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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소신은 주장하는 것이지 우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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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소신을 지키는 모습은 언제 봐도 멋있다. 특히 유시진 대위가 그럴 때는 더 멋있다. 지난 8주 동안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의 주인공 유 대위는 항상 소신을 지키는 멋진 군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드라마 초기에 긴급 수술이 필요한 중동의 VIP가 부대로 호송됐을 때 외국 의사가 수술하면 안 된다는 경호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 대위는 수술하지 말라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그 경호원들에게 총까지 겨누면서 수술을 강행한다. 당연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죽을 뻔한 VIP도 살았고 결국 외교에도 도움이 됐단다.

설마 그 VIP가 수술 도중 죽고 외교적으로 난리가 나고 나머지 드라마의 대부분을 유 대위가 감옥에서 지내는 얘기로 채울 만큼 간 큰 드라마 작가와 PD는 없을 거다. 빤히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알고 보는데도 심장이 두근두근하는데, 모든 측면에서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위험 요소가 가득한 실제 상황이라면 유 대위의 소신 있는 행동은 칭찬받을 수 있을까? 유 대위가 지킨 소신은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소신, 아무리 이해하기 힘들어도 타인의 (외국인 의사를 거부하는)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는 소신과 같은 수많은 소신 중 하나다. 그래서 하나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소신들을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현실적으로 그리 멋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소신의 이중성은 한 사회의 리더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20대 총선에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선거 기간 중 자신의 소신대로, 때로는 그냥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이 당선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유권자들에게 약속했다. JTBC 뉴스에 따르면 국회의원이 공약한 서울의 신설 전철역만 60개, 5년 동안 창출할 일자리도 1100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손석희 앵커의 말대로 선거 몇 번만 하면 국민의 수보다 많은 일자리가 생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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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도 없지만 혹여 정치인들이 사기에 가까운 그 공약들을 모두 지킨다면 우리 사회는 쓸데없는 전철역·다리·공항 등 각종 전시성 행정에 거의 모든 예산을 낭비하면서 살게 될 거다. 그리고 서로 충돌하는 공약 간에 싸움질과 정치인들의 예산 쟁탈전, 그리고 지역이기주의만 보면서 살게 될 거다. 정치인의 공약은 국민에 대한 약속이기에 신중해야 하고 그 실현 여부는 반드시 평가받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자기 지역구를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가깝다.

오히려 정치인 스스로가 어느 정도 대국민 사기를 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경우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진짜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공약하고 지키려고 하는 정치인은 때로는 스스로에게도, 국민에게도 곤란하다. 미국의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버니 샌더스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사회주의자로 평가받는 그는 평생 동안 미국의 소득양극화와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1%가 아닌 99%를 위한 정책을 주장하며 살아왔다. 그의 소신은 항상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얘기한다.

그렇다면 전 세계 74억 인구 중 평균적으로 가장 부유하게 사는 3억의 미국인과 나머지 가난한 세계인의 소득양극화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야 그냥 미국의 한 정치인이고 대통령 후보지만, 만약 미국 대통령이 돼 세계의 질서를 바꿀 힘을 가지게 된다면 샌더스는 소신대로 미국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미국과 다른 전 세계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소신의 존엄성과 가치는 미국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확고한 소신에 찬 정치인들의 실패는 이미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정치인의 소신은 전반적인 방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 그 소신대로 모든 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도 서로 충돌하는 소신들이 공존하고 있듯이 우리 사회에는 서로 다른 소신을 가지고 사는 5000만 명이 존재하고 그들의 다양한 소신을 대변하기 위해 엄청난 세금을 쓰면서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의 수를 유지하고 있다. 20대 국회는 기가 막히게도 어느 소신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자신의 소신만을 주장해온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해 국민이 보낸 메시지는 명확하다. 동시에 다른 어떤 세력에게도 그들의 소신대로만 하지 말라고 만든 정치 구도다. 정치인의 역할은 소신을 주장하는 것이지 자기만 옳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다.

다시 ‘태양의 후예’로 돌아가 보자. 유시진 대위가 총을 겨눌 때 VIP 경호원이 외국인 의사의 수술을 거부해야 한다는 소신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면 아마 총격전 끝에 장렬히 전사하는 유 대위를 보게 됐을 것이다. 그 경호원이 자신의 소신을 포기했기에 유 대위의 소신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소신을 지키는 사람만큼이나 포기하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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