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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피뢰침’ 삼아 영국 ‘낙뢰’ 피하다

미 100달러 지폐의 벤저민 프랭클린 초상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가장 받고 싶은 미국인 초상화는 벤저민 프랭클린일 듯싶다. 미국 100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226년 전인, 1790년 4월 17일에 사망한 프랭클린은 다양한 방면에서 여러 탁월한 업적이 있는데 대체로 전략적 원리를 십분 활용했다. 피뢰침의 발명과 미국-프랑스 동맹의 체결은 그 대표적 예다.


먼저 피뢰침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건물이 높아짐에 따라 벼락이 건물에 떨어지는 피해도 함께 늘었다. 1749년 프랭클린이 피뢰침의 원리를 처음 발표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뾰족한 부분에 벼락이 많이 떨어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구리선으로 땅속까지 연결된 피뢰침을 건물 위에 세워 낙뢰가 다른 곳에 피해를 주지 않고 피뢰침을 통해 땅속으로 흘러가도록 한 것이다. 프랭클린은 특허를 내지 않고 피뢰침을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공개했다. 전략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공익을 실천한 것이다.


피뢰침에서 수직으로 60°이하의 범위 내에 벼락이 떨어지게 되면 곧장 피뢰침으로 흘러가게 된다. 만일 피뢰침이 100m 상공에 있다면 직경 346m 내의 지점은 그 어떤 낙뢰로부터도 안전하다는 의미이다. 그 범위 내에 떨어질 벼락을 피뢰침으로 유도해 주변을 안전하게 하는 방식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격으로 피뢰침 주위가 오히려 안전한 셈이다. 전장에서 적이 계속 같은 곳을 겨냥하여 포를 쏘지 않는 한 적의 포탄이 이미 떨어진 곳은 안전하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이다. 피뢰침으로 낙뢰를 끌어오는 행위는 겉으로 위험해 보여도 오히려 안전을 위한 것이다.


 


희생양 내세워 여론 관심 돌리기 가능벼락의 발생을 막을 수 없을 때에는 피해가 가장 작은 곳에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 전략이다. 이런 방식은 벼락뿐 아니라 화재나 홍수 등 자연재해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 활용되고 있다. 희생양도 유사한 전략적 효과를 노린 것이다. 피뢰침에 연결된 땅속이 일종의 희생양인 셈이다. 인간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해 염소를 희생시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맞지 않다. 하지만 여론에서 유·무죄 뒤바꾸기는 몰라도 관심 돌리기는 가능하다. 비판 여론이 들끓다가도 더 큰 관심의 이슈가 등장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냥 넘어가는 때가 있다. 즉 비난이나 관심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미국의 단합을 강조하는 프랭클린의 만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 1754년 5월 9일자.


아프리카 초원에서 포식자는 초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추격하다가 사냥에 성공해야만 사냥을 멈춘다. 즉 사냥을 일단 멈추게 하려면 누군가가 잡혀야 한다. 초식동물의 입장에서는 동료 가운데 누군가가 희생되면 당분간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 묘한 상황이다. 이 점에서 보자면 포식자 대 초식동물의 경쟁이라기보다, 초식동물끼리의 경쟁이다. 동료보다 더 빠르면 살아남고 더 느리면 잡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진화했더라면 자신들끼리 뭉쳐서 포식자와 경쟁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동료 때문에 잡히는 경우도 있다. 잘 숨어있던 초식동물은 동료의 어설픈 행동으로 포식자의 눈에 띄어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주변 사람의 바이러스나 담배연기 등 각종 유해물질로 인해 건강이 손상되는 것처럼 화(禍)를 부르는 자의 옆에 있다가 화를 당하기도 한다.


피뢰침 설치에서 제일 중요한 작업은 접지다. 구리선을 주위와 절연(絶緣)하면서 땅속에 잘 묻어놔야 낙뢰 피해를 없앨 수 있지, 접지가 제대로 되지 않은 피뢰침은 낙뢰 피해 가능성을 오히려 키운다.


몸통과 희생양은 서로 붙어 있되 동시에 절연돼 있어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지만 언제든지 분리될 수 있는 깃털은 효과적인 희생양이다. 피뢰침과 가깝되 절연돼야만 낙뢰를 피할 수 있다는 피뢰침 원리와 유사한 것이다.


 


몸통서 뗄 수 있는 깃털은 효과적 희생양피뢰침과 같은 전략적 원리는 프랭클린의 외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776년 7월 미국 13개 주의 영국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했다. 미국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했는데, ‘프렌치 인디언 전쟁’ 즉 ‘7년 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뒤 만회를 노리던 프랑스가 최우선 섭외 대상이었다. 1776년 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미국 사절단의 대표가 바로 프랭클린이었다.


