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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헬리콥터 화폐’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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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어느 날 하늘에서 돈이 마구 떨어지면 어떨까? ‘돈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성현의 가르침이 있지만 ‘돈이 없는 것이 세상 악행의 근원’이라는 금언(金言)도 있다.

하늘의 돈벼락이라니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교수가 ‘헬리콥터 화폐(helicopter money)’라고 처음 언급한 것이다. 중앙은행이 헬리콥터로 돈을 뿌리듯이 갑자기 화폐 공급을 늘리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경기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헬리콥터 화폐는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줄이고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 재정 적자를 충당하는 것과 같다. 세금을 돌려받은 국민의 소득은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늘어나고 정부가 중앙은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을 갚지 않기 때문에 정부 부채는 발생하지 않는다.

유럽 중앙은행과 일본은행이 최후 수단으로 헬리콥터 화폐를 고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앙은행들은 국채와 정부 보증채권을 대량으로 구입해 시중에 자금을 공급하는 양적완화도 하고 금융기관이 중앙은행에 맡긴 예금에 수수료(마이너스 금리)를 부과해 대출을 촉진하려 했다. 그러나 실물경기 회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이제는 돈을 직접 뿌려 민간 소비와 투자에 영향을 주겠다는 것이다. 늘어난 정부 부채 때문에 지출을 쉽게 늘리지 못하는 정부로서는 분명 매력적인 정책이다.

그러나 헬리콥터 화폐는 부작용이 클 수 있다. 재정 지출을 위해 화폐량을 늘리면 일시적으로는 좋지만 계속하면 효과가 작아진다. 또 정치적인 목적으로 잘못 사용될 수 있다. 돈을 마구 찍어 지역 공약 사업을 하거나 부실한 대기업들을 지원하고, 특정 계층에만 혜택을 주는 세금 감면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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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아진 화폐가 생산을 늘리기보다 물가를 올리면 일정한 소득을 받는 근로자와 연금 생활자들의 실질소득은 줄어든다. 집값이 오르면 덩달아 전·월세도 오른다. 자산가격의 거품이 발생할 수도 있다. 중앙은행의 물가 안정의지가 약한 국가에서 정부가 재정 지출을 위해 통화량을 계속 늘렸을 때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많은 남미 국가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서민 생활이 황폐해지고 정상적인 경제 운영이 어려웠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자국 화폐를 없애고 미국 달러를 대신 도입하기도 했다. 한 번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통화정책의 신뢰성이 무너지면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알 수 없다.

한국은 아직 헬리콥터 화폐를 고려할 단계가 아니다. 앞으로 경제 상황에 따라 2%인 정책 금리를 더 낮출 여력이 있다. 국공채를 대규모로 사들이는 양적완화도 가능하고 필요하면 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선별적인 금융 지원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2008년 9월 세계 경제위기 때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여섯 번에 걸쳐 낮추고 국고채를 매입했다. 채권시장 안정과 은행 자본금 확충을 위해 자금을 공급하고 중소기업 대출 한도를 늘렸다. 그러나 위급 상황이 아닐 때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부실기업, 가계 부채, 청년 실업, 고령화, 생산성 하락과 같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은 통화정책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려는 종합적인 대책 없이 손쉬운 돈벼락에 의존하는 것은 결국 국민의 부담을 늘리고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할 수도 있다. 일본 아베노믹스의 예를 보더라도 화폐량을 늘리는 정책으로 고용과 성장을 촉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은행은 법으로 통화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물가 안정에 두고 있다. 정부와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물가 안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97년부터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의장을 기획재정부 장관에서 한국은행 총재로 바꿨다. 그러나 한국은행에 대한 경제 주체들의 신뢰가 높지만은 않았다. 최근 들어 경제 예측이 자주 틀리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 이하로 목표치에 미치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한국은행이 경제 상황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한다고 비판한다.

전체 7명의 금융통화위원 중 4명이 지난달에 바뀌었다. 모두 경험이 많고 역량 있는 분이 새로 임명돼 시장의 기대가 높다. 한편으로는 통화정책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금융통화위원회가 과거보다 시끄러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사람들은 경제학자들 간에 의견이 너무 다양하다고 비판한다. 3명의 경제학자가 모이면 4개 이상의 다른 방안이 나온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과 다른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한군데 모으면 경제학자들은 경제 문제에 대해 대체로 의견이 비슷하다. 정치에 흔들리지만 않으면 된다.

불·바퀴·중앙은행은 인류의 3대 발명품이라고 한다. 중앙은행은 국민 경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앞으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이 국민에게 더욱 신뢰를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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