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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양산업 지정’ 오판, 반면 교사 삼아야


영국으로부터 조선업 1위 자리를 쟁취했던 일본은 1973년 1차 석유파동이 벌어지며 새 배에 대한 수요가 70% 줄자 정부 차원에서 조선업을 사양산업으로 규정했다. 두 차례에 걸친 구조조정으로 61개 였던 조선소는 26개로, 생산능력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 50%에 달했던 세계시장 점유율은 90년대 후반 이후 20%대로 낮아졌다. 일본의 침몰은 한국에는 기회가 됐다. 80년부터 집중 투자를 시작한 한국 조선업체들은 99년 삼성중공업이 세계 1위로 부상하는 등 조선업 호황 사이클의 효과를 오롯이 누리며 한국의 대표적 수출산업으로 경제를 견인했다.


그후 17년만에 포세이돈의 삼지창은 돌고 돌아 이번에는 한국 조선업을 겨냥하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6일 조선· 해운업에 대한 ‘사즉생’(死則生)의 구조조정 의지를 밝혔다. 이날 열린 ‘제3차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 회의에서 신속한 구조조정이 필요한 산업으로 조선·해운업을 규정한 것이다. 정부의 해법은 개별 기업 여건에 따라 자율협약을 체결하거나, 자체 경영정상화 방안을 수립해 추진하고 정부와 채권단이 집중 관리하는 것이다. 죽을 각오를 얘기했지만 정부 스스로 칼을 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조선과 해운은 대표적으로 경기를 타는 산업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과 한진해운의 영업이익 추이를 살펴보면 89년 한진해운의 모회사인 한진해운홀딩스(2009~2014년은 유수홀딩스)가 흑자로 돌아서자 현대중공업도 90년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한진이 2004년 8000억원이 넘는 흑자를 내자 현대중공업은 이듬해인 2005년 흑자로 돌아서 2006년부터 매년 8000억~3조5000억원의 흑자를 냈다. 통상 상선 발주는 해운 경기가 살아난 뒤 2~3년 후에 이뤄진다. 물론 2000년대 후반 이후의 현대중공업 실적은 상선보다는 플랜트 분야의 역할이 컸지만 조선과 해운 경기가 비슷하게 돌아간다는 점에는 큰 변화가 없다.


