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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입성 날, 런비스 “이제는 가난과 싸워야 한다”

1 스탈린의 특사 미코얀(오른쪽)과 골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런비스(가운데). 1949년 1월, 시바이포.


생각지도 않았던 승리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상대의 오만과 헛발질로 이겼을 경우, 정도가 더 심하다. 굶다 잔칫상 받은 사람들처럼 온갖 추태를 연출하기 일쑤다. 초기 중공 지도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중공은 1921년 창당 이래 수많은 난관을 극복한 혁명 정당이었다.


49년 3월 5일, 승리를 앞둔 중공은 마지막 농촌 지휘소 시바이포(西柏坡)에서 7차 전국대표자대회 두 번째 회의를 열었다. 오랜 작풍(作風)인 겸허(謙虛)와 근신(勤愼)을 강조하고, 교만과 성급함을 경계했다. 기본 전략도 수정했다. 참석자들은 “그간 농촌만 떠돌았다. 전략 거점을 도시로 이전한다. 당 지도자의 만수무강 기원과 도시나 거리를 지도자의 이름으로 개명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마오쩌둥(모택동·毛澤東)의 발언에 환호했다. 런비스(任弼時·임필시)의 발언은 간단했다. “중국은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변해야 한다. 전쟁 시절보다 더 절약해야 한다. 동판(銅板) 한 개, 기름 한 방울도 아끼지 않으면 그간의 노력은 허사가 된다.” 회의는 일주일간 계속됐다.


3월 23일, 중앙 기관과 인민해방군 총부(總部)는 시바이포를 떠났다. 런비스도 마오쩌둥, 주더(朱德·주덕),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함께 베이핑(北平·지금의 베이징)으로 향했다. 출발 전날 잠이 오지 않았다. 한 방에 둘러앉았지만, 탄식과 헛웃음 외에는 딱히 나눌 말이 없었다. 마오쩌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을 다스리기 힘든 밤이다. 아무리 자려 해도 눈이 감기지 않는다.” 저우언라이가 이유를 묻자 모두를 둘러보며 씩 웃었다. “동 트면 우리는 베이핑에 과거 보러 간다. 잠을 안 자도 기쁘다.” 끝나기도 전에 저우언라이가 말을 받았다. “낙방하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총사령관 주더는 군인다웠다. “쫓겨나도 그만이다. 다시 징강산(井岡山)에 가서 유격전 하면 된다.” 마오가 못한 말을 계속했다. “철수는 실패를 의미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자성(李自成)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런비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이자성은 명(明)나라 말기 농민 폭동의 지도자였다. 18년간 악전고투 끝에 베이징에 입성해 명 왕조의 숨통을 끊어 버렸지만, 준비가 부족했다. 예하 지휘관들의 부패와 오만으로 40일 만에 베이징에서 쫓겨난 비운의 혁명가였다.

2 베이핑 입성 후 담당 의사와 경호원·취사병과 함께한 런비스(앞줄 오른쪽 세 번째)와 부인 천충잉. [사진 김명호]


베이핑까지 가는 길엔 국민당군에게서 노획한 100여대의 군용 트럭과 20여대의 미군 지프를 동원했다. 교외의 유서 깊은 공항에서 입성 열병식이 열렸다. 관계기관에서 서기들에게 건의했다. “서기들의 복장이 남루하다. 땀과 먼지투성이다. 옆에만 가도 이상한 냄새가 진동한다. 새 옷을 준비했다.” 런비스는 동의하지 않았다. “34년, 장정 도중 적에게서 뺏은 전리품이다. 이 옷을 입고 천하를 평정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난과 불평등·불합리와 싸워야 한다. 적만 바뀌었을 뿐,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입고 베이핑에 입성하겠다.”


후쭝난(胡宗南·호종남)에게 근거지 옌안(延安)을 내주고 농촌과 산간을 전전하며 전쟁 지휘한 지 2년 만이었다.


런비스는 원칙을 준수하는 사람이었다. 원칙에 어긋나면 상대가 누구라도 양보하지 않았다. 간부들에게 엄격했고, 자신에게는 더했다. 옛말을 자주 인용했다.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시키지 않아도 아랫사람이 행한다. 바르지 못하면 시켜도 복종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화를 남겼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강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항일전쟁이 한참이던 41년, 중공은 궁핍에 시달렸다. 당 살림을 도맡아 하던 런비스는 궁여지책을 썼다. “각자 먹고 살 길을 찾아라.” 런비스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단위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양식을 거뒀다. 여인들도 팔을 걷어 부쳤다. 런비스는 절약한 자금을 홍콩에 투자하고 이윤은 직접 관리했다. 국민당 내부에 침투해있던 비밀당원과 국민당 관할 구역에서 암약하던 지하당원이 활동 경비를 원 없이 쓴 것은 순전히 런비스 덕분이었다.


장칭도 당시에는 말이나 행동이 헤프지 않았다. 한번은 워낙 쪼들리다 보니 런비스가 관장하던 특별회계과를 찾아와 추가 경비를 요청했다. 직원에게 거절 당하자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씩씩거렸다. 보고를 받은 런비스는 회계 직원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다. 원칙에는 상하가 없다.”


장칭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쪼르르 마오쩌둥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다. 전말을 들은 마오는 장칭에게 속사포를 퍼부어댔다. “런비스가 그런 사람인줄 몰랐느냐? 주석의 생활비서라는 사람이 회계원에게 대들고, 주먹으로 책상 내려치는 못된 습관은 어디서 배웠느냐? 당장 가서 사과해라.”


그 길로 마오쩌둥은 런비스의 숙소를 찾아갔다. 무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원인을 알게 된 런비스는 당황했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뒷머리를 쓸어 내렸다. 표정이 어찌나 근엄했던지 마오는 폭소를 터뜨렸다. 런비스가 따라 웃자 배꼽을 잡으며 한마디 했다. “너도 웃을 때가 있구나. 모두 장칭 덕분이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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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