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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가토 기요마사와 구마모토

지난 4월14일 일본 규슈(九州)의 구마모토(熊本)에서 강진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규모 7.3의 본진(本震)이 들이 닥쳤다. 첫 지진 후 작은 여진만 생각하고 무너진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또 지진이 일어날까 우려되어 1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2주째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일부는 좁은 자동차 속에서 오래 생활 하여 혈류(血流)가 방해를 받아 이른 바 이코노미 클래스 증후군으로 사망한 사례도 늘고 있다.

수년 전 구마모토에 다녀 온 적이 있다. 규슈의 대표적인 도시 구마모토 시를 둘러 싼 구마모토 현은 동쪽으로 아소산(阿蘇山 해발 1592m) 등 지대가 높으나 서쪽은 동중국해를 바라보는 아리아케 해(有明海)와 야쓰시로 해(八代海)로 연결되는 비옥한 지역이다.
구마모토에는 지방교육이 발달하여 패전 전에는 구마모토 제5고가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 일본 메이지(明治)시대의 대문호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이 학교에서 영어선생을 하였다.
구마모토 제5고 출신으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와 아베 현 총리의 작은 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가 거명된다. 두 사람은 출신 중학교는 다르나 같은 하숙방을 쓰면서 나란히 합격한 동급생 관계이다. 그 외 구마모토 출신의 인물이 많다고 한다.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도 구마모토 출신이다

구마모토하면 검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를 떠 올린다.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이다. 그는 구마모토의 새로운 다이묘 호소가와 다다토시(細川忠利)의 초빙으로 5년간(1640-45) 이곳에서 무사로서의 마지막 인생을 정리했다.
그는 구마모토 시의 긴보산(金峰山) 레이간도(靈嚴洞)에 칩거하면서 병법서 고린서(五輪書)를 완성하였다. 구마모토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당시 일본 지인의 안내로 이번에 피해가 큰 구마모토 성(城)을 둘러보았다. 지인은 어떤 지진에도 문제없을 정도로 잘 지은 성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전국(戰國)시대 성을 잘 짓기로 유명한 카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조선 침략전쟁의 경험을 살려 특별한 방어 설계로 정교하게 지은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했다.

정유재란 이후 1597년 울산성(지금의 학성공원)이 권율(權慄) 양호(楊鎬) 등이 이끄는 조명(朝明) 연합군에 포위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이 지은 울산성에서 농성하다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일본으로 도망친다. 만 오천 명의 일본군 대부분은 전사하고 불과 수 백 명이 울산성에 불을 지르고 목숨만 부지한 채 달아났다.
지금의 구마모토 성은 1607년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 제일의 성을 축조하겠다는 일념으로 울산성 축성을 참고하여 조선에서 납치해 온 장인들과 함께 지은 성이라고 한다.
울산성 농성시 우물이 없고 보급마저 끊어져 말을 죽여 그 피로 갈증을 달래고 그 고기로 허기를 채웠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그 쓰라린 경험을 살려 구마모토 성은 성곽의 견고함뿐만이 아니라 성안에 우물을 120개나 파고 실내 다다미(疊)도 유사시 식용 가능한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 군량이 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번 지진 피해로 수리 보수를 하는데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하니 당분간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 판 울산성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에 울산마치(蔚山町)가 남아 있는 것은 강제로 끌려 온 축성의 장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설명이다. 울산광역시가 구마모토 시와 자매도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두 도시가 시대를 극복하여 과거의 앙숙관계를 미래지향적 우호 협력의 관계로 승화시킨 흔치 않은 예로 보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와의 인연은 축성으로부터 20년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간다. 가토는 일본 난세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먼 이종 간으로 두 사람 모두 일본 중부 나고야(名古屋)의 나카무라(中村)에서 태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직전에 규슈에 전쟁 지휘부로 축성한 성의 이름을 나고야(名護屋)로 부른 것도 자신의 고향 나고야를 연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의 라이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히데요시의 규슈정벌에 참가하여 전공을 함께 세워 그 포상으로 구마모토 지역의 북쪽과 남쪽을 나누어 맡는다. 구마모토는 1588년 가토 기요마사가 처음으로 다이묘(大名 영주)로 머리를 올린 곳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곳의 다이묘가 되었을 때 성 이름은 구마모토(?本)였다. 구마(?)에는 ‘두려워한다’는 외(畏)자가 들어가 있다. 그는 지명이 무장(武將)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같은 발음의 다른 글자(熊 곰)로 바꾸어 구마모토(熊本)가 되게 하였다. 구마모토의 구마(熊)가 백제의 웅진(熊津)과 관계를 연결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카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과 함께 선봉장으로 활약 함경도에서 임해군 순화군 등 선조대왕의 두 왕자를 생포하는 등 우리에게는 악명 높은 장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 귀국한 가토는 동서(東西)내전에서 승리하여 패배한 고니시의 영지도 몰수하여 54만석의 강력한 다이묘가 되나 그가 죽은 후 아들 대에 가서 영지 모두를 빼앗긴다. 가토 가문이 구마모토에 터를 잡은 지 불과 44년만이다.

가토 가문을 이어 인근 고쿠라(小倉)의 작은 다이묘였던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전봉되면서 호소카와 가문이 메이지 유신까지 260년간 지배하였다. 일본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가 이 가문의 직계로 그는 총리가 되기 전에 구마모토 현의 지사를 역임했다.
당시 지인의 설명에 의하면 구마모토 지역은 과거 일본에서는 불의 나라 히국(火國)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의 나라라고 부른 것은 세계 최대의 칼데라(가마솥 모양의 대형 화구) 화산인 아소산이 있기 때문이다. 아소산은 항상 연기가 나오고 있어 언제 분화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활화산이다.
사람들은 불(火)의 글자가 보기에 불편하여서인지 같은 발음의 히(肥)로 바꾸어 히국(肥國)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이 지역이 아소산 분화 시 날라 온 화산재가 쌓여 비옥한 토지가 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히국은 7세기 말부터 전후(前後)로 양분된다. 수도가 있는 교토를 바라보고 앞쪽이 히젠(肥前), 뒤쪽은 히고(肥後)로 부르는데 지금의 사가(佐賀)현이 히젠, 구마모토는 히고에 해당된다.

지인과 함께 아소산을 찾았다. 지대가 완만하여 자동차로 오를 수 있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분화구 주변에 한 두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콘크리트 방어벽이 준비되어 있었다. 화산 분화와 함께 언제 바위가 날라 올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 분화는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묘한 자연의 무서움을 느꼈다. 구마모토가 불의 나라라고 부르는 이유를 실감하였다.

일본에 살면서 좋은 온천이 많아 부러워했는데 온천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 열도 지하에는 거대한 마그마가 끓고 있어 뜨거운 온천수를 내 주지만 언제 그 마그마가 분화되고 그 충격으로 지진이 발생 큰 재앙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TV로 보는 재난 현장은 비참하다. 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구마모토 사람들은 더욱 강인해지고 자연이 주는 시련을 반드시 극복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년 전 동 일본 대재난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 일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힘내세요! 구마모토의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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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