매회 작가가 근황을 전하는 코너에 늘 채소를 보내준다던 특정 팬에 관한 일화가 갑자기 없어지면서 “과연 죽기 전에 결말을 볼 수 있나” “살아 있는 동안 끝내 달라”는 원성이 자자하다. 실제로 국민만화 ‘도라에몽’의 경우, 69년부터 96년까지 연재되다 작가의 급서로 단행본 45권에 ‘46권에 계속’이라는 문구를 남긴 채 ‘영원히 끝나지 않는 만화’로 남았다. 팬들이 감동적인 마지막회를 그리기도 했다.



48년째 연재중…'끝나지 않는 만화'의 세계

그런데 과연 ‘마지막회’를 보는 게 모두의 바램일까. 일본에는 20~30년 이상 사랑받으며 세대를 아우르는 작품이 수십편이다.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행’으로 여길 법도 하다. 빠짐없이 챙겨보지 않더라도, 우연히 발견하곤 ‘아직도 나오는구나’ 안심하며 내심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란다는 게 일본인들 얘기다. 독자를 평생 붙들어두는, 끝나지 않는 만화들 속엔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까



 

‘고르고13’ 180권 중에서. 총 2억부 판매, 역대 2위

‘여기는 잘 나가는 파출소’ 198권 중에서. 총 1억5650만부 판매, 역대 4위



‘원조’에 대한 존중+현대감각 업데이트 일본에서 현존 최고의 장수만화는 격주간지 ‘빅코믹’에 1968년부터 아직까지 연재중인 사이토 다카오(?藤隆夫·80)의 ‘고르고13’이다. 단행본 180권을 찍고 총 2억부를 팔아 역대 판매량 2위다. 전형적인 007스타일의 스파이 탐정물로, ‘듀크 토고’라는 전설의 저격수가 세계를 무대로 어둠의 조직에 맞서는 내용이다. 케네디 암살부터 천안문 사건, 루마니아 혁명, 걸프전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뒤에 주인공이 관여했다는 설정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2년 전인 84년 발표한 ‘2만5천년의 황야’편의 경우 원자력발전소 방사능유출 문제를 다뤄 남다른 예지능력을 평가받기도 했다.



오락성이 뛰어난 것도 아닌 이 만화의 장수 비결에는 일본 특유의 전통과 원조에 대한 존중이 있다. 한국영상대 박석환 교수는 “일본인들은 만화를 문화재급으로 인식한다”고 진단한다. 과거 고이즈미 총리가 ‘망가외교’를 펼쳤을 정도로 자국 만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는 얘기다. ‘고르고13’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사회 현실을 적극 다룬 60년대 극화운동의 원조이자 시대의 아이콘인 만큼, 정통성을 가진 포맷을 존중하는 독자들이 있기에 작가도 자기 스타일을 부담없이 고수해 간다는 것이다.



스타일은 고수하되 브랜드 가치를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는 것도 특징. ‘고르고13’은 프로덕션 시스템의 원조다. 공동창작 프로덕션에서 ‘고르고13’이라는 브랜드를 위해 꾸준히 소비자 감각에 맞추는 노력이 뒷받침된다. 최신 세계정세를 반영하는 품질 관리는 기본이고 작품 외적인 마케팅도 활발하다. 월드컵 등 주요 스포츠 행사 때마다 유명 메이커에서 캐릭터 맥주를 출시하고, 담배·술 등 성인용 광고를 통해 캐릭터를 어필한다. 박 교수는 “소년만화 독자가 성장해 ‘나도 고르고 세대가 됐다’고 느낄 만한 징검다리 상품을 내놓는 것”이라며 “20~40대가 주타깃인 만큼 젊은 세대를 영입하고 기성세대의 이탈도 늦추는 정교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맛의 달인’ 111권 중에서. 총 1억3000만부 판매, 역대 7위

‘시마 회장’ 5권 중에서. 시마 시리즈는 최근 세월을 거슬러 ‘시마 계장’‘대학생 시마’까지 나오고 있다.

