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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곁에서 비로소 진짜 ‘나’일 수 있다

애니 프루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표정에 깜짝 놀란 적이 있는지. 훌쩍 늘어난 잔주름 같은 외적인 요소 탓이 아니라, 어두운 표정과 공격적인 분위기 때문에 말이다. 내 얼굴이 이렇게 무서웠다니. 제 얼굴에 제가 놀라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기도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시간에 자신의 그림자와 덜컥 맞닥뜨린 것이다. 모든 페르소나가 벗겨진, 형식적인 미소조차 사라진 이 ‘그림자 얼굴’은 정말 아무에게도 보여 주기가 싫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이 얼굴을 보여주면 경계심을 느낄 것 같다.


나도 내 그림자를 껴안기가 이토록 어려운데, 상대방의 그림자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겨운 일인가. 그러니 내 어두운 그림자까지 보살펴 주는 사람, 내 슬픈 그림자까지 보듬어 주는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의 단편소설 『브로크백 마운틴』을 다시 읽었다. 내 그림자까지 사랑해 주는 사람을 떠올리며 읽어 보니, 이 소설은 단순히 동성애를 그린 작품이 아니었다. 이 소설의 진짜 테마는 ‘동성애’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나를 잘 알아주는 사람’을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벌거벗은 마음이라고 믿는다.


애니스와 잭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완전히 분리된 실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애니스는 여성을 사랑할 때나 남성을 사랑할 때나 애니스 자신이다. 사회적 관습으로 인해 동성애가 ‘일탈’로 느껴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이지 잭이 ‘남자이기 때문에’ 더 끌리는 것은 아니다. 애니스는 말한다. “나는 여자와 자는 것도 좋아해.” 그렇다고 잭과 애니스가 양성애자라고 할 수도 없다. 두 사람이 살며 사랑하며 느끼는 진짜 감정은 인연의 끝없는 무상성(無常性)이지 동성애·양성애· 이성애의 구분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사후적인 감별장치일 뿐인 것이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성애와 동성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성 역할을 반복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만들어 간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마음속으로는 동성에게 이끌린다고 해도 그것이 금지된 행위임을 알기에, 사회적으로는 이성애적인 몸짓을 연기함으로써 ‘반복되는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을 이성애자로 각인시키는 것이 바로 ‘이성애적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애니스와 잭은 시골 농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이었다. 이 얼마나 남성적인 직업인가. 하지만 그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 고립된 농장에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 가며 양 떼들을 지켜야 했고, 둘에게는 오직 ‘서로’밖에 없었다. 그들이 엄청난 고통을 참아가며 지키려 한 것은 단지 양 떼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들어진 정체성, 즉 ‘남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이다. 고립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던 두 사람은 마침내 몸과 마음 모두 ‘하나’가 된다. 두 사람은 각자 연인이나 아내가 생긴 이후에도 서로를 잊지 못해 1년에 한두 번씩 낚시여행을 핑계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만남을 계속한다.


잭과 애니스의 일상은 고단하고 팍팍하다. 일자리를 구걸하다시피 해야 하고, 가족과는 불화하며 살림은 쪼들린다. ‘가족’과 ‘도시’에 둘러싸인 그들은 자주 우울하고 피곤하다. 하지만 잭과 애니스가 마치 야반도주하듯 떠나는 장소는 옛날 옛적 그 ‘잊을 수 없는 밤’이 존재하던 브로크백마운틴을 닮은 곳들이다. 그것은 분명 일탈이고 탈주였지만 ‘본래 나 자신과 가장 가까워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함께 있으면 그들은 서로를 속이지 않았다. 어떤 연기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림자를 숨기기는커녕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서로를 할퀴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발가벗고 뛰놀면서 그들은 비로소 어떤 가면도 쓰지 않은 진짜 자신과 만났다. 당신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진짜 나’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극히 규범적인 남성상을 지니고 있었고 어쩌면 ‘그날 밤 그 상황’이 아니었다면 평생 서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대한 농장의 밤, 완전히 고립되어 버린 두 사람은 곁에 있는 단 하나의 ‘사람’에게 이끌린다.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의 몸짓을 끝내고 나서도 이렇게 말한다. “나는 퀴어(queer)가 아니야.” “나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통념 속에 자신들을 가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안 감독에게 아카데미감독상을 안겨 준 영화 ‘브로크백마운틴’에서는 어여쁜 미소년처럼 등장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원작소설에서는 매우 거칠고 마초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성’도 어쩌면 상황에 따라서는 운명처럼, 벼락처럼,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성도 어쩌면 운명처럼 …앞서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의 성적 정체성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항상 만들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성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의 성격과 주체성에 대한 인식 또한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매일 조금씩 빚어지고, 구부러지고, 펼쳐지고, 촉촉해지고, 바스러져 가는 것을 느낀다. 그건 내가 늙어 간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의 정체성이 매일매일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동안의 콤플렉스에서 점점 더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기이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내가 매일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어제의 결핍, 오래전의 슬픔,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규정’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어디 출신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내 가정환경이 어떤지에 대해서도 나는 ‘결정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매일 내가 나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때로는 기쁜 마음으로 타인의 영향 속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오래전부터 길들어 버린 정체성으로 인해 나를 속박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들에게 브로크백마운틴에서 보낸 그 ‘단 한 번뿐인 추억’은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평소의 나, 길들어진 나, 사회가 만들어 낸 나로부터 벗어나는 날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던 그 시간. ‘사회’ 속에 속한 것이 아닌 것 같은 원시와 야생의 시간. 이것은 ‘너를 사랑해’라는 비좁은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다. 동성애라는 단어로도 규정되지 않는 세계다. 나를 벗어나는 시간, ‘나답다’고 규정된 시간을 벗어나는 시간. 시공간의 현실감 자체를 벗어나 버리는 시간. 온갖 초자아의 명령들과 에고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 당신의 그림자를 껴안아 마침내 내가 당신의 그림자로 거듭나는, 눈부신 부활의 순간이다. ●


 


 


정여울 ?작가, 문학평론가. 문학과 삶, 여행과 감성에 관한 글을?쓴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그때 알았더라면?좋았을 것들』『헤세로 가는 길』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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