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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눈앞에 '알파고'시대···생각 많은 은행원들

| 흔들리는 화이트칼라의 아이콘
하루 11시간 근무, 영업 압박 예사
진상 손님, 지점 축소 스트레스 커
“지점장 거친 뒤 55세 퇴직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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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대 1. 지난해 기업은행의 하반기 공채 경쟁률이다. 은행원은 취업준비생이 선망하는 ‘화이트칼라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은행원은 20년 뒤 인공지능(AI) 로봇이 대체할 확률이 96.8%인 직업이기도 하다(옥스퍼드·딜로이트 ‘미래직업 보고서’). 지점 축소, 희망퇴직 상시화, 인터넷전문은행 출범과 같은 변화는 이미 닥쳐왔다. 고연봉·안정성·복지혜택의 3박자를 갖춘 은행원이란 직업군이 흔들리고 있다. 4대 시중은행(KEB하나·국민·우리·신한) 직원 8명과 전직 국민은행 지점장 출신 4명을 인터뷰했다. 이 시대, 은행원 또는 은행원 출신으로 산다는 것은 어떠한가.

◆“실적압박에 지치지만 지점장까진 해야지”=입행 4년차 L행원은 오전 7시30분 영업점에 출근해 오후 8시쯤 퇴근한다. 긴 근무시간보다 그를 더 지치게 하는 건 영업 압박. 지난달 100좌 넘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할당이 떨어졌다. “2013년 주택종합청약저축 프로모션 때 힘들었는데, 그때의 배로 힘들다고 다들 아우성이에요.” 5년차 L대리는 친척·친구에게서 확보한 ISA 50좌를 일부러 조금씩 나눠 가입시키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걸릴까봐 눈치를 보고 있어요. 어차피 상반기 평가를 위해선 6월까지만 넣으면 돼요.” 실적에 대한 압박은 은행원이라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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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점 K차장(15년차)은 “몇 해 전 실적에서 직원 가족은 제외돼 더 힘들어졌다. ‘애 하나 더 낳으면 생큐다. 가족 등록 전에 실적 올리자’고 할 정도”라고 전했다. 은행원을 괴롭히는 또 다른 요인은 이른바 ‘진상 손님’. 지점에서 일하는 11년차 K과장은 “안정성은 개뿔. 창구에서 손님 상담 한번 해보시라”는 말로 어려움을 토로했다. 본점에서 일하는 S차장은 “지점에선 이상한 손님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며 “본점은 일이 많아서 9시 넘어 퇴근이 예사지만 진상 손님은 없어서 낫다”고 말했다.

성과와 상관없이 매년 연봉이 오르는 ‘호봉제’의 문제점엔 대체로 공감했다. 본점에서 근무 중인 K과장은 “잘한다고 더 받는 것도 없으니 보신주의가 당연하다. 가급적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최고”라고 지적했다. L대리는 “연봉 1억인데 무임승차하는 20년차 대리를 보면 ‘저 사람 때문에 옆에 있는 내가 힘들다’는 억울함이 든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라는 자조어린 목소리도 나왔다. “정부에서 자꾸 정해줘요. 일하기 편하죠. 은행이 여러 개 필요 없어요. 다 한국은행의 지점들이에요.”(지점 K과장)

은행원의 특이한 점은 A은행에서 B은행으로의 이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입행 20년이 넘은 K지점장은 “은행원은 전문성보다 조직 네트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직하면 기껏 쌓아놓은 네트워크가 무용지물이 되는데 옮길 이유가 없다. 본점의 L과장은 “은행은 스타플레이어보다는 충성도 높고 조직에 적응 잘하는 인재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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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 현직 은행원 8명 모두 가능하면 오래 은행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높은 연봉과 복지혜택을 생각하면 이만한 직업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나 유지될지에 대한 불안감이 한 편에 있다. “요즘엔 지점장까지 하고 55세에 희망퇴직하는 게 은행원들의 희망사항이죠. 그런데 지점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고. 동기들끼리 ‘우린 나가기 전에 지점장 한번 하기도 힘들다’고 걱정해요.”(본점 K차장) “은행원이란 직업이 앞으로 5년은 더 가겠지만 그 이후엔 어떻게 변할지 고민스러워요. 은행 수익도 떨어지고 핀테크가 파고 들 텐데. 우리가 원치 않아도 지금과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K지점장)

| 제2 인생 개척한 퇴직 은행원들
꼼꼼한 고객 관리 몸에 배
꽃집·커플매니저·인력파견업 …
“몸 쓰는 일이 성공 확률 높아”


