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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립] 82년 본고사 없애고 학력고사… 눈치작전·4당5락 신조어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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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서 기자

Special Knowledge<617> 대입제도 변천사 올해 11월에 치르는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A·B형 수준별 시험이 폐지됩니다. 처음으로 필수과목이 된 한국사는 응시하지 않으면 시험 자체가 무효가 됩니다. 또 내년에는 영어 과목이 절대평가로 바뀌죠. 해방 이후 우리 대학 입시제도는 변화를 거듭해왔습니다. 과연 우리 대입제도는 점점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대입제도의 변천사를 알아봤습니다.

| 정권 바뀔 때마다 틀 바뀌고
세부사항은 거의 매년 달라져


교육에 관한 정책 가운데 대입제도만큼 관심이 높고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도 드물다. 시행착오가 되풀이된다는 비판이 있어도 정권마다 대입제도의 틀을 바꿔왔고 세부사항은 거의 매년 바뀌었다. 이종승 충남대 명예교수(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는 “우리 대입제도의 특징은 사용 가능한 거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적용해봤고, 대학들은 다양한 입시제도의 시험 무대가 됐다는 것”이라며 “원칙이 없는 대입 정책은 졸속과 조령모개의 극치”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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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대학별 본고사
‘대학망국론’ 용어까지 등장
68년 대입자격 예비고사 도입


◆대학별 단독시험기(1945~68)

일제 치하 억눌렸던 교육열이 해방과 함께 팽창하면서 대학교육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정부는 대학설립기준(1946년)을 만들고 대학생 징집연기령(1950년)을 내리는 등 대학교육 확대를 위한 제도를 마련했고, 각 시도에서 대학설립 인가 요청이 문교부에 쇄도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대입제도는 미국식인 자유방임형에 가까웠다. 대학은 총장·학장이 정하는대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졌고 이에 따라 각 대학별 단독시험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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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대입연합고사 장면. [중앙포토]


그러나 일부 대학에서 부정입학이나 정원보다 많은 학생을 모집하는 등의 비리가 발생했다. 정부는 1954년 대입 자격을 부여하는 국가고사인 대입연합고사를 도입했다. 그러나 시험 문제가 유출되고 탈락자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각 대학 입학은 일체 자유경쟁에 맡겨라”고 지시했고 연합고사는 시행 1년 만에 폐지됐다.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대입에 국가의 개입이 거세졌다. 해방 이후 대학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대졸 고학력자가 취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반면 농촌은 쇠퇴하는 문제가 생겼다. 대학 입학 때문에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며 ‘대학망국론’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군사정부는 대학 입학자격을 제한하기 위한 국가고사를 신설해 1962학년도부터 시행했다. 국가고사는 합격자를 전체 대학 정원의 110%로 정했다. 그런데 합격자들이 상위권 대학에 지원하면서 중하위권 대학에서는 대거 정원 미달사태가 발생했다. 일부 사립대는 존립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국 국가고사는 준비 부족으로 시행 2년 만에 폐지되고 대입은 기존 대학별 단독시험체제로 돌아갔다.

대학별 시험은 대부분 국어·수학·영어·사회·과학을 필수과목으로 하는 본고사 방식이었다. 대학은 여기에 고교 내신성적과 신체검사 등을 반영해 선발했다. 일부 사립대학은 정원의 10% 정도를 내신성적만 반영해 무시험으로 선발했다. 그러나 무시험 전형은 권력층 자녀의 부정입학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대입 예비고사기(1969~81)

치열한 입시경쟁은 60년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대학을 뜻하는 ‘상아탑’은 ‘우골탑(牛骨塔)’으로 불렸다. 자녀를 대학에 보내려면 농가에서 소를 다 팔아야 하는 현실을 빗댄 말이었다. 대학 이전에 일류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과외가 성행했고 국민학생들이 입시준비에 골몰했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를 도입했다. 무시험제로 중학생이 대폭 늘어나자 이번에는 명문고 입학을 위한 입시전쟁이 벌어졌다. 과외는 물론 명문고 재수생도 증가했다. 이에 정부는 1974년부터 대도시 위주로 ‘고교 평준화’를 도입한다. 시험 대신 추첨으로 선발하면서 고교생 규모도 늘었다. 그러자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더욱 심화됐다. 입시경쟁 문제는 ‘국6병’에서 ‘중3병’, ‘고3병’으로 이어지며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정부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수험생에게만 대입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1968년 11월 대입 예비고사령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1969학년도부터 예비고사를 치르게 됐다. 예비고사는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실업(가정)의 6개 과목이었으며 4지 선다형 객관식으로 출제됐다. 예비고사를 통해 합격시키는 정원은 대입 정원의 150%였는데 점차 늘어나 나중에는 200%까지 합격시켰다.