최근 2년 10조 손실, 인력감축 불가피한국 조선업계에 먹구름이 낀 것은 ▶2008년 이후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해운업계의 침체 ▶물동량 감소로 신규 선박 발주가 줄어든 데 따른 중국 조선업계의 저가 밀어내기 수주 ▶유가 폭락에 따른 유조선과 해양 시추 플랜트 발주 급감이 어우러진 결과다. 그 결과 국내 조선업계는 2014년과 2015년 10조원 가까운 손실을 봤다. 대규모 인원 감축과 유동자산 매각을 포함한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현대중공업만 해도 조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금융사부터 호텔업까지 계열사가 20개가 넘는다. 지난달 28일엔 조선 관련사(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등)의 임원 가운데 25%인 60여명이 회사를 떠났고 남은 임원들도 급여의 50%를 반납했다. 사무직·단순기술직 대상으로 한 희망퇴직 작업도 시작한다. 대우조선은 채권단 주도로 본사 조직과 인원을 30% 가량 줄이고 비핵심 자산 매각에 나섰다. 삼성중공업은 주채권은행이 중심이 돼 회사 측에 최대한의 자구계획을 제출하도록 하고 자구계획 집행상황 관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기업 자체의 구조 조정은 속도가 더디므로 정부가 직접 칼을 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강기 해양대 교수는 “조선업계가 잘못된 예측으로 불려놓은 몸집을 가볍게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욕을 먹더라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사실상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을 삼성중공업 또는 현대중공업과 통합시켜 ‘빅2 체제’로 개편하자는 방안이 나온다. 이럴 경우 서로 중복된 설비와 인원을 정리해야 하는 부담이 따른다. 수조원 단위의 적자를 내는 대우조선을 제 코가 석자인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에 떠넘기는 모양새다. 빅3가 모두 하는 해양 플랜트나 방위사업을 떼어 내 별도 회사를 차리는 방법도 있다. 우선 대우조선에서 수익을 내는 방위산업을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에 몰아주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대우조선은 순수 상선 건조 회사로 남는다. 김현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자발적 조정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힘들어 정부가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며 “조선업 구조조정을 위한 골든타임은 앞으로 6개월 남짓인데 이 기간을 놓치면 영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빅3가 해양플랜트, 선박 건조, 방위산업에서 출혈 경쟁을 하지 않도록 조율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조선업 포기는 중국·일본에 좋은 일”일부 전문가들은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회사를 살리는데 세금을 들이느니 조선업을 포기하고 실업 대책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조선 산업의 고용창출 효과와 향후 전망을 감안했을 때 이는 지나치게 극단적인 처방이라는 반론이 우세하다. 박무현 하나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한국 조선업은 선박 분야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약 2만5000명의 설계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기술 인력이 부족한 중국 조선업체는 선박 인도가 지연되는 등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잘못된 구조조정 정책은 중국과 일본에만 좋은 일을 해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70년대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탱커(유조선)·벌크선(화물) 등의 설계 인력을 줄였다가 이후 주력으로 부상한 2만TEU(20피트컨테이너)급 대형 컨테이너선,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30만t 이상의 초대형 유조선(VLCC) 등 고부가가치 선박 분야에서 한국에 밀리고 있다. 그 결과 2000년 이후 중국의 물동량이 급증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호황에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일본이 성급한 사양산업 지정 대신 기술 인력을 유지했더라면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2008년 이후 호황기에 3400여개의 조선소가 생겼던 중국에서도 지난해 말 기준 현재 남은 곳은 300개 남짓에 불과하다. 중국 총 수주량의 92.5%를 52개 업체에서 수주하고 있고, 이 중 20~30개의 조선소만 살아남을 전망이다. 올들어 중국 오주조선이 국유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파산하는 등 중국 정부의 지원도 한계에 달한 상황이다.


2~3년 후에는 수급 상황도 호전될 전망이다. 덴마크 머스크, 스위스 MSC 등 초대형 글로벌 선사들이 재편을 마치는 2020년쯤에는 새로운 배에 대한 발주가 시작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이란 경제 제재 해제로 급락했던 유가도 배럴당 40달러 선을 회복했다. 업계에서는 유가가 배럴당 70달러를 넘어서면 해양 플랜트 발주가 재개될 것으로 보고 있다.


호황까지 매년 수조원 적자 버텨야조선해운 분석업체인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한국 조선업계의 수주 잔량은 2759만CGT(가치환산톤수)로 중국에 이어 세계 2위다. 단일조선소로는 대우 옥포조선소, 현대중 울산조선소, 삼성중 거제조선소가 세계 1~3위다. 수주 잔량은 12년 만의 최저치지만, 여전히 1년 반 정도의 일감이 남아있다. 국제해사기구(IMO)가 올해부터 만드는 배들에 대해서는 친환경 설비 규제를 대폭 강화한 것도 관련 기술력을 갖춘 한국 업체에는 호재다.


문제는 호황 사이클이 돌아올 때까지 어떻게 버티느냐 하는 점이다. 당장 구조조정에 들어갈 비용은 차치하고 최악의 경우 앞으로 5년간 매년 수조원씩의 적자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군살은 빼고 최대한 버티되 핵심 기술·인력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양종서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해양 플랜트 호황기에 인력을 많이 끌어 온 대형 조선사들의 도크가 빈다면 수만 명이 붕 뜨게 된다”며 “인력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현장 인력들이 중국이나 일본 등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무현 애널리스트도 “프랑스의 해양 엔지니어링 업체인 테크닙은 엔지니어만 3만7000명에 달한다”며 “한국 조선업은 연구개발(R&D) 분야 투자를 더욱 늘리고 숙련된 기술인력을 확보하는데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고 진단했다.


다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가 지원에 나서려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호황기에는 대규모 수익을 만끽했던 대주주나 경영진이 불황이라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채권단·근로자와 함께 대주주도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며 “조선·해운업체 경영진은 필요하면 검찰 고발을 통해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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