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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⑬ 안식일 어긴 자는 사형에 처하라?

예루살렘에서 만난 유대인은 이렇게 경고했다. “혹시 안식일에 운전할 일이 있으면 조심하라.”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갈 일이 있다면 꼭 명심하라고 했다.

“자칫하면 돌을 맞을 수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게 안식일을 지키려는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 유대인은 안식일에 운전을 하지 않나?”
“안 한다. 운전도 일이다.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럼 밥도 안 해먹나?”
“성경에는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도 불을 피워서는 안 된다’(구약 탈출기 35장3절)는 대목이 있다. 음식은 하루 전에 이튿날 음식까지 미리 장만해 둔다. 안식일에는 요리를 하지 않고 먹기만 한다. 안식일에는 비가 와도 우산을 펼치지 않는다.”
“그럼 흠뻑 젖나? 왜 그런가?”
“안식일에는 천막을 치는 일이 금지돼 있다. 그래서 우산도 펴지 않는다.”

유대 민족은 오랜 세월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었다. 소떼와 양떼를 몰며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늘 천막을 쳤다. 새로 천막을 치고, 다시 천막을 걷는 일은 그들에게 집을 짓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일상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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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 모자에 검정 코트를 입은 정통파 유대교인이 기도를 하기 위해 손을 씻고 있다.

“한국 사람은 주말에 여행을 간다. 안식일은 일종의 주말이다. 안식일에 운전을 못 하면 유대인은 주말 여행도 안 가나?”
“안식일에는 여행을 가지 않는다. 다들 집에 머물고 쉬면서 보낸다. 여행은 안식일에 가지 않고, 주로 여름 휴가 때 간다.”
“만약 안식일에 차를 몰고 유대인 마을에 가면 어찌 되나?”
“돌을 집어서 던지는 유대인을 만날 수도 있다. 유대인 마을의 아파트에는 안식일에 주차장 출입구를 아예 봉쇄하는 곳도 있다. 운전을 못 하게끔 말이다. 안식일에는 전기 스위치도 켜지 않는다. ‘불을 피우지 말라’는 안식일 규정 때문이다. 가스레인지의 불도 켜지 않고, 냉장고의문도 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안식일에는 자동으로 층마다 선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도 말이다.”
“왜 그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걸 중시하나?”
“성서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돼 있으니까. 그게 유대인과 하느님의 언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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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인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약’과 ‘신약’의 구분이 없다. 단지 ‘성경(Bible)’일 뿐이다. 그리스도교가 생기면서 그들의 ‘성경’이 ‘구약(Old Testament)’으로 불리게 됐다.

실제 그랬다. 유대교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다. 그때는 귀밑 머리를 감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검정 모자를 쓴 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오가는 모습을 예루살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올드시티의 ‘통곡의 벽’까지 걸어가서 기도를 하는 정통파 유대교인들도 꽤 있었다. 안식일에도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건 괜찮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의 안식일은 다르다. 이슬람교는 금요일이 안식일이다. 예루살렘에서도 무슬림들은 금요일에 가게문을 닫았다.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은 일요일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에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세 종교가 있고, 서로 다른 요일의 세 안식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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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 이슬람교를 믿는 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이다.

나는 숙소를 나서서 정통파 유대인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갔다. 예루살렘 올드시티의 ‘통곡의 벽’에서 걸어서 15~20분 거리였다. 그 지역에는 온통 긴 수염에 검정 코트를 입은 정통파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여성들도 검정 치마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유대의 전통적 교육 방식을 고수하는 정식 학교도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옛날식으로 사는 사람들’로만 보였다. 미국의 개척 시대를 담은 TV드라마 ‘초원의 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거기서 만난 유대인에게 물었다.