‘못 말리는 낚시광’ 94권 중에서. 총 2600만부 판매, 역대 75위



부동의 캐릭터 + 참신한 에피소드 잡지연재 시스템 자체도 일본 만화의 장수요인이다. 대표적인 만화잡지 ‘소년점프’ 등은 매주 독자 선호도를 조사해 일정기간 관심을 얻지 못한 작품은 곧장 퇴출시키는 반면, 인기를 유지하면 얼마든지 연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확실한 장르에 대활약 캐릭터를 띄워놓고 에피소드를 계속 발견해가는 구조가 밑바탕인데, 연재물인 만큼 시의성있는 사회 현안을 끼워 넣으며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특징이다. 요리만화의 원조 ‘맛의 달인’(카리야 테츠·하나사키 아키라/빅코믹스피리츠/1983~)이 대표적이다. 일본과 한국 미식열풍의 모태가 된 작품으로, 양대 신문사가 최고의 요리를 찾아 자존심을 건 요리대결을 펼치는 구도지만 단순한 허세조장이 아니라 먹거리에 얽힌 심오한 논의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 장수 비결이다. 2014년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비판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는 바람에 현재는휴재중이다.



남성 직장인 사이에서 특히 유명한 ‘시마 시리즈’(히로가네 켄시/모닝/1983~)도 현실밀착형이다. ‘시마 과장’에서 시작해 ‘시마 회장’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일본의 고도성장을 이끈 ‘단카이 세대’의 출세 가도를 골격으로 경제상황 변화에 따라 에피소드를 무한 확장시켜 가고 있다. ‘시마 사장’편에서는 한국·중국 등 해외 메이커와의 경쟁 양상을 다뤘고, ‘시마 회장’편에서는 고령화 등 거시적인 사회문제를 들춰내며 그에 연동된 비즈니스 해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전쟁 같은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서민들의 정서적인 면에 호소하는 담백한 코미디만화가 ‘못말리는 낚시광’(야마사키 주조/빅코믹스피리츠/1973~)과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아키모토 오사무/소년점프/1976~)다. ‘못말리는 낚시광’은 출세에 관심없는 만년 평사원이 낚시를 계기로 사장 등 온갖 중요 인물들과 엮이며 뜻밖의 활약을 펼치지만 여전히 자기 페이스를 고수하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전통적인 샐러리맨 사회의 상식을 뒤집는 쾌감을 준다.



‘여기는 잘나가는 파출소’도 인간미 넘치는 순경이 매번 소소한 사건에 휘말렸다가 공을 세우는 큰 틀 안에서, 애들 놀이부터 매니어 취미까지 최신 유행 아이템을 등장시켜가며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이야기한다. 만화의 배경이 된 서민동네 카메아리(?有)는 관광명소가 됐다. 만화의 파출소와 꼭 닮은 실제 파출소는 재건축을 추진하다 주민 반대에 부딪혀 과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거리 곳곳에는 등장인물들 동상도 서 있다.

‘유리가면’ 49권 중에서. 총 5000만부 판매, 역대 27위

‘왕가의 문장’ 60권 중에서. 총 3600만부 판매, 역대 57위



폭발적 인기 없어도 다양성으로 승부 흥미로운 건 꼭 1등이 오래 살아남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최장수 소녀만화 ‘유리가면’도 당대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나 ‘캔디캔디’처럼 단기간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연극’이라는 독특한 장르와 대결구도, 개성적인 대사와 그림 스타일이 중독성을 증폭시켜 갔다. 전설의 연극 ‘홍천녀’의 주역을 따내기 위한 대결을 축으로 끝없는 사랑의 썸타기가 엮여드는데, 연극도 사랑도 결실을 앞둔 97년 작가가 개인사정으로 10년이상 연재를 중단한 독특한 케이스다. 2008년 연재를 재개했지만 매우 비정기적인 탓에 완결을 예측할 수 없다. 2014년 작가가 연극 제작발표회에 참석해 “마지막 8부 능선까지 도착했다. 결말 구상은 20년 전에 이미 해두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별책 하나또유메’ 1월호에는 “지금 50권 그리고 있다.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왕가의 문장’(호소가와 치에코/프린세스/1976~)은 여고생 캐롤이 고대 이집트로 타임슬립해 파라오와 사랑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하이틴 로맨스물로, 모든 남자들이 캐롤을 보기만 하면 첫눈에 반해 이로 인한 납치와 탈출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35년생인 작가가 ‘라이프워크’라 공언한 만큼 완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B급 소녀만화 ‘파타리로’(마야 미네오/하나또유메/1978~)도 다양성으로 승부한 경우다. 병맛 엽기 만화 ‘이나중 탁구부’와 ‘크레용 신짱’의 숨은 모태로, 70년대 작품이라 믿기 힘든 탈근대적 개그 코드로 당시 전성기를 누리던 소녀만화의 흥행공식(미모의 주인공, 우정과 승부, 동성애 등)을 ‘셀프 디스’하며 의외의 생명력을 얻었다. 단행본 96권 발행은 소녀만화 사상 독보적인 기록으로, 올 5월부터 종이 연재를 마치고 온라인 연재를 개시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원피스’ 81권 중에서. 총 3억2086만부 판매, 역대 1위

