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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라저래라’ 정부 간섭, 과학기술 발목 잡는다

지난 2월 4일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황교안 국무총리(가운데)와 이병권 KIST 원장(왼쪽에서 셋째), 홍남기 미래창조과학부 1차관(오른쪽에서 셋째) 등 내빈들이 타임캡슐을 봉인하기 위해 버튼을 누르고 있다. [뉴시스]



“기초과학을 연구하라면서 수년 내 실용화 방안까지 내놓으라고 한다.”“정권이나 원장이 바뀌면 그 전에 진행돼 온 연구들이 싹 없어진다.” “주사ㆍ사무관들이 자기가 써야 할 보고서를 연구원들에게 강제로 떠넘긴다.”“젊은 사무관이 50을 넘긴 출연연 부장급 연구원들을 부하 다루듯이 무례하게 대한다”….



과학의 날 49주년 특별기획 -2- 한국 떠나고 싶은 과학자들

한국 과학자들은 국내 과학기술 발전의 가장 큰 문제점을 정부에서 찾고 있다. 지난달 21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열린 과학의 날(4월 21일) 49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 주재 ‘과학기술전략회의’를 신설해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R&D)을 이끌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과학기술 지원에 대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그래서 현장 과학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눈에 띈다.



이 같은 여론은 중앙SUNDAY?중앙일보가 과학·산업 전문 인터넷뉴스 대덕넷(www.hellodd.com)과 공동으로 국내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국 과학계의 현실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에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나라 과학계의 문제점이 뭐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복수 응답)에 가장 많은 사람(199명)이 ‘불합리한 관료주의’라고 답했고 다음으로 ‘정부의 과학정책 부재(不在)’(159명)-‘단기 프로젝트’(104명)-‘연구시간을 빼앗는 행정업무’(100명)-‘기초보다 응용·개발 위주 연구’(100명) 등 순으로 많았다. 50년 전 과학 불모지였던 이 땅에 과학의 씨앗을 뿌리고 산업화를 이끌어 온 정부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 거꾸로 과학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달 22일부터 7일간 진행된 이번 설문에는 이공계 대학교수와 정부 출연연구소 연구원, 기업 연구소 연구원 등 총 544명의 과학기술계 인사가 참여했다.



과학자들의 여론은 국가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미래 먹거리를 책임지는 과학자들이 과학 현장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건 국가 미래가 어둡다는 얘기다. 본지 설문조사에서 과학자들은 ‘한국 과학계의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62.9%가 ‘문제가 많다’, 30.1%가 ‘문제가 조금 있다’고 답했다. ‘미래 과학기술 핵심 인력을 얼마나 잘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22.2%가 ‘아주 부족하다’, 56.8%가 ‘부족하다’고 응답했다. 선진국(OECD 국가)과 비교한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대목에서는 11.4%가 ‘아주 뒤처진다’, 51.1%가 ‘뒤처진다’고 답했다. 한국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물음에는 45.2%가 ‘아주 못하고 있다’, 43.6%가 ‘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잘하고 있다’고 답한 과학자는 1%밖에 되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에도 같은 설문을 진행했다. 당시 설문조사에서는 국내 과학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이공계 차별’을 꼽았다. 정부의 과학정책 부재와 불합리한 관료주의는 각각 셋째, 넷째를 차지했다. 최근 들어 인문계열 졸업생의 취직이 어려워지면서 이공계 기피현상은 과거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4년 전만 하더라도 응답자의 65%가 ‘한국 사회의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각하다’고 답했지만 이제는 ‘심각하다’는 답이 절반 수준(33.9%)으로 내려앉았다. 설문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58.6%는 “자녀에게 이공계 대학을 권유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일방적인 지시·수행이 문화가 돼버려”국내 과학기술 현실에 대한 과학자들의 인식은 4년 전 조사에서도 “국내 과학자 72%, 한국 뜨고 싶다”는 응답처럼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 악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상황과 비교한 설문조사에서 ▶연구 풍토 ▶연구자들의 연구 집중 수준 ▶R&D 관리 및 지원시스템 ▶과학기술자의 위상 및 복지·사회적 인식 ▶연구정책 및 행정 등 5개 부문은 “과거보다 나빠졌다”는 답이 “좋아졌다”는 답의 2~3배에 달했다. 특히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기회가 있다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한 과학자가 4년 전보다 5%포인트 이상 높은 77.2%까지 치솟았다. ‘더 좋은 연구 풍토와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한 박사는 “지난 정부 때보다 관료들의 무리한 간섭이 더 구체적이고 심해졌다”며 “대화와 토론은 생각하기 어렵고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지시와 수행이 문화가 돼 버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덕특구의 또 다른 박사는 “현 정부 들어 과기부가 없어지고 산업부만 남은 느낌이다. 과기부는 미래를 보고 키워 나가는 정책을 하고 산업부는 현장에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금은 인공지능이 화두가 되면 거기에 정책과 예산이 쏠리고, 중력파가 터지면 또 거기로 쏠려 가는 스타일의 정책이 만연해 있다”고 비판했다.



