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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기억하는 세상, 사랑받는 4등을 위하여

영화 ‘4등’에서 코치 광수는 “때리는 선생이 진짜 스승”이라며 준호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가한다. 맞는 게 싫어 도망친 사람이 다시 폭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이다. [사진 워너비 펀]


“나 4등 했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 혹은 당신이 그 말을 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몇 명 중에서 4등인가가 중요하겠죠. 4명 중에 4등이면 꼴찌고, 수백 명 중에 4등을 했다면 굉장한 겁니다. 그래서 ‘4등’이란 말은 뿌듯함과 아쉬움이 섞인, 진폭이 매우 큰 표현입니다.


그런데 스포츠 세계에선 얘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에서는 “4등이나 꼴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메달권 밖’ ‘순위권 밖’이란 뜻입니다. “잘 했어. 다음엔 꼭 메달 따자”라는 영혼 없는 격려만 남습니다. 상금도, 연금도, 병역 혜택도 먼 나라 이야깁니다. 그래서 4등은 손에 잡았다 놓친 메달, 다른 사람 목에 걸려 있는 메달을 보며 자책하고 또 자책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영에 꽤 소질이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준호가 있습니다. 근데 대회만 나가면 매번 4등만 합니다. 엄마는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코치를 소개받아 개인교습을 시킵니다. 준호는 몇 달 뒤 수영대회에 나가 ‘거의 1등’인 2등을 합니다. 집에서 축하 파티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철없는 동생의 한 마디가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정말 맞고 하니까 잘 한 거야? 전에는 안 맞아서 맨날 4등 했던 거야, 형?”


준호의 온 몸은 멍투성이였습니다. 준호는 안 맞고도 수영을 잘 하고 싶어합니다. 지난 13일 개봉한 영화 '4등'의 줄거리입니다.


 


살벌한 경쟁이 가해자 겸 피해자 만들어'4등'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열두 번째 인권 영화입니다. 총 제작비 6억 원을 들인 저예산 영화입니다. '해피 엔드''은교' 등을 만든 정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정 감독은 시대의 통념과 금기를 건드리되, 밀도 높은 드라마와 절제된 영상미를 놓치지 않는 명장입니다. 지난 1일 언론 시사회를 마친 뒤 정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 폭력의 문제를 스포츠라는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었다. 우리는 물리적인 가해자만 비난하지만 따져보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다 그렇다. 모두들 결함과 문제를 갖고 있는데 악하거나 나빠서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살벌한 경쟁이 그렇게 만든 측면이 있다.”


수영 코치로 나오는 광수(박해준)도 그렇습니다. 그는 밤새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연습 때 아시아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뛰어난 ‘수영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대표팀 감독에게 몽둥이로 맞다가 “수영 안 해”라며 태릉선수촌을 뛰쳐나와 버립니다.


구립 수영장 코치로 목표 없는 세월을 보내던 광수는 준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리고 ‘집중’을 안 한다며 준호를 때린 뒤 이렇게 말합니다. “지나고 보니까 때리는 선생이 진짜 스승이더라. 니한테는 간절함, 뼛속까지 새겨진 간절함이 없어. 그래서 맨날 4등만 하는 거야.” 폭력은 이렇듯 질기게 대물림 됩니다.


 

준호가 맞는 게 두려워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안 맞고도 잘 하는 게 진짜 잘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다. [사진 워너비 펀]


준호엄마 정애(이항나)도 만만찮은 캐릭터입니다. 아들의 로드매니저 역할을 자청하는 그는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라고 말합니다. 두 아들을 쥐 잡듯이 잡습니다. 하지만 절에 가서는 아들 둘 잘 되기만을 비는 어머니입니다. 코치와 준호엄마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어이없게도 웃음 폭탄이 터집니다. “니만 없으면 준호 1등 할 끼야”라는 코치의 호통에 객석은 뒤집어집니다. 대치동 엄마, 치맛바람에 대한 ‘반감과 공감의 웃음’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준호엄마도 할 말은 있습니다. 실제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배우 이항나씨는 말했습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 사회가 너무 불안하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나도 전에는 ‘아이들 학원 뺑뺑이 돌리고, 달달 볶는 엄마들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을 하면서 저 엄마들만의 잘못은 아니겠구나, 엄마들은 이 불안한 사회에서 아이들을 지키는 최전선에 서 있구나, 그래서 욕을 먹는구나 싶었다. 속이 많이 상했다.”