“이스라엘은 날씨도 더운데 저렇게 수염을 기르면 더 덥지 않나. 현대 사회의 트렌드와도 전혀 맞지 않아 보인다. 죄송한 말이지만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그 유대인은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요즘 사람들이 따르는 트렌드가 영원히 가는 건가. 아니면 곧 바뀌는 건가.”
“곧 바뀌는 거다. 갈수록 바뀌는 시간도 빨라진다.”
“그럼 ‘현대적’이라는 미적 기준도 영원한 게 아니지 않나. 일시적인 기준이고, 곧 바뀌는 기준이지 않나. 우리는 그러한 미적 기준에 별로 관심이 없다. 굳이 따르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한 걸 추구한다. 그게 우리의 미적 기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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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의 ‘모세의 비전’. 샤갈성서미술관 소장.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기준과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그러니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한 율법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십계명 중에서도 ‘의례’에 대한 규정은 ‘안식일을 지켜라’가 유일하다. 십계명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명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 지침’이었다.

그럼 안식일을 어기면 어찌 될까.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까. 실제 구약의 출애굽기(탈출기)에는 “이날을 거룩히 지켜라. 누구든지 이날에 일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35장2절)라고 기록돼 있다. 안식일을 어길 경우 ‘죽으리라’고 명시돼 있다. 가톨릭 성경에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35장2절)고 번역돼 있다. 그러니 유대 사회에서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사형감’이었다. 돌로 쳐 죽여야 할 일이었다. 유대 사회에서 도려내야 할 대상이었다. 출애굽기(탈출기)에는 “이날(안식일)에 일을 하는 자는 누구나 제 백성 가운데서 잘려나갈 것이다”(31장14절)고 못을 박고 있다.

예수는 그걸 어겼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다가 등 굽은 여자를 고쳐주었다. 일을 한 셈이다. 그걸 본 회당장은 분노했다. 회당장은 군중을 향해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 안식일에는 안 된다”(누가복음 13장14절)고 다그쳤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받아쳤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누가복음 13장15~16절)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도려내야 할 대상’으로 봤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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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초 디부오닌세냐의 ‘눈 먼 자의 치유’ 런던내셔널갤러리 소장.

예수는 파격을 멈추지 않았다.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아예 회당에 와서 기다렸다. ‘예수는 사형감’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예수를 고발할 속셈이었다. 그날 예수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쳤다. 안식일에 눈 먼 사람을 낫게 한 적도 있다. 그들은 예수에게 따졌을 터이다.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왜 하느님과의 언약을 무시하느냐고 말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가복음 3장4절)

예수의 타깃은 달랐다.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을 놓고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따지고 있을 때, 예수는 전혀 다른 곳을 찔렀다. ‘사람을 살리느냐, 아니면 사람을 죽이느냐.’ 예수의 관심사는 그것이었다. 심지어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가”라며 유대의 율법주의를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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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가 1570년경에 그린 ‘눈 먼 자를 치유하는 그리스도’.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소장.

유대인 마을의 골목을 걸었다. 어린 아이들이 자주 보였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많이 낳는다. 구약의 창세기에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1장28절)는 대목을 믿는다. 그들은 자녀를 여럿 두는 걸 신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여자 아이가 서너 살쯤 된 동생을 안고 다니는 풍경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나 있었던 광경을 유대인 마을에서는 쉽게 마주쳤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성경은 철저한 ‘삶의 지침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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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의 ‘예수’.

‘안식일’을 바라보는 예수의 눈과 유대인의 눈은 달랐다. 예수는 안식일을 어찌 봤을까. ‘안식일’의 ‘안식’을 예수는 어떤 의미로 설했을까. 마태복음서에는 이에 대해 답을 주는 일화가 있다. 예수가 직접 ‘안식’을 거론한 대목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1장28~29절)

예수는 두 차례나 ‘안식’을 강조했다. ‘안식’은 그리스어로 ‘아나파우소(anapauso)’다. 영어로는 ‘give you rest(안식을 주다)’. 무슨 뜻일까. 그저 휴식을 주고, 여유를 주는 걸까. 예수가 설한 ‘아나파우소’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어떠할 때 ‘안식’을 얻게 될까. 그리스도교 영성의 핵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전적인 위탁(total commitment)’ 혹은 ‘전적인 항복(total surrender)’이다.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 그게 ‘전적인 항복’이다.

