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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부패척결에 칠레 와인이 웃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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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범죄의 재구성’(2004년)에서 주인공 최창혁(박신양 분)은 진열된 와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똑똑한 금요일] 중국시장 틈새 찾은 칠레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을 못 먹는 건 아닌데, 2차 대전 때 독일 놈들이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잖아요. 포도밭이라고 남아났겠어요. 오리지널은 다 타 없어졌지. 근데 칠레엔 오리지널이 남아 있다 이거죠. 와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프랑스 와인을 찾아요.”

칠레 와인을 예찬하는 최창혁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까르메네르 같은 품종은 멸종했다. 1860년께 ‘포도나무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필록세라가 전 세계에 창궐한 탓이다. 필록세라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 있었다. 바로 칠레다.

칠레의 동쪽엔 4000m가 넘는 만년설의 안데스 산맥, 서쪽엔 광활한 태평양, 남쪽엔 혹한의 남극, 북쪽에는 아타카마 사막이 버티고 있다. 외부 병충해가 침범할 수 없는 천혜의 지형이다. 전 세계가 포도의 역질에 떨고 있을 때 유일하게 대재앙에서 벗어난 칠레의 와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게다가 칠레는 충분한 햇빛과 건조한 기후, 서늘한 야간 온도 등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환경 요인을 두루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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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는 세계 5위 와인 생산 국가다. 하지만 칠레산 와인은 고급 제품으로 꼽히지 않는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에 비해 2% 부족하다. 품질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마케팅이나 스토리가 부족하다.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이유다.

이런 칠레가 와인으로 제2 경제 도약을 꾀하고 있다. 이유는 ‘천연자원의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다. 칠레에서 생산·수출되는 최고의 상품은 구리다. 지난해에만 144억 달러의 정제 구리를 수출하는 등 구리 관련 제품 수출액이 400억 달러에 달한다. 국내총생산(GDP)의 17% 정도 되는 규모다.

칠레는 2000년대 들어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 2006년 중국과 FTA 발효 이후 칠레 경제 엔진에 시동이 걸렸다. 중국이 칠레의 구리 등 원자재를 대량 수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은 글로벌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서 독이 됐다. 중국의 성장 둔화로 원자재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칠레의 구리 수출은 최근 5년 새 30% 이상 감소했다. 2011년까지만 해도 연 5%대 이상 성장하던 경제가 지난해는 2%대 성장으로 꺾였다. 자원에 매달린 수출은 한계가 있었다.

이때 전략적으로 부각된 제품이 와인이다. 1541년 스페인이 칠레를 정복한 뒤 포도나무가 들어왔다. 1818년 스페인에서 독립하면서 프랑스의 고급 포도품종도 들어왔다. 천혜의 자연조건은 포도 농사에 최적이었다.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1930년대 들어 과잉투자가 심해지면서 칠레 정부는 새 포도밭 조성을 금지했다. 추가 투자를 금지하는 이 제도가 73년까지 지속되면서 칠레산 포도주는 프랑스산이나 이탈리아산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게 됐다.

74년부터 외국인에 다시 문을 열면서 칠레 와인산업에 대한 투자는 활발해졌지만 한번 벌어진 격차를 좁히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기회가 왔다. 이번에도 중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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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칠레뿐 아니라 전 세계 포도주 시장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국제포도주기구(OIV)는 “2015년 세계 포도주 교역액이 2014년보다 11% 증가한 283억 유로를 기록했다”며 “2년 연속 하락을 기록했던 추세를 반등시킨 요인이 중국의 와인 수요 증가”라고 밝혔다.

처음에는 프랑스산 고급 와인이 중국 시장을 장악했다. 이 흐름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바꿔 놓았다. 반부패 투쟁이다. 비싼 프랑스산 와인이 중국에서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프랑스의 보르도와인협회 회장인 베르나르 파르주는 “중국 정부의 부패척결로 비싼 와인이 내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보르도와인협회에 따르면 보르도 와인의 2014년 중국 내 판매량은 6억8500만 병으로 2013년보다 8% 하락했다.

이 틈새를 칠레 와인이 파고들었다. 최근 5년간 칠레의 와인 수출은 20%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대(對)중국 수출은 네 배 이상 늘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의 정책 변화로 칠레가 와인 수출 다각화를 꾀할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낮은 인지도다. 칠레산 포도주를 마셔본 중국인 대부분이 와인의 원산지를 모른다. 중국에 수출되는 와인 대부분은 병에 들어간 게 아니라 대형 용기에 담긴 벌크 형태다. 중국에서는 이런 칠레 와인이 현지 브랜드로 재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아르헨티나 아누바 와인 레스토랑의 소믈리에인 디에고 에스테반은 “칠레 와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병이 아니라 ㎏ 단위로 팔리는 벌크 와인(저급 포도주)”이라고 말했다.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등 전·현직 국가 수반들이 브랜드 알리기에 나섰다. 이들은 와인을 포함한 칠레 식품의 우수성 다섯 가지를 알렸다. 고품질, 안전성, 이력추적 가능, 국제 보증, 천연의 맛이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산티아고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칠레 식품, 생명의 근원’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칠레 와인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개별 브랜드 전략도 정교해지고 있다. 칠레 와인업체 에라주리즈는 2004년 1월 독일 베를린 리츠칼튼호텔에 유럽 최고의 와인 전문가 50명을 초대해 라벨을 가린 채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상표를 가리고 맛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를 했다. 그 결과 에라주리즈의 고급 와인인 비네도 채드윅 2000년산이 1등을 차지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3위, 샤토 마고와 샤토 라투르가 각각 5, 6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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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전문지는 이를 ‘파리의 심판’에 빗대 ‘베를린의 심판’이라고 불렀다. 한 병에 1000달러가 넘는 프랑스 고급 와인을 에라주리즈의 100~200달러짜리 와인이 눌렀기 때문이다. ‘파리의 심판’이란 영국의 와인 평론가 스티븐 스퍼리어가 76년 연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제친 걸 말한다.

에라주리즈는 그 뒤 런던·뉴욕·베이징·서울 등 전 세계를 돌며 블라인드 테스트를 실시해 와인을 홍보했다. 2009년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에라주리즈의 비네도 채드윅 2006년산에 97점(100점 만점)을 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같은 점수다.

산 페드로의 ‘1865’ 와인은 한국 시장에서 ‘18홀을 65타에 치라’는 골프와 관련한 스토리를 확산시켜 눈길을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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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칠레 와인은 세계 와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2011년 영국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 전야제 와인으로 ‘라포스톨 카사 소비뇽 블랑(2010)’이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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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칠레 국빈 방문 기념 만찬주로 ‘몬테스 퍼플 에인절(2007)’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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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밴드 롤링 스톤스는 올 초에 ‘그란데스 비노스 데 산 페드로 알타이르(2005)’를 세계 최고 와인이라고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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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칠레가 침체한 경제를 와인으로 되살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와인이 칠레의 대사(ambassador)가 되고 있는 건 분명하다. 중국 베이징 주재 칠레 대사인 호르헤 하이네는 “칠레 경제의 핵은 여전히 구리다. 수출의 55%를, 정부 세입의 15%를 차지한다. 하지만 와인은 앞으로 칠레의 국가 브랜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채연 기자 yamfl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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