‘명탐정 코난’ 89권 중에서. 총 1억4000만부 판매, 역대 5위



판매 1위 잡지 ‘소년점프’ 구매층은 어른들 일본의 만화시장을 견인하고 있는 것은 부동의 판매 1위 잡지 ‘소년점프’다. 하지만 ‘점프’의 구매층은 소년이 아니라 소년의 감수성을 가진 어른들이다. 단행본 3억2000만부 판매로 역대 1위를 기록하며 ‘드래곤볼’ ‘슬램덩크’의 뒤를 이어 ‘점프’의 인기를 떠받치고 있는 오다 에이치로(尾田?一?)의 ‘원피스’(1997~)도 ‘떠나지 않는’ 어른들이 주요 독자층이다.



‘원피스’는 ‘우정·노력·승리’라는 90년대 일본만화 ‘왕도물’의 공식을 이어가며 감동적인 에피소드와 액션, 개그가 어우러진 소년만화다운 스토리 전개와 함께 정치·권모술수 등 어른들의 세계까지 적나라하게 노출한다.



1억4000만부로 역대 5위에 오른 ‘명탐정코난’(아오야마 고쇼/소년선데이/1994~)도 세대를 교묘하게 걸치고 있다. 고교생 탐정이었던 주인공이 악의 조직에 의해 어린이가 돼, 사건을 해결하면서 원래 모습을 되찾으려 싸운다는 설정이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기발한 해법도 여타 추리물과의 차별점이다.

‘파타리로’ 96권 중에서. 총 2220만부 판매, 역대 84위

‘도라에몽’ 45권 중에서. 총 1억부 판매, 역대 9위



만화시장 불황이 장수 유도하기도 역설적으로 만화시장의 불황이 장수를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점프의 왕도물인 ‘드래곤볼’(84~95), ‘슬램덩크’(90~96)에 비해 ‘원피스’가 20년을 버틴 것은 ‘원피스’가 내리막길에 처한 일본 출판만화 시장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일본잡지협회 통계에 따르면 만화잡지 판매는 2000년에 비해 1/3토막이 났다. ‘빅코믹오리지널’이 156만부에서 54만부로, ‘하나또유메’가 40만부에서 13만부, ‘리본’이 135만부에서 19만5000부로 각각 추락했다. ‘소년점프’만이 363만부에서 244만부로 선방하고 있지만, 650만부를 찍던 90년대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다.



청강문화산업대 박인하 교수는 “장기불황으로 인한 시장 축소로 신작을 시작하지 못하고 기존 작품을 못 끝내다 보니 장기연재가 특징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거품경제 때 공룡처럼 몸집을 불린 일본 만화시장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소수 인기작에 기대어 버티고 있지만 결정적인 디지털 전환에 적응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박석환 교수는 “작가들도 새로운 작업을 원하지만 해당 매체의 아이콘이 되면 좀처럼 접기 어렵다”며 “양재현·전극진의 ‘열혈강호’(1994~)가 여전히 ‘챔프’를 지키고 있듯이, 웹툰을 넘어 또 다른 영역이 생기더라도 조석과 강풀은 웹툰에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디어 환경이 바뀌어가도 ‘왕좌’만큼은 유지된다는 얘기다. ‘고르고13’을 위시한 일본의 장수만화들이 세월을 견디는 이유일 것이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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