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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반백 년 간송에서의 삶,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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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간송미술관에 갈 땐 언제나 설렌다.
게서 겸재(謙齋), 단원(檀園), 혜원(蕙園)을 만났던 울림이 각인되어 있는 탓이다.

오고 가다 그곳을 지나칠 땐 한 사람의 형형한 눈빛이 스친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눈빛이다.
다섯 해 전 카메라로 전해져 오던 그 눈빛, 여태도 떠오른다.
“간송을 못 지키면 우리가 문화적 자존심을 포기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보여주던 그 눈빛이다.

그 눈빛으로 평생 그가 바라 본 것,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선물이었다.
해마다 봄·가을 선보였던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그의 눈에서 비롯되었다.
그 덕에 우리는 겸재(謙齋), 단원(檀園), 혜원(蕙園) 등을 만나는 안복(眼福)을 누렸다.

지난 4월 4일, 그를 다섯 해 만에 다시 만났다.
간송미술관과 50년, 그의 역사를 듣는 인터뷰였다.
간송미술관 입구부터 봄이 한창이었다.
숨을 돌리며 봄 경치를 둘러본 후 연구소로 들어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복을 입은 최완수 소장이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취재기자가 봄이 한창이라고 인사를 건네면서 입구에 만개한 분홍 꽃에 대해 물었다.
“살구꽃입니다. 그런데 백진달래는 못 보셨나?”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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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달래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분명 간송의 봄 경치를 둘러봤지만 보지 못했다.
몇 해 전부터 이 맘 때면 백진달래를 보러 오라던 친구가 있었다.
가겠노라 답하고선 한 번도 가지 못했었다.
오매불망했던 백진달래를 못보고 지나친 게다.
‘눈 뜬 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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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경기도 안산에 있는 강희안 고택에서 얻어와 심은 것인데 지금 활짝 폈지.”
(화품을 매기면서 백진달래를 5품, 홍진달래를 6품을 정했던 이가 바로 강희안이다.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이상희 저 참조)
그의 이야기와 표정에서 남다른 애정이 묻어났다.
백진달래, 하얀 한복의 최소장, 40년 지기다.
그 세월만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터뷰 중 취재기자가 사진 한 장을 꺼내 놓았다.
안경을 바꿔 끼며 사진을 본 최 소장이 “이 사진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냐?”며 놀라워 했다.
나 또한 그 사진을 보고 놀랐다.
사진 그 자체가 그의 역사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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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그였다.
빗자루를 들고 고서의 먼지를 털어 내는 모습,
수건을 두르고 마스크를 썼는데 눈만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눈만으로도 그의 꿈이 보였다.
그는 그렇게 시작했음이 읽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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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입고 있는 옷에 대해 취재 기자가 물었다.
그는 그것을 주저 없이 ‘우리옷’이라 답했다.
그러면서 옷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평생 입을 옷을 어머니께서 다해 놓고 돌아 가셨다. 손주 안겨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식이 해야 하는 도리는 하나도 못했는데…."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먼 곳을 응시했다.
눈시울에 물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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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내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그래서 내가 맘 놓고 불효한 게지. 책에서 부모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지는 배웠는데 제대로 못 모시고 살았잖아. 불효 이야기는 그만 하지. 평생 불효한 놈으로 찍히겠네.”

이성이 그리운 순간이 없었는지 취재기자가 물었다.
“결혼, 그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으면 했겠지. 내겐 공부가 제일 우선이었어. 우리 민족사관을 바로 세우는 게 시급했어.”

중국문화를 따르던 시기엔 소도 물소로 그려져 있다고 한탄했다.
진경산수에 와서야 ‘소가 비소로 우리가 소’가 되었다고 했다.
그것을 찾고 바로 세우는 일이 그의 소임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결혼도 마다하고, 불효를 알면서도 지금껏 우리 문화에 매달린 이유였다.

간송에서 반백 년, 그는 한 길만 걸어왔다.
그런 그가 말했다.
“이제야 뭘 모르는 지 알 것 같다.”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가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고 했다.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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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 40년 지기 백진달래와 마주했다.
스스로 서산마애불 닮았다고 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눈빛 또한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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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을 마무리하고 돌아서는 그의 등에 오죽(烏竹)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40년 지기 백진달래도 하늘거렸다.
해는 지고 길은 멀어도 언제나 가야 하는 길, 연구실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최완수 소장, 그의 삶이 그림이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오는 20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 6부:풍속인물화전- 일상, 꿈, 그리고 풍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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