예비고사는 1969~1972년에는 대학별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시험이었고 이후에는 예비고사 성적을 본고사와 함께 반영했다. 그러나 예비고사는 고교 교육을 입시과목 위주의 암기식 교육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 상위권 대학은 본고사를 굉장히 어렵게 출제해 사실상 과외를 받지 않고는 본고사를 치르기 어려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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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외 과열, 부정입학 부작용에
82년 학력고사+내신으로 개편
94년부터 SAT 본 딴 수능 시작


◆대입 학력고사기(1982~93)

‘예비고사+본고사’ 체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됐지만 과외 증가와 부정입학이라는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1980년 등장한 신군부는 국민적 관심사인 교육문제를 해결하겠다며 ‘7·30 교육개혁조치’를 발표했다. 과외를 금지하고 본고사를 폐지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에 따라 1982학년도부터 자격고사에 가까운 예비고사와 대학별 본고사는 폐지되고 선발고사 성격을 가진 학력고사가 시행된다.

이때부터 대입은 ‘학력고사+내신성적’을 기본틀로 했다. 보통 학력고사 성적 50% 이상, 내신성적 30% 이상을 반영했다. 먼저 학력고사를 치른 뒤 대학에 지원했는데(선시험 후지원) 이제까지 무제한으로 복수지원했던 것과 달리 전·후기 한 곳씩만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학력고사도 예비고사처럼 객관식 일변도로 출제돼 ‘암기식 학습’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또 내신 비중이 커지면서 일부 학교에서 내신 부풀리기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을 측정한다는 목표로 1986학년도부터 논술고사가 신설됐다. 그러나 논술은 시행 2년 만에 폐지된다. 논술 문제가 너무 어려워 사교육비를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비판이 나온데다 채점 결과에 대한 불신도 컸기 때문이다.

학력고사 시기 대입의 키워드 중 하나는 ‘눈치작전’이었다. 지원 횟수가 제한되자 대학 학과별 경쟁률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지원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논술 시행 시기에는 논술 성적을 가늠하기 어려워 더더욱 눈치작전이 성행했다.

눈치작전 등의 비교육적인 입시 흐름을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거셌다. 또 ‘4당5락’(4시간 자면 합격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라는 표어가 당연하게 여겨지고 사교육비가 증가하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정부는 1988학년도부터 ‘선시험 후지원’ 체제를 ‘선지원 후시험’ 체제로 바꿨다. 학력고사를 보기 전에 지원하는 대학을 먼저 정하기 때문에 눈치작전을 없앨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또 논술을 폐지한 대신 면접고사를 도입했고 학력고사 문제 일부를 주관식으로 출제했다.

그러나 선지원 후시험 체제는 수험생들의 입시 혼란을 가중시켰다. 특히 자기 시험 점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지원을 했기 때문에 우수 학생들이 상위권 대학에서 대거 탈락하는 등의 문제가 생겼다.

◆대학수학능력시험기(1994~현재)

김영삼 대통령 직속 기구인 교육개혁심의회는 1994년 대학교육 적성시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입시제도를 구상했다. 암기 위주의 학력고사를 개선하고 통합적 사고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시험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학업 적성검사인 SAT를 모델로 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그렇게 탄생했다.

수능 과목은 당초 언어·수리·사회탐구·과학탐구·외국어로 구성됐다. 시험 첫해인 1994년에는 전·후기로 나눠 연 2회 실시했다. 수험생은 1회만 응시하거나 2회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시험간 난이도 격차가 크다는 지적에 따라 1995년부터 현재까지는 연 1회 치르고 있다.

1996년까지는 수능과 대학별고사를 병행했다. 대학은 국·영·수를 제외한 영역에서 주관식 문제를 출제할 수 있었다. 1997년부터는 학생부의 영향력이 커졌고 대학별로 논술·면접·적성검사 등 다양한 전형방식을 도입했다.

특히 수시모집이 처음으로 등장해 정시모집 이외의 시기를 대학이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당시 수시모집은 재수생을 대상으로 했던 제도라 현재 수시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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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은 현재의 입시제도가 정착된 해다. 수능 성적 우수자를 먼저 뽑는 특차제도가 폐지됐고 수시모집이 본격화됐다. 원점수에 따른 서열화를 완화시키기 위해 수능 9등급제가 도입됐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능 성적을 반영하지 않고 학생부를 중심으로 선발하는 수시 전형이 등장한 해이기도 하다.

2005년부터는 수능이 선택형으로 바뀌어 선택한 과목만 치르게 됐다. 수시모집은 매년 비중이 확대돼 70%를 넘어섰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해 자기소개서나 추천서 등을 바탕으로 수험생의 자질을 보고 선발하는 제도가 확산됐다. 입학사정관제는 현재 ‘학생부종합전형’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입시에서 확대되고 있다.

남윤서 기자 nam.yoonse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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