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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40)

성종 어진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공신집단보다 왕권이 미약한 현실을 인정하고 학문을 연마하며 때를 기다렸다. 우승우 화백



세조가 말년에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종친세력은 성종 즉위와 동시에 쑥대밭이 됐다. 성종 5년(1474)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종친사환금지(宗親仕宦禁止)를 규정해 종친은 법적으로 정치에서 배제시켰다.



[수험생과 부모가 함께 보는 NIE] -40- 절반의 성공 - 성종①

열두 살에 임금이 된 성종은 즉위 초 공신집단에 맞서지 않았다. 권력은 공신들의 것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위한 국왕을 수업시키는 경연(經筵)의 주체 역시 원상(院相)들이었다. 정희왕후는 성종 즉위년 12월 8일 원상들을 영경연(領經筵)으로 겸임시켜 성종의 교육을 맡겼다. 정희왕후가 성종 1년(1470) 1월 “주상(主上)께서 처음 학습하면서 문리(文理)에 통하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로 성종은 학문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종은 이후 하루 두 번의 경연에 성실히 임하면서 학문이 일취월장했다. 성종은 학문에 전념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현실은 공신들의 것이지만 미래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종 6년(1475) 11월 승정원에 붙은 익명의 벽서 사건으로 이듬해 초 대왕대비 윤씨가 물러나고 성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왕권은 아직 미약했다. 권력은 계유정난(1453)부터 시작해 성종 친정 때까지 장장 23년간에 걸쳐 형성된 공신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공신 집단은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경제력도 막강했다. 세조가 공신들에게 준 대납권(代納權: 세금을 대신 납부해주고 두 배 이상을 받는 권리)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었다. 어떠한 불법을 범해도 처벌 받지 않는 면죄부까지 갖고 있는 공신들은 공신전(功臣田), 별사전(別賜田: 공신에게 내려준 토지), 과전(科田: 관원에게 내려준 토지) 등에서 규정 이상의 막대한 전세(田稅)를 받아 치부했다.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질 수밖에 없었고 많은 물의가 일었다.?급기야 세금 담당부서인 호조에서는 성종 6년(1475) 11월 사헌부에 이를 막을 수사권을 주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불법으로 더 많은 전세를 빼앗긴 백성들은 사헌부에 고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신들을 상대로 시골 백성이 서울의 사헌부까지 올라와 고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종은 이 문제를 원상에게 의논하라고 시켰다. 원상 한명회·정창손은 그런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성종은 원상들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친정이 시작되어 대비 윤씨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원상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원상제는 왕권을 강하게 제약했지만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하기를 꺼려 했다. 드디어 성종 7년(1476) 5월 15일 대사헌 윤계겸(尹繼謙) 등은 시무책 9개조를 올려 원상제를 정면에서 거론했다.? 윤계겸은 그러나 같은 상소에서 의정부 서사제(署事制)의 부활도 요구했다. 원상제 폐지와 맞바꾸자는 절충안이었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에서 집행부서인 육조(六曹)의 보고를 받아 먼저 심사하고 국왕에게 보고하는 반면 그때까지 시행하던 육조(六曹) 직계제는 육조에서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였다. 의정부 서사제는 의정부 정승들이 육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였다. 원상들은 성종이 원상제를 폐지하는 대신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키는 절충안을 택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종의 생각은 달랐다.? 의정부 서사제는 부활시키지 않고 원상제만 폐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성종이 허수아비 왕 노릇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성종은 아직 왕권이 공신들과 맞설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종은 훈구 공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위 9년(1478) 설치한 기관이 홍문관(弘文館)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홍문관이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한(文翰)을 처리하며, 국왕의 자문 기능을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사실상 세조 때 폐지된 집현전의 부활이었다. 홍문관은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렸는데, 탄핵권과 언론권을 갖고 있는 언관(言官)이었다. 성종은 재야 사림(士林) 출신의 과거급제자들을 주로 삼사에 배치해 공신들을 견제했다. ?이들은 세조 때 등장한 부패한 훈구(勳舊) 공신 세력과 자신들을 구별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성종 무렵 사림은 훈구 공신에 반대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그런 정치적 사림의 선구 격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다. ? 사림이 훈구 공신들과 대립한 것은 순수한 학문적 세계관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양자는 토지를 두고 격렬하게 충돌했다. 사림들은 지방에 상당한 규모의 토지와 노비를 갖고 있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이었는데 훈구 세력이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양자가 충돌했던 것이다. 김종직뿐만 아니라 정여창·김굉필 등도 대부분 농장과 노비를 가진 재지사족들이었다. 이처럼 사림도 조선의 지배층이자 지주였다. 토지를 둘러싼 싸움도 양자 사이의 정치적 대립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남효온의 육신전 현덕왕후 권씨의 복위를 주장했던 남효온은 훗날 『육신전』을 써서 상왕복위기도 사건이 정당하다고 역설했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드디어 성종 9년(1478) 4월 양측이 충돌했다. 흙비[土雨]가 내리자 성종은 널리 구언(求言: 난국을 타개할 의견을 구하는 것)했는데, 사육신의 전기인 『육신전(六臣傳)』의 저자가 되는 유학(幼學) 남효온(南孝溫)이 응지(應旨) 상소를 올려 여러 방안을 건의했다. 그중에 “하늘에 계시는 문종의 영(靈)이 홀로 제사를 받기를 즐겨 하시겠습니까?”라면서 ‘소릉(昭陵) 추복(追復)’을 주장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소릉은 단종의 모후 권씨의 능인데 파헤친 장본인이 세조라는 점에서 시대의 금기를 거론한 것이었다.?당연히 훈구 세력들이 발끈했다. 도승지 임사홍이 ‘신자(臣子)로서 의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나섰고 심지어 국문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구언에 응한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이를 깨자는 주장이었다. 성종이 응지상소는 처벌하지 않는다며 처벌에 반대하자 한명회까지 나서 국문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은 갓 성장하고 있는 사림의 싹을 잘라 조정을 훈구 공신 일색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구언(求言)하고서 또 국문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반대했다. 소릉 복위는 무산되었지만 무소불위의 공신 세력에 정면에서 맞설 수 있는 신진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림들은 성리학의 대의(大義)와 의리(義理) 같은 명분론을 중시했다. 수양의 즉위를 찬(簒: 신하가 왕위를 빼앗는 것)으로, 단종의 죽음을 시(弑: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로 보았으니 공신 집단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었다.



