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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下心)

흔한 잡초 가운데 비단풀이란 식물이 있다. 땅바닥을 비단처럼 곱게 덮어서 그렇게 부른다. 잡초를 뜯어먹는 우리 식구들이 아끼는 풀. 치매나 감기 예방에 좋은 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비단풀은 꽃이 너무 작아 나비나 벌들이 수정을 하지 못한다. 그럼 무엇이 수정을 할까. 놀랍게도 개미가 수정을 해준다. 상생하는 것이 만물의 이치지만, 조그만한 것이 조그만한 것과 상생한다는 사실이 참 신비롭지 않은가.



어느 날 나는 이 비단풀을 찾아 마당에 쪼그리고 앉았다. 적자색의 꽃은 몸을 낮춰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일 정도로 작았다. 과연 꽃들에는 잔 개미들이 붙어 꿀을 빨고 있었다. 하여간 그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식물과 사귀기 위해 마치 절을 하듯 한껏 몸을 낮추었다.



삶과 믿음

몸을 낮추면 마음도 낮추게 된다. 나는 근년에 아내와 함께 잡초를 뜯어먹으면서 몸과 마음을 낮추는 훈련을 해왔다. 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것을 하심(下心)이라 하던가. ‘하심’이란 말은 겸손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인간이 자기의 본연을 인식하는 마음이 곧 겸손이 아닌가. 살과 뼈와 피를 가진 유한한 존재가 결국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사는 마음 말이다.



몇 년 전, 여주에서 열린 세계도예전을 본 적이 있다. 세계적인 화가인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새나 염소·부엉이 따위의 그림이 도자기에 그려져 있었다.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도자기의 원재료가 무엇인가. 흙이다. 예술가들은 흙과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한 예술을 통해서 무한을 추구한다. 즉 유한한 재료로 절대의 기쁨을 누리다가 유한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술가는 오만할 수 없다.



『성서』에서 바울은 말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럼 예수가 품은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심’을 품고 살았다는 것. 하심이란 비굴이 아니다. 예수는 당시 최고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았으나, 비뚤어진 권력자들의 오만을 깨뜨리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하심은 비굴이 아니라 평등심, 즉 차별이 없는 마음이다.



오늘날 인간의 삶이 점차 황무지처럼 변하는 것은 ‘하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심을 지니고 살면 만물을 공경하게 된다. 인류의 미래를 벼랑으로 몰아가는 생태환경 문제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심을 늘 품고 사는 사람은 너와 나 사이에 자비심의 강물이 흐른다.



방금 ‘흐른다’고 했는데, 그렇다, 너와 나 사이에 자비심의 강을 ‘흐르게’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 있겠는가. 너와 나 사이의 흐름이 단절되면 그것은 곧 죽음. 우리가 ‘하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만물과 나 사이의 단절에 다리를 놓아 자비심의 강이 흐르도록 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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