우리의 삶은 늘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가야할지, 오른쪽으로 가야할지 모른다. 그때마다 마음은 출렁인다. 그 갈림길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모든 걸 내맡기면 어찌 될까. 그 순간,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의 배를 흔들던 그 모든 파도가 잠이 든다. 왜 그럴까. 두려움이 포맷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포맷된 자리로 무언가 밀려온다. 그게 뭘까. 그렇다. 평화다. 그게 ‘아나파우소(안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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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통곡의 벽’앞에 있는 정통파 유대교인들. 남성과 여성의 기도 공간이 칸막이로 나뉘어 있다.

수천 년 역사를 관통하며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키려 애를 썼다. 사람만 대상이 아니었다. 유대의 자연에도 그랬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6년간 농사를 짓고 7년째는 씨를 뿌리지 않았다. 율법에 따른 ‘안식년’이다. 그 해는 땅을 쉬게 했다. “그럼 1년간 농사도 안 짓고 뭘 먹고 살았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유대인들은 안식년을 앞둔 해에 2년치 식량을 준비했다. 안식일 전날에 이틀치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안식일을 상징하는 숫자는 ‘7’이다. 안식년도 ‘7’이다. 7년이 7번 지나면 49년이다. 유대인들은 그 이듬해인 50년째를 ‘희년’이라 불렀다. 그 해는 아주 특별했다. 농사는 희년에도 짓지 않았다. 49년 안식년과 50년 희년이 이어지면 유대인들은 무려 2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만큼 식량을 비축해야 했다. 뿐만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城)을 쌓고 부족 단위로 살던 시대였다. 부족간 전쟁에서 패하면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희년에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켰다. 해방된 노예들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빚도 무효가 됐다.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리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거대한 ‘사회적 포맷’이었다. 그건 예수가 설한 ‘안식’의 포맷 기능과도 맥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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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의 1961년작 ‘낙원’. 천지창조 후의 창조물들이 화폭을 채우고 있다. 샤갈성서미술관 소장.

유대인 마을을 걷다가 골목 귀퉁이의 계단에 앉았다. 가방에서 성경을 꺼냈다. 구약의 첫 장을 폈다. 천지창조의 거대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빛이 창조되고, 밤이 생기고,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겼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 나무가 종류대로 돋아났다. 하늘에는 빛물체가 창조됐다. 해와 달이 생기고, 별들도 생겨났다. 온갖 생물이 생기고, 사람도 생겨났다. 이 모든 드라마가 ‘창조의 드라마’다. ‘안식일’의 뿌리는 창세기다. 하느님은 성경의 시간으로 6일간 천지를 창조하고 7일째 쉬었다고 한다. 왜 쉬었을까.

계단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창세기 천지창조는 6일째 끝났다. 7일째 하느님은 쉬면서 안식만 취했을 뿐이다. 정말 그런 걸까. 나는 7일째 맞는 ‘안식일’에서 비로소 천지창조의 거대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본다. 하늘과 땅이 생기고, 온갖 생물과 사람까지 생겨난 6일째까지는 그 ‘마침표’를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런 걸까.

‘없이 계신 하느님’에서 하늘이 나오고 땅이 나왔다. 해와 달과 별도 나왔다. 이 우주의 온갖 생명이 ‘없이 계신 하느님’에게서 생겨났다. 불교에서는 그걸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표현한다. ‘없음(空)’이 ‘있음(色)’이 되는 일이다. 이게 바로 ‘창조’다. 그런데 ‘공즉시색’만 이야기하면 ‘절반의 완성’에 불과하다. 왜 그럴까. 나머지 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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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계신 하느님’에게서 빛과 어둠이 나왔다. 해와 달도 나왔다. 온우주가 그렇게 생겨났다.