근무시간 70%는 평가 준비, 보고서 작성설문조사에서 지적된 국내 과학계의 문제점 중 ‘연구시간을 빼앗는 행정업무’와 관련해서는 많은 과학자가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대전의 한 출연연 연구 과제 책임자인 임모(49) 박사는 요즘 과학자로서 심각한 정체성 고민에 빠졌다. 올해 초 정부가 일방적으로 연구 과제 예산을 20% 삭감한 데다 정부의 지시와 간섭이 심해지면서 그만두겠다는 연구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임 박사는 평소 근무시간의 70%를 연구 평가 준비와 각종 보고서 등 연구 외적인 일에 투입해 온 터라 힘들어했다.



지질자원연구원에서 근무한다는 한 박사의 말도 다르지 않다. 그는 “연구가 아닌 평가에 모든 초점이 잡혀 있다 보니 연구는 뒷전일 수밖에 없다”며 “평가를 잘 받아야 차기 사업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없다”고 털어놨다.



화학연구원에 근무하는 한 박사는 “연구소에 연구원 한 사람이 하루에 10~20번씩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 연구원 10명이 사용하면 하루에 100~200번 가동하는 셈이다. 그런데 연구장비관리행정법에 따라 장비를 한 번 사용하더라도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어떤 내용으로 가동했는지’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신 위한 골든타임 놓치는 건 아닌지”국내 과학자들이 바라보는 과학기술 현실이 부정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한국 과학기술의 절대적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니다. 미래창조과학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한국 과학기술은 R&D와 논문 건수, 특허 등록 수 등에서 선두권을 점하고 있다. 특히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와 민간의 R&D 투자 비중은 4.29%로, 세계 1위다. 한국 다음으로 이스라엘-일본-핀란드-스웨덴 수준이다. 50년 전 과학 불모지에서 시작해 반세기 만에 일궈 낸 엄청난 성과다.



문제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식이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총괄부원장을 역임한 박원훈 박사는 최근 한림원에서 펴낸 ‘포스트 창조경제 시대의 과학기술 혁신 전략’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은 핵심 기술 경쟁력 부문에서 선진국과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반면 중국 등 후발국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며 “집권기간 내에 가시적 성과를 보여 주는 데 집착한 나머지 혁신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진단했다.



반세기 동안 과학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정부가 어쩌다 과학계의 ‘공적(公敵)’이 돼 버렸을까.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 산하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지난해 말 발표한 보고서 ‘전환기의 한국형 과학기술 혁신 시스템(NIS)’은 그 원인을 진단하고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한국은 1960년대 시작한 개발시대와 고도성장기에 정부가 출연연·대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정책에 주도적으로 개입·관리하면서 제한된 자원 환경 속에 산업화정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고 진단했다. 또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정부는 과학기술 혁신 시스템의 설계자 겸 관리자로서 과학기술의 선진국 수준 달성이라는 목표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최근 들어 과학기술 시스템과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지금까지 해 온 정부의 역할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이제 정부가 과거처럼 과학기술정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해선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는 과학기술 생태계의 조성자로서 생태계의 건전한 작동을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만 나서 이를 도와주는 차원의 역할로 변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보고서를 작성한 STEPI 홍성주 박사는 “이제는 시스템의 자율성을 활용하는 시대에 와 있다”며 “과학기술 활동에 대해 신뢰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시스템을 움직일 ‘공감형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환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는 좀 더 구체적인 지적을 한다. 노 교수는 “관료들이 그간 시시콜콜 행사해 온 연구 평가와 예산 배분 등 규제와 권한을 포기할 수 있어야 과학자들의 연구 자율성이 생겨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런 공무원들을 막아 줄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며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과학기술전략회의에서 이런 일을 해 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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