성종 12년(1481)에는 압구정(鴨鷗亭)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6월 24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는 성종에게 “명나라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보려고 하는데 정자가 매우 좁으니 만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고 성종은 승지를 사신에게 보내 “압구정은 좁아서 유관(遊觀)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세조가 쿠데타를 추인받기 위해 명에 저자세 외교를 하고 난 후 명 사신의 위세는 더욱 커졌던 것이다. 공신 집단은 명 사신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심지어 한명회는 명 황제에게도 뇌물을 바쳤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한명회는 압구정이 좁아서 잔치할 수 없다고 말한 다음날인 6월 25일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명회가 아침에 명 사신을 찾아갔더니 자꾸 권유해 주반(晝飯: 점심)을 함께했다면서 압구정 잔치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명 사신이 “얼굴에 난 종기가 낫지 않았으므로 (내일 압구정에) 갈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말하기에 신이 “나가 놀면서 구경하면 병도 나을 텐데 하필 답답하게 객관(客館: 태평관)에 오래 있겠습니까?”라고 청했더니 상사(上使)가 “마땅히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성종실록』 12년 6월 25일) 명 사신이 안 가겠다는 것을 자신이 권유해 오도록 했다는 말이다. 오지 않겠다는 사신을 억지로 초청해 놓고 정부에서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성종은 하지 않아도 될 잔치를 하게 만든 한명회에게 화가 나서 압구정이 아닌 제천정에서 치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성종의 결정에 반발한 한명회는 자제를 보내서 항의했다.?압구정이 아닌 잔치에는 가지 않겠다는 항변이었다. 승지들은 신하의 예가 없다면서 국문(鞠問)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명회는 변명에 나섰다. 성종은 곧 사헌부에 한명회의 “무례가 막심하다”면서 “추국(推鞫)해서 아뢰라”고 추가 조치를 내렸다. 그런데 사헌부는 불러서 묻지 않고 서면으로 질문하는 공함(公緘)으로 조사했다. 사간원에서는 “마땅히 조옥(詔獄: 의금부 감옥)에 내려 그 사유를 취조해야 하는데 지금 편안히 집에 앉아 공함으로만 물으니 매우 미편(未便)합니다”고 항의했다. 성종은 “이미 사헌부에 추국을 명했으니 의금부로 옮길 수 없다”라며 투옥까지 시키지는 않았다.? 7월 1일 사헌부에서 한명회의 죄상을 보고하자 성종은 의정부의 견해를 물으라고 말했다. 비록 부처는 면했지만 한명회의 시대가 서서히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드디어 성종 18년 한명회와 정창손이 세상을 뜨면서 세조 때의 원상들이 모두 사망했다.?그러자 적개 1등공신이자 좌리 4등공신인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이 공신 집단의 대표로 부상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인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가 윤필상의 당숙(堂叔)이므로 국왕의 인척이기도 했다. 성종 23년 12월 이목(李穆) 등 성균관 유생들이 윤필상 공격에 나섰다. 이 무렵 인수대비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완화할 것을 요구했는데 윤필상 등이 동조한 것이 원인이었다. 성종은 화를 내면서 “수상은 내가 존경하는 바이니 간사한 귀신이라는 정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라”고 꾸짖었다.? 이 무렵 사림은 구체적인 증거보다는 유학에 비추어 간신이라는 식으로 대신들을 공격했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성종은 이목 등 8명을 옥에 가두었다가 이목을 제외하고 석방했으나 언로(言路)가 막힌다는 대간의 간쟁이 잇따르면서 이목도 석방시켰다. 성종은 훈구와 사림 중 어느 한쪽을 붕괴시킬 생각은 없었다. 성종이 보기에 훈구세력은 나라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반면 사림은 일체의 부정을 용납 않는 도덕성이 있었다.?성종은 양자를 적절히 활용해 왕권을 강화했다. 양자의 이런 역학관계를 이용하는 것이 왕권 강화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연산군이 즉위한 후 공신들이 사림을 공격한 것이 사화(士禍)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53호 2010년 2월 12일, 제155호 2010년 2월 28일, 156호 2010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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