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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움켜쥐다

일러스트 김옥


야마다 에이미의 단편집 『솔뮤직 러버스 온리』를 읽었다. 여자들 모두가 가지고 싶어했던 남자 대신 안식을 주는 남편을 선택한 여자의 이야기(‘What’s going on’), 여자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그녀를 안지 않는 어린 연인에 대한 이야기(‘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와 영화 ‘졸업’의 주인공처럼 연상의 미세스 존스에게 사랑과 이별을 배운 어느 고등학생의 이야기(‘Me and mrs, jones’), 죽은 옛 애인을 잊지 못해 친구의 애인을 가지고 싶어하는 남자의 이야기(‘Feel the fire’)의 제목은 모두 1960년대와 70년대를 풍미한 솔뮤직이다. 마빈 게이, 퍼시 슬레이지, 빌리 폴, 밥 제임스의 노래들 말이다. 소설의 배경 또한 이런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의 ‘바’이고, 주인공들은 그곳에서 만나 함께 춤을 추며 서로 사랑을 나누거나 이별을 선포한다.


야마다 에이미는 “남자를 사랑하면 60매짜리 단편 하나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설에는 모두 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8명의 남자, 8번의 사랑인 셈이다. 『애너멜 로직』,『솔뮤직 러버스 온리』,『공주님』같은 연애 소설을 쓴 그녀는 대학을 중퇴하고 호스티스로, 누드모델로 일했다. 이후 흑인 남성과 결혼했고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제멋대로 헤프게’ 살면서 연애의 추억을 슈퍼 킹사이즈 침대 같은 원고지 가득 적었다. 실제 경험을 소설로 쓰는 것으로 유명한 아니 에르노처럼 말이다. 『솔뮤직 러버스 온리』를 읽으며 나는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을 떠올렸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불가피한 사랑에 빠지지만 대하는 자세는 조금 다르다. 아니 에르노의 주인공이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라고 고백한다면, 야마다 에이미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운다는 걸 안다고 ‘말하는’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상처의 객관화. 그녀의 소설 『120% COOL』의 뜻은 그렇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세상의 관념을 가볍게 초월하는 사람들나는 자신만의 도덕률을 가진 사람들, 세상이 ‘부도덕함’이라고 진단한 관념을 가볍게 초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이 갔다(타인의 감정을 쉽게 착취하는 죄책감 없는 소시오패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애써 경계를 넘어서겠다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다(어떻게 보면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타인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실제 세상이 요구하는 수많은 경계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해체시킨다. 자유롭다는 건 결국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므로 자신의 결정에 따른 고난 역시 회피하지 않고 끌어안는다. 인간이 결국 죽는다는 걸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 특유의 강렬한 현실감각이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야마다 에이미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에게는 제아무리 격렬한 사랑이라도 그것이 ‘지나가는 감정’이며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 특유의 차가움이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소설은 사랑이 찾아온 순간 열정을 폭발시켜야 한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들의 선언문처럼 읽힌다. ‘지금 이 순간’ 속에 들어가기 위해 상대의 결핍 안에 제 몸을 깊숙이 밀어 넣고, 격렬하게 핥고, 아프게 물며, 흡혈하듯 빨며, 피가 날 정도로 할퀸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상대의 몸을 움켜잡는 것이다. 어릴 적 미처 해결하지 못한 구순기적 욕망은 그렇게 연인 앞에서 폭발한다.


마음이 건조한 어느 날엔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을 읽는다. 그녀에겐 “나에 관해 정통한 건 그녀뿐이다. 그녀는 나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해 정통할 수 있는 거다”라는 건조한 문장을 쓰면서, 동시에 쾌락이 얼마나 축축한 것인지 알고 있는 여자 특유의 포즈가 있다. 나는 야마다 에이미를 언제나 ‘연애적 인간’으로 분류했다. 이제 나는 열정 없는 삶이 얼핏 순해 보인단 걸 알만한 시간에 도달했다. 하지만 시간을 초월한 열정이 아직 살아 꿈틀대는 부류와 마주칠 때면,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궁금한 건 그런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번지는 눈빛들이다. 그때의 나는 눈빛 수집가가 된다.


시간을 초월한 열정이 살아 꿈틀댈 때“그는 내 몸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얼굴을 붉혔다. 마이크조차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나의 몸 구석구석을 어떻게 그가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을까.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때와 같은 구체적인 쾌락을 처음 보는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맛보았다는 사실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아픈 마음을 한껏 어루만져 주었던 그의 달콤한 속삭임. 그는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나 요설적인 남자를 보지 못했다. 나를 향한 너무도 자연스러운 말들. 나는 단 한 번의 섹스로 그의 출신과 취미, 가족이나 친구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그가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까지.” - 야마다 에이미『솔뮤직 러버스 온리』단편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중


이 단편을 읽던 밤, 엽서 한 장을 받았다. 엽서를 보낸 남자는 먼 나라를 여행 중이었다. 괴발개발 쓴 남자의 엽서에는 기차에 노트북을 두고 내렸고, 비누가 없어 샴푸로 몸을 닦았다가 온몸에 두드러기가(특히 중요 부위에!) 났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파리 우체국 소인이 찍힌 엽서를 바라보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건축법상의 일조권 제한선이나 사선 제한 때문에 형태가 괴상하게 일그러진 건물에서 사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 남자가 사는 8층 건물에는 5층이 없다. 사선 제한 때문에 건물이 깎이며 5층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남자는 일조권 제한선 때문에 건물이 깎이며 불가피하게 생긴 괴상한 형태의 테라스를 얻었다. 그는 그곳을 ‘그늘’이라고 불렀다.


내게 건축법상의 ‘사선 제한’은 ‘접근 제한’으로 읽혔다. ‘일조권 제한선’은 남편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마음의 영역처럼 보였다. 건축가인 남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건물이 실은 자신의 내면 풍경이라는 걸 깨닫는다. 건물의 이름을 ‘그늘’이라 짓는 순간 그는 흡혈귀처럼 밤에만 활동하는 반쪽 자리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사랑을 하고 난 후에도 한 번 더 사랑하고 싶다는 이유로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어린 남자, 남편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더 많이 사정하는 것으로 여자에게 자기 사랑을 증명하려 드는 젊은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쓰던 밤, 나는 새벽 5시 즈음의 여명을 보았다. 엽서에 답장을 쓰는 대신, 하룻밤 사이 원고지 80매 분량의 단편을 쓴 것이다. 남자의 글씨체를 닮아 보나마나 개발새발일 초고를 프린트해 서랍 깊숙이 넣어 두었다. 야마다 에이미 식으로 말하자면 그랬다. 한 명의 남자, 한 번의 사랑.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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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