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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 구체제 마지막 선거, 다음 총선은 신체제로”

4·13 총선이 끝난 14일 가회동주민센터 공무원들이 서울 종로구 북촌 일대에서 선거벽보를 철거하고 있다. [뉴시스]


국가에 대한 비전 없이 여론조사에만 일희일비하는 정치, 선거 막판 텃밭을 찾아가 “한 번만 더 도와달라”며 읍소하는 지역 분할의 정치, 우리 편은 모두 살리고 비판세력에겐 공천조차 줄 수 없다는 패거리 독점의 정치…. 4·13 총선에서 국민으로부터 심판받은 한국 정치의 모습들이다. ‘유권자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치 현실’에 근본적인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는 논의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붙고 있다. 4·13 총선을 관전한 우리 사회의 석학들은 “올해로 30년을 맞은 1987년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며 중앙SUNDAY에 그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은 석학 6인의 제언을 요약한 것이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의 ‘대통령 중임제론’“한국 정치가 문제가 많다는 데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 모두 공감한다. 그러나 구체적 개혁방안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얘기 안 한다. 87년 체제는 4·13 총선 이전에 이미 끝났다. 이번 선거 결과로 더 뚜렷해진 것일 뿐이다. 한 세대 30년에 걸친 실험은 이제 실패했다. 더 이상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안 되겠다. 87년 체제는 권위주의 체제의 전환이 중요 과제였다 보니 대통령 단임제와 직선제에 중점을 뒀다. 당시 3김(金)씨는 모두 집권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 집권은 안 된다는 컨센서스가 있었다. 이는 국민이 동의하기도 한 사안이었다. 일단 큰 성공이었고 외국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를 성공 사례로 거론했다. 그게 전부였다. 정치권이나 국민 모두 직선제·단임제로 개헌만 하면 다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민주주의에서 그 나머지를 채우는 데는 신경 쓰지 못했다. 87년 이후 국가 운영이란 측면에서 사실상 연속성이 없다. 같은 당 소속이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책을 모두 계승하진 않았다. ‘단임제에선 세종대왕도 훈민정음을 못 만든다’는 농담이 있다. 길게 보고 정책을 펴기 위해선 중임제가 필수다.


세종대왕의 예를 다시 들어 보자. 그의 큰 업적으론 한글 창제 외 공법(貢法·조세제도) 개정이 꼽힌다. 공정한 조세제도로 고치는 데 14년이 걸렸다. 집현전의 똑똑한 신진학자들이 동원됐고 고관부터 농민에 이르기까지 17만 명에게 설문조사도 했다. 시행하면서 잘못된 걸 발견하면 시정했다. 세종대왕의 공법 개정 때문에 조선왕조가 500년이 지속됐다는 학설도 있다. 한국 국회는 87년 체제가 탄생된 직후인 13대 이후 조금씩 내리막길을 걸었다. 87년 체제를 뒷받침한 3김의 리더십이 점점 사라지면서다. 20대 총선으로 탄생한 3당 체제와 여소야대는 어떻게 보면 기회다. 박 대통령의 경제입법은 현 상태에서 밀어붙이는 게 쉽진 않다. 경제입법이 박근혜 정부의 중점 정책이었더라면 임기 초반에 만들었어야 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개헌을 먼저 얘기해야 한다.”


최장집 교수의 ‘선거법 개정론’“87년 민주화 이후 지속된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제 종결 지점에 이른 것 같다. 경제성장·복지·분배 등 한국 사회에서 새롭게 제시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다. 여당과 야당은 권력을 놓고 경쟁을 벌였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선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민생(民生)’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뭉뚱그렸을 뿐 구체적 현황과 개선방법에 대해선 말이 없다. 뭐가 문제인지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게 한국 정치다.