◆“은행원이 경쟁력 없다고? 천만에”=3244명. 2010년 11월 국민은행은 금융권 사상 최대 규모의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그때 나간 지점장 중 제 2 인생을 개척한 네 명을 만났다. 이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은행에서 배운 일처리와 지점장 출신 타이틀이 주는 신뢰감은 큰 자산”이란 점이었다.

백태흠(58) 전 지점장은 5년째 비료판매 대리점 ‘늘푸른꿈’을 운영 중이다.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그가 경쟁을 뚫고 자리 잡은 데는 ‘은행원 스타일’ 영업이 주효했다. 다른 업자들이 장갑을 돌릴 때 그는 겨울엔 핫팩, 봄엔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사은품으로 제공했다.

한 딸기연구회가 워크숍을 가자 직접 찾아가 고기를 구워주고 술을 나눠 마셨다. “다들 놀라더라고요. 다른 비료업체는 워크숍 가면 돈과 맥주만 보내는데 저는 직접 가서 고기 구우니까요. 그렇게 3년쯤 하니까 마음을 얻었지요.” 백 전 지점장은 “은행원이 기술이 없어서 은퇴 뒤에 힘들다고 하는데 아니다. 은행원은 고객 관리에 있어선 누구보다 전문가”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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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용(62) 전 지점장은 인력파견업체 ‘한국주택E&C’의 대표다. 사업 기반을 닦기까지 시행착오도 있었다. 퇴직 뒤 아파트 담보대출을 받아 건설인력 업체를 차렸다가 직원이 2억원을 가지고 달아났다. 조급한 마음에 목돈이 드는 건설인력 일에 준비 없이 뛰어들었던 게 실패의 이유였다. “은행원들이 귀가 얇아서 덜컥 큰 돈을 투자하는데 그러면 얼마 못 갑니다. 돈이 아닌 몸을 쓰는 일을 해야 해요.” 지금의 인력파견업은 목돈 투자 없이 수수료를 받는 사업이다. 은행에서 쌓은 인맥으로 영업망을 뚫어가고 있다. “남의 밑에서 1~2년 일을 배운 뒤에 사업을 시작해도 늦지 않는다”고 그는 후배들에게 조언했다.
 
▶관련 기사
① 전·현직 직원이 말하는 조직문화
② 은행원 명퇴 바람…‘응팔’과 비교해보니

일산 덕이동 ‘삼화카페플라워’를 운영하는 정건삼(60) 전 지점장은 3년 차 꽃집 사장님이다. 지난해까지는 매출이 유지비를 충당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젠 본격적으로 소득이 생겨난다. 은행에서 밴 습관대로 꼼꼼하게 일하는 게 꽃집 운영에도 통한다. “꽃을 포장할 때 서툴지만 정성스럽게 하면 그게 마음에 들어서 단골이 되는 손님들이 있더라고요.” 그는 “순진한 은행원들은 바깥에 나오면 밥이다”라고 경고한다. “은행원들은 후배가 업무에 대해 물어보면 최대한 열심히 알려주지만, 밖에 나와보니 세상은 그 반대더라. 사회는 만만치 않다.”

커플매니저로 변신한 유선재(62·여) 전 지점장은 요즘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은행에서) 나와도 괜찮아. 할 일 많고 재미있어.” 그는 D결혼정보업체에서 풀타임 커플매니저로 1년간 일하다 퇴사해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한다. 매일 아침 출근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다. 그의 은행 지점장 경력을 신뢰하는 부유층 고객들이 주로 일을 맡긴다. 고객의 중요한 선택을 돕는다는 점에서 은행원과 통하는 일이다. 그는 “주간·월간·상반기 목표에 쫓기며 지내던 지점장 시절보다 지금이 내 인생의 전성기”라며 “조금만 내려놓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 자세한 내용은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1331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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