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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중년들도 뭐든지 취미 하나쯤 갖고, 눈치 보지 말고 살자 오늘도 랄라라~


'덕후 1세대' 만화가·장난감 수집가 현태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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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연구가 현태준씨는 자칭 ‘짝퉁 아리스트(아티스트)’다. “‘예술합니다’하는 사람 중에 진짜 예술가는 얼마나 될까요”라고 물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인터뷰 섭외를 위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참 재미있게 사시네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요즘도 문방구 다니시나요.” “웬걸요. 거의 다 사라졌잖아요.” 지난 19일 오후 그의 아지트를 찾아갔다. 서울 홍익대 인근의 ‘뽈랄라수집관’이다. 지하로 연결된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잡동사니의 보물섬. 아이디어의 목욕탕에 풍덩 하실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장난스럽다.

계단 양쪽에 손님들이 붙인 메모지가 가득하다. ‘너무 귀여워, 정말 추억 돋네요’ ‘여기가 낙원, 성지를 발견했다’ ‘완전 내 타입 ㅋㅋ’ 등등. 1m82㎝, 100㎏의 거구가 기자를 맞았다. 현태준(50) 관장이다. 덥수룩한 수염에 두꺼운 뿔테 안경, 위압적 체구에 비해 말씨는 사근사근하다. 전시장은 별천지다. 100㎡ 공간에 온갖 잡것이 들어차 있다. 장난감·인형·만화책·오락기·로봇 등등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의 말을 빌리면 ‘초괴상하고 어이없는 물건들 대집합(SUPER ULTRA GOOD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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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랄라 수집관’ 입구. 처음부터 관객을 무장해제시킨다. ‘갱년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를 표방한다.

 
현대판 골동품상인가, 정말 어이가 없다.
“2009년 문을 열었다. 오래된 완구, 최신 피규어, 생활용품이 다 섞여 있다. 아이디어의 보물창고랄까. 개관 준비에만 1년이 걸렸다. 데이트하는 젊은 커플들이 주로 온다. 평일 50명, 주말 100~200명가량이다. ‘깔깔깔’거리며 구경한다.”
정리가 잘됐다. 얼마나 모았나.
“3만 점 가까이 된다. 어려서부터 우표·만화책 등을 모으는 걸 좋아했다. 연희동 등 다른 창고에도 있는데 다 합하면 10만 점은 되지 않을까 싶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
“서울대 공예과를 나와 편집디자인 일을 했다. 외환위기로 일이 끊겨 아내와 함께 미국·캐나다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 앤티크숍에서 낡고 오래된 것에 대해 눈을 떴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사라지는 것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생활사박물관장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비싼 건 별로 없지만 물건이 많다 보니 제법 돈이 들었다. 서울 강북 30평(약 99㎡) 아파트 한 채 정도 살 수 있지 않을까. 본업이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아내 몰래 모았다. 제 작업실에 숨겨 놓았다. 수집관을 열면서 아내도 처음 알게 됐다.”
입장료가 1000원이다.
“2000원이었는데 2년 전 내렸다. 요즘 학생들이 돈이 없지 않나. 1000원도 카드로 긁는다. 세월호·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건 이후 주머니가 더 얄팍해진 것 같다. 초창기에는 월 200만원가량 적자였는데 요즘엔 임대료 정도 맞추게 됐다.”
최근에는 주로 뭘 수집하나.
“성인소설·성인만화 등 주로 책이다. 2만~3만 권쯤 된다. 전단에도 관심이 많다. 덤핑광고·일수안내·성인도박장 등 요즘 사람들 풍속도다. 공짜라서 좋다. 수집보다 중요한 건 정리·분류하는 일이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 누구나 모을 수 있다.”

| 조립식 플라스틱 모형 대백과 펴내
“70~80년대 소년들 놀이문화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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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유행했던 플라스틱 모형들. 알록달록 모양은 거칠었지만 당시 아이들의 꿈이 담겨 있다.


현 관장을 찾은 이유도 정리와 분류 때문이다. 그의 신간 『소년 생활 대백과』가 눈에 띄었다. 부제는 국산 플라스틱 모형의 역사. 70~80년대 코흘리개들이 푹 빠졌던 프라모델(조립식 플라스틱 장난감)의 거의 모든 걸 망라했다. 탱크·비행기부터 마징가Z·태권V까지 추억의 시간여행을 펼쳐 보인다. 소개된 모델은 2000점 남짓. 대부분 그가 수집한 것이다. 90년대 말부터 전국 방방곡곡, 골목골목 문방구를 돌아다니며 건진 ‘21세기 아저씨’들의 ‘20세기 소년’ 시절이다. ‘장난감으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다.
 