미국은 독립 전쟁 초기에 패배를 거듭했다.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고 싶었지만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프랑스 국민은 대체로 미국 독립에 호의적이었는데 프랑스 왕실은 덜 그랬다. 무엇보다도 미국이 영국 왕정 질서에 반기를 든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파리 도착 후 바로 프랑스 외무장관을 면담할 수 없었다. 미국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1777년 1월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그라비에 베르젠과의 첫 번째 비공식 면담에서 프랭클린 일행은 최혜국 통상조약을 제안했다. 외교와 통상은 독립국의 권한이기 때문에 통상조약의 체결은 곧 상대를 독립국으로 승인한다는 의미였다. 일주일 뒤 두 번째 면담에서 프랭클린 일행은 구체적인 내용을 추가했다. 프랑스가 미국에 무기를 제공해 대(對)영국 동맹을 결성하고 대신 미국은 서인도제도의 프랑스 식민지를 영국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오른쪽에서 셋째)이 보는 앞에서 프랑스의 알렉산더 제라르가 미국-프랑스 동맹 조약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찰스 밀스의 20세기 초 그림.


프랑스는 미국-영국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독립한 이후에 미국과 교류하는 것이 더 낫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미국 대표단은 프랑스의 지원 없이는 미국의 독립이 어렵고, 또 영국과의 전쟁에서 부담해야 할 프랑스의 비용보다 독립국 미국과의 통상에서 얻을 프랑스의 혜택이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만일 프랑스가 미국을 도와주지 않으면 미국은 영국에 더 이상 맞설 수 없어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영국은 식민지 미국의 풍부한 자원으로 프랑스를 더욱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비공식적으로 군수물자를 제공해주면서도 미국-프랑스 동맹의 공개적 체결에는 주저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은 미국을 도와주면 미국이 영국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전쟁 승리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동맹 체결을 주저했던 것이지, 내심으론 영국의 패배를 간절히 원했다. 프랭클린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프랑스가 절대 원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다만 미국-프랑스 동맹이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프랑스에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기대감은 그 해 9~10월의 새러토가 전투에서 미국이 영국에게 대승을 거두자 상승했다. 마침내 프랑스는 미국과의 동맹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영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 일행은 1년 동안 지지부진한 미국-프랑스 협상을 이제는 마무리해야 할 때라며, 프랑스의 비밀 지원을 모르는 미국 국민들은 영국과 타협하기를 원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의지를 바로 천명해야 한다고 프랑스를 설득했다.


 

하늘에서 전기를 끌어내는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웨스트의 1816년 그림). 프랭클린은 연줄에 금속 열쇠를 달아 폭풍우 속으로 연을 날린 뒤 열쇠에 튄 불꽃으로 번개가 일종의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연 실험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영국도 미국-프랑스의 관계 진전을 방치한 것은 아니다. 12월 15~16일 영국은 미국에 통상 및 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주겠다는 화평안을 제의했다. 1778년 1월 6일 프랭클린은 영국 대표 웬트워스와 회동했는데, 이 자리에서 웬트워스는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음을 재확인했다.


영국의 미국 독립 불가 입장을 알아채지 못한 프랑스는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허용하면서까지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설까 걱정했다. 미국이 영국에 우호적으로 기울게 되면 프랑스에게는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영국이 미국과 타협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1월 7일 프랑스 각료회의는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기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2월 6일 마침내 프랑스 외무성에서 미국 대표 벤저민 프랭클린과 프랑스 대표 알렉산더 제라르가 미국-프랑스 동맹 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와도 싸우게 되었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이 미국-프랑스 동맹군에 패배하면서 미국은 마침내 독립을 이뤘다.


야권 분열은 여권 공천파동 부른 피뢰침미국 독립 전쟁의 참전으로 프랑스는 재정적자가 심화됐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생해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2월 프랑스 혁명정부가 영국에 선전포고 하자 4월에 그 소식을 들은 미국은 5월에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으로 미국의 중립을 선언했다. 이로써 미국-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폐지됐다. 미국-프랑스 동맹을 주도한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의 이름만이 버몬트 주 한 도시의 이름으로 명명돼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영국과 숙적관계인 프랑스를 활용했다. 이른바 ‘적의 적’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념적으로 보자면 미국-프랑스 동맹을 체결한 루이 16세의 프랑스는 영국과 훨씬 가까웠지 미국과는 이질적인 체제였다. 이념의 유사성보다 국가의 경쟁관계가 미국·영국·프랑스 간의 우적(友敵)관계를 좌우한 것이었다.


프랭클린은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의 의도를 간파했고 그 성공 가능성을 프랑스에 확신시켜 미국-프랑스 동맹을 성사시켰다. 전쟁이나 협상 모두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인 경우가 많다. 미국 독립에 위협적인 영국이라는 낙뢰를 피하기 위해선 피뢰침이 필요했는데 프랑스가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런 전략적 사고로 미국은 시장과 민주주의에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이번 총선에서 야권 분열은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을 가져와 결국 여소야대를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야권엔 일종의 피뢰침이었다. 새누리당은 토끼 사냥이 끝나기도 전에 사냥개를 잡은 격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각종 재난과 북한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 안전 위협에 대한 대응에서 전략적 사고와 접근은 필수적이다. 20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와 대북 문제 등 현안을 남겨놓은 지금, 융합적이고 전략적인 지혜가 안팎으로 더욱 요구되고 있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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