사람은 숨을 내뱉기만 해선 살 수가 없다. 들이마시기도 해야 한다. 날숨과 들숨이 교대로 오갈 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럼 왜 하느님은 ‘안식일’을 강조했을까. 예수는 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며 ‘아나파우소(안식)’를 강조했을까. 구약성경에는 왜 “이날(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고 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신의 속성’을 닮게 했다. 하늘과 땅을 만들던 하느님의 창조성이 우리 안에도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각자의 하루를 돌아보자.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생각을 창조하고, 감정을 창조하고, 아이디어와 통찰을 창조했나. 이 모든 일이 어째서 가능할까. 하느님의 창조성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의 속성’의 사용법을 잘 모른다. 늘 엉뚱하게 사용해서 오히려 짐을 만든다. 그런 짐들이 쌓이고 쌓여서 예수가 설한 ‘무거운 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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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산의 교회 창문을 통해 바라본 예루살렘 성전.

예수는 그 짐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게 ‘포맷’이다. 아침에 냈던 화를 포맷하고, 점심때 떠오른 슬픔을 포맷하고, 저녁때 만난 ‘죽일 놈’을 포맷 한다. 6일간 창조한 그 모든 감정과 생각과 집착을 7일째 포맷 하는 거다. 그게 ‘안식일’에 담긴 깊은 뜻이 아닐까. 그 모두를 포맷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속성’으로 돌아가니까 말이다.

구약에서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정한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거룩함’이 뭔가. ‘신의 속성’이 거룩함이다. 안식일은 포맷을 통해 신의 속성,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게 ‘거룩한 날’이 아닐까. 그럼 “자손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라”는 무슨 뜻일까. 자손 대대로 ‘신의 속성’을 기억하고, ‘신의 속성’으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된다.

2000년 전 예수를 ‘사형감’이라 생각했던 유대인들도 이 대목을 놓치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안식일’에 담긴 진정한 뜻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예수를 단죄하는 대신 자신에게 되묻지 않았을까. ‘나는 안식일을 지켰는가. 안식일을 통해 지난 1주일을 포맷했던가. 그런 포맷을 통해 하느님 안으로, 신의 속성 속으로 거했던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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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묘’에서 정통파 유대교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안식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 안식일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탈출기 31장17~18절)

7일째 되는 날, 하느님은 ‘쉬면서 숨을 돌렸’다. 바깥으로 향하던 숨을 안으로 되돌렸다. ‘창조의 숨’에서 ‘포맷의 숨’으로. 날숨에서 들숨으로. ‘쉬면서 숨을 돌리다’는 구절은 영어로 ‘he ceased and was refreshed’다. 거기에 ‘안식’이 있다.

숨을 내뱉는 게 창조다. 하느님이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자연을 만든 게 ‘날숨’이다. 숨을 내뱉은 다음에는 다시 들이마셔야 한다. 왜 그럴까. 그래야 다시 내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2, 제3, 제4의 창조가 이어진다. 그게 신의 속성에 깃든 ‘무한 창조성’이다. 안식은 그저 쉬는 게 아니다.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 ‘제2의 천지창조’를 준비하는 일이다. 제2, 제3의 천지창조가 뭘까. 다름 아닌 우리가 맞게 될 내일, 모레, 글피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루’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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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베드로는 닭 울기 전 세 번 예수를 부인했다. ‘안식’이 없는 안식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신의 속성’의 반대쪽으로만 내달리는 일이 아닐까.

‘안식일’은 두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율법의 장벽이고, 또 하나는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창구다. 나는 어느 쪽을 택하고 있을까. 유대인 마을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도 2000년 전 유대인처럼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건 아닐까. 주일을 지켰느냐, 교회에 출석을 했느냐만 따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걸로 ‘사형감’이라며 상대를 정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 1주일 동안 내가 창조한 온갖 감정과 집착에 대한 포맷 작업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안식’이 빠진 ‘안식일’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예수’를 다시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14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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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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