어떻게 고쳐야 할까. 개헌은 필요 없다. 당장 선거법·정당법·정치자금법을 약간만 손보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지금의 법체계에선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다. 문턱(threshold)이 높아서다. 독일의 정당명부제와 같은 제도는 좋은 대안이다. 새로운 사회적 이슈는 다른 사람보다는 그 이슈와 관련된 세력이나 당사자가 제기하는 게 좋다. 그들이 결사체를 통해 이슈와 대안을 조직화하고 정치권에 입력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는 게 좋다. 그것이 정책선거고 민주주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엔 그 문이 닫혀 있다. 한국 정치에서 타협과 합의를 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윤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경쟁과 권력 투쟁만 있을 뿐이다. 장기적 비전을 갖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전체 공익의 관점에서 타협하고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정당 간 경쟁이 전체 공익에 기여해야 한다. 그래야 합의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은 사회 부문과의 접맥이 잘 안 돼 있고(연대가 약하다는 의미), 사회적 기반도 약하다. 그래서 여론에 휘둘리게 되고 선거마다 사회의 명사나 엘리트를 후보로 영입한다. 20대 총선은 구체제의 마지막 선거가 되고, 21대 총선은 신체제의 첫 선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조순 전 부총리의 ‘책임지는 내각제론’“이번 선거로 정치의 실정, 경제의 실정, 사회의 실정, 교육의 실정이 많이 표출됐다. 이런 문제들은 여야를 초월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가 지금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을까. 경제만 놓고 보자. 지금 한국 정치의 수준으로는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국회의원 당선자는 모두가 좀 더 멀리 내다보고, 넓게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이 안 보여 걱정이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20대 국회에선 말만 하지 말고 실천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의 체제는 대통령이나 국회 어느 누구든 국정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통령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혹시 ‘내가 잘하려고 했는데 국회가 잘못해 일이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을 가졌는지 모르겠다. 이런 체제론 문제 해결이 어렵다. 의원내각제가 대안이다. 의원내각제는 책임자가 확실하다. 수상이나 총리가 모든 책임을 지면서 그 대신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김우창 교수의 ‘협치론’“선거 전 많은 사람이 국민이 정치에 등을 돌렸다고 얘기했다. 높은 투표율을 보니 아직도 우리 국민은 정치에 관심이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투표로 나타난 국민의 목소리는 하나다. ‘앞으로 정치권이 더 싸우지 말라’는 뜻이다. 현명하게 표를 나눠 줘 정당 간 타협을 통해 국정이 운영되기를 주문한 것이다. 총선의 결과는 3당체제가 아니다. 정의당을 포함, 4개의 주요 정당이 국민의 지지를 고루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구도를 국민이 절묘하게 만들어 줬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을 끌고 나가기 어렵게 됐다. 그러나 정책적 차이를 놓고 본다면 여당과 야당은 두드러진 차이가 없다. 일반적으로 우파와 좌파는 모두 빈부 격차가 줄고 평등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국가의 안전을 고려해 필요한 환경이기 때문이다. 체제와 사회질서를 지키기 위해선 사회복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이 온건하게 나가면 야당의 협조를 얻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야당의 의견도 참고하면서 국정을 운영해 나가길 바란다. 정치를 제외한 사회 각 부문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정치권에) ‘협력’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권이 말을 듣는다. 이제 세상을 더 이상 민주와 반민주로 나눠서 보지 말았으면 한다. 민주적 질서가 기본적으로 잡혔으니 이제 정치권은 현실적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말자.”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전면적 개헌론’“우리 국민은 투표를 통해 여야 모두에 단합하고 협력하라고 주문했다. 3당체제와 여소야대는 새로운 시험대다. 과연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까. 한편으론 잘해 낼 것이란 기대도 들지만 또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정부와 의회가 충돌하면 국정 운영이 어려워진다.


국정 운영이 계속 어려워지면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크게 봐선 개헌을 해야 한다. 물론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한다. 개헌을 당장 하는가 나중에 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다. 현행 헌법이 87년 개정된 뒤 시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기본권 조항부터 권력구조까지 보완해야 할 게 많다. 기본권만 보면 환경, 기후변화, 정보화시대 이행, 난민 문제, 생명윤리 등을 추가해야 한다. 전면적인 개헌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논의는 많이 있어 왔지만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된 적은 없다.”


김병준 교수의 ‘분권론’“이번 총선으로 87년 체제를 변화시킬 문이 조금 열렸다. 3당체제가 그 하나다. 그런데 정치인 가운데 옛날로 되돌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정치권 외곽이 정치권의 변화를 주동해야 한다. 자극도 주고 주문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판이 짜이면서 신질서가 나와야 87년 체제가 극복된다.


87년 체제의 대안은 권력의 분산과 분권이다. 대통령과 국회의 권한이 너무 세다. 이해관계자가 기구를 만들어 대안을 모색한 뒤 타협을 하면 국회는 손만 들어 주면 된다. 항공이나 우주 같은 전문 분야는 전문가위원회가 현안을 결정하면 된다. 국가적 어젠다 기획과 개혁은 소위 현자(wise men) 위원회에서 다루고, 거기에서 나온 것을 국회에서 2차적으로 검토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의 국회의원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것을 쥐고 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지방자치단체에 중앙정부 기능을 분산하자. 교육자치와 자치경찰을 떼어 주자. 인사권도 지방에 주자. 제주도에선 외국인 부지사를 둘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야만 대통령과 국회의 부담이 줄어 제대로 일할 수 있다. 대통령이 전봇대를 뽑고 파출소를 세우는 것까지 결정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정당 간 생산적인 정책 경쟁이 일어나려면 한국에서도 다당제가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중선거구제나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해야 한다. 소선거구제 아래에선 국회의원과 구의원 간 공약이 다를 바 없다. 전면적인 국가 리엔지니어링을 할 때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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