 


“수영장 레인 걷으면 목욕탕 같은 편안함”영화 후반부에 준호가 새벽에 수영장에 숨어들어가 혼자 수영을 하는 신이 나옵니다. 준호가 자유롭게 유영하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정 감독은 수영장에 설치된 레인을 풀어버립니다. 정 감독은 시사회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수영장의 레인은 경쟁과 승부를 위한 장치다. 똑같은 수영장인데 레인을 걷으면 전혀 다른 느낌이 난다. 모두가 여유 있게 즐기는 목욕탕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근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수영장은 수영장이고, 목욕탕은 목욕탕입니다. 룰과 경쟁은 스포츠의 본질입니다. 경쟁이 빠진 스포츠는 ‘고무줄 없는 빤쓰’ 아닐까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영화 기획 일을 하는 김민아 선생을 만나 이 얘기를 나눴습니다. 정 감독과 함께 '4등' 각본 작업에 참여한 김 선생은 “물론 적당한 경쟁과 긴장은 삶의 의욕을 진작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남으면 사생결단이 된다. 수능이 끝나면 아파트 옥상에서 아이들이 떨어지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가더라도 한 템포 늦춰 가자, 주위도 좀 둘러보자, 이런 논의의 출발점으로 이 영화가 사용된다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 선생은 각본 작업 과정에서 만난 수영 코치의 말도 전해줬습니다. “호주에서 1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재계약을 위한 면접 때 첫 번째 질문이 ‘당신으로 인해 스포츠에 흥미를 잃은 아이가 있는가’ 였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우리 같으면 ‘당신으로 인해 아이들 기록이 얼마나 좋아졌나’를 먼저 물었을 것이다.”


다시 4등 얘기로 돌아갑시다.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뒤 제가 가르치는 경희대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를 내줬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혹은 가장 위대한 4등’을 정리해 오라고 했습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아름다운 4등은 장미란이었다. 여자 역도 75kg급에 출전한 장미란이 마지막 시도에 실패한 뒤 정들었던 바벨에 손키스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은퇴 무대를 4등으로 마감한 ‘역도 여제’ 장미란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교통사고로 인한 몸의 부상과 ‘2연속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마음의 부담을 안고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마지막 바벨을 내려놓은 뒤 그는 바벨에 따뜻한 손키스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같은 대회에서 ‘1초 오심’에 운 펜싱 신아람도 있습니다. 그는 여자 에페 개인전 준결승에서 종료 1초를 남기고 세 차례나 상대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계측 시간이 흐르지 않은 걸 잡아내지 못한 심판 때문에 결승행이 좌절됐습니다. 그는 피스트를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결국 4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신아람으로 인해 펜싱 국제대회 계측이 초 단위에서 100분의 1초 단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은 한국에 0-2로 져 4위를 했습니다. 한국 선수들이 ‘독도 세리머니’를 포함해 떠들썩한 축하를 주고받는 동안 일본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숙소를 쓰는 일본 선수들은 호텔로 돌아온 뒤 로비를 점령하고 시끌벅적한 파티를 벌였습니다. 선수들의 여자친구들도 함께 어울렸습니다. 일본 선수들은 눈이 휘둥그래진 한국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메달을 따지 못한 건 아쉽지만 최선을 다해 도전했고, 모든 일정이 끝났으니 마음껏 즐길 권리가 있다.”


더 큰 반전은 대회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한국 올림픽팀의 성공 요인을 치밀하게 분석해 자국 대표팀에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월 리우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결승에서 두 팀이 만났습니다. 일본은 한국에 두 골을 먼저 내주고도 후반 3골을 터뜨려 믿기지 않는 3-2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리우 올림픽 본선 톱 시드도 일본이 가져갔습니다.


 


은메달 따고도 “죄송합니다”라던 한국 선수‘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카피가 나온 게 9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땐 그랬죠. 올림픽 투기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한국 선수는 시상식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기자회견장에선 퉁퉁 부은 얼굴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2등이 그 정도니 4등이야 말할 것도 없죠.


이젠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4등이 1등보다 더 뜨거운 감동을 주고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을 일거에 바꿔버리는 4등도 있습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응축시켜 더 큰 도약을 준비하는 곳도 4등 자리입니다.


4등의 영어 표현은 ‘4th place’, 말 그대로 네 번째 자리입니다. 거기엔 어떤 가치나 서열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2014 소치 겨울올림픽이 끝난 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각 종목의 4등 선수들만 인터뷰 해 기획 기사를 실었습니다. 썰매 종목인 루지 개인전에서 4위를 한 안디 랑겐한(독일)의 말을 소개합니다. 낙담이나 체념이 아닙니다. ‘담담한 긍정’이라고 할까요.


“누군가는 4등을 해야 하는데, 그게 나다. (Somebody has to be fourth, and that’s me.)”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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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