정보가 방대하다. 공을 많이 들였다.
“각 모형의 포장상자·조립설명서를 스캐닝하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데만 3년이 걸렸다. 시대별 대표작을 포괄했다. 취미로 시작했지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40~50대의 유년기 놀이문화를 복원한 셈이다.”
추억에 잠길 아저씨들이 많겠다.
“70~80년대에 플라스틱 모델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제품당 수만 점, 수십만 점이 팔렸다. 업체들도 큰돈을 만졌다. 당시 아이들은 ‘엄마 100원만’ 하며 문방구로 달려갔다. 제 개인사이자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옛 소년들에게 플라스틱 모형은 값싸고 맛있는 음식 같았다.”
우리의 초라한 모습도 보인다고 했는데.
“놀이를 놀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다. 장난감을 과학 교재로 포장했다. 놀이보다 명분을 앞세웠다. 그래야 부모들이 사 줄 테니까. 아이들이 노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했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 이중적이 되지 않겠나. 겉과 속이 다르고, 잔머리를 굴리고, 밤이 되면 음습한 곳을 찾고….”
예를 들어 본다면.
“70년대 어린이잡지에 실린 전폭기·탱크모형 광고 문구를 보자. ‘세계를 향한 기능공이 되자! 중화학공업에서 축소모형을 만들어 보지 않고는 설계나 제작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팍팍 줬다. 맘껏 놀아야 창의성이 커지고 영혼도 자유로워지는데 말이다.”
지금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근본적으론 비슷하다. 노는 걸 죄악시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이다. 대형마트 완구 코너를 가 보라. 너도나도 지능 계발, 교육용을 앞세운다.”
‘두 얼굴의 사회’도 지적했다.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87년까지 외국 장난감 수입이 금지됐다. 그사이 업체들은 일본 모형을 불법 복제해 팔았다. 신제품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서울시내 백화점에선 외제 장난감을 보란 듯이 판매했다. 밀수를 하거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값도 비싸 되레 위화감을 증폭시켰다. 수입이 허용됐다면 국산품의 질이 좋아졌을 것이고 만화·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도 더 빨리 발전했을 것이다.”

| 인형 등 모아 ‘뽈랄라 수집관’ 운영
“잡동사니가 아이디어의 보물창고”


현 관장은 2001년 『뽈랄라 대행진』으로 이름을 알렸다. 체면·허세·규범으로 똘똘 뭉친 이 시대 어른들을 글과 만화, 사진으로 풍자했다. 『아저씨의 장난감 일기』 『뿌지직 행진곡』 『오늘도 뽈랄라』 등을 잇따라 내며 ‘B급 정서의 비주류 작가’로 활동해 왔다. ‘대낮에 키스하여 밝은 사회 이룩하자’ ‘눈치 보지 않는 사회 우리나라 좋은 나라’ 등의 일러스트도 남겼다. ‘포르노’와 ‘랄라라’의 합성어인 ‘뽈랄라’는 ‘헐렁하게, 자유롭게, 재미있게’ 살자는 그의 인생관을 대변한다.
 
국내 ‘덕후(매니어)’ 1세대로 꼽힌다.
“취미가 일상이자 직업이다. 어려서부터 구질구질한 것, 냄새나는 것을 좋아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 생활사를 기록해 왔다. 70~80년대 중고생들의 성과 여가문화를 돌아본 『19금의 사생활』도 최근 탈고했다. 문화평론가 김봉석씨와 함께 썼다.”

| ‘키덜트’ ‘피터팬 신드롬’ 웃기는 말
동심 유지 아저씨 없고 대부분 엉큼

 
‘키덜트 문화’ ‘취향 저격’이 유행인데.
“웃기는 말 중 하나가 ‘키덜트(Kid +Adult)’다. 순수한 동심을 유지하는 아저씨는 없다. 대부분 엉큼하다. 부분을 전체로 이해하는 오류일 뿐이다. ‘피터팬 신드롬’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단순화하면 곤란하다. 제 수집벽은 복고 취향이 아니다. 지난 시대를 이해하는 잣대다. 요즘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취향을 좇는 건 환영할 일이다.”
동년배 중년에게 한마디 한다면.
“여행이든 수집이든 취미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 언제까지 ‘맨날 술이야’ 하며 살 것인가. 돈만 쓰고 몸만 버리는 일이다. 저를 이상하게 보지 않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그게 일상의 민주주의다. 많은 이가 좀 더 즐거웠으면 한다. 오늘도 뽈랄라~.”

| 소년 시절 상상력 발동시켜준 『사랑의 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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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SF소설, 소년소녀명작, 체험수기 시리즈.


현태준 작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헌책방을 찾는다. 요즘은 집 근처 신촌에 있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종종 들른다. 그가 헌책방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1 때부터. 처음 구입한 책은 나도향의 단편소설집 『벙어리삼룡이/물레방아/뽕』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서』 등 고전도 읽었지만 “양식이 되고 피가 된 책은 따로 있다”고 기억했다. 다음은 그가 뽑은 ‘나의 3대 애장서’다.

①SF세계명작(아이디어회관)=세계 명작동화가 대세이던 1970년대 중반 남자 아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당시만 해도 SF소설은 매우 새로운 장르였다. 국내 첫 발간된 SF시리즈다. 낯선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시켰다. 아이작 아시모프, H G 웰스 등 유명 작가들과 만나게 됐다.

②한국 소년소녀 명작선집(아리랑사)=중학생 때 즐겨 읽었다. 내용이 쉽고 명랑·쾌활해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조흔파 선생님의 『악도리 쌍쌍』 『얄개전』, 김내성 선생님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이 생각난다. 70년 초반 등장했는데, 80년대 초반까지 동네서점에서 볼 수 있었다.

③사랑의 체험수기(대현출판사)=청소년의 연애 체험담을 모은 시리즈다. 출판사 측에서 거액의 상금을 걸고 공모한 작품 가운데 수상작을 골라 실었다. 중·고교 시절 이성교제에 대한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었다. 황당한 대목도 많아 실제 체험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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