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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⑫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 빅뱅이 있었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복음 1장1절)


성서는 우주의 출발점을 ‘태초’라고 표현한다. 과학은 다르다. 천체물리학자들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표현한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시작되는 출발점을 ‘빅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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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출발점을 ‘빅뱅’으로 본다. 그래서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고 말한다. [사진 빅 히스토리 프로젝트 공식 홈페이지]

저명한 국내 천체물리학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이렇게 물었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그 질문을 안고서 그는 두 눈을 감았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나는 평생 동안 우주를 연구했다. 나도 수도 없이 묻고, 또 물었다.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빅뱅 이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나?’ 숱하게 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그걸 묻지 말자.’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내게는 그 말이 ‘고백’으로 들렸다. 이 무한한 우주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질문의 낭떠러지, 그 끝자락에서 털어놓는 고백으로 들렸다.

그 ‘고백’을 향해 다시 물었다. “만약에 ‘빅뱅 이전’이라는 게 ‘있다면’ 어찌 되나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빅뱅’이라는 출발선을 그만큼 더 앞쪽으로 당겨야 한다. 거기가 다시 ‘빅뱅’이란 새로운 출발선이 되는 거니까. 과학자로서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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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관측우주선 `익스플로러`가 우주 망원경으로 찍은 은하계들. [중앙포토]

우주의 시작과 끝. 과학에서는 그걸 ‘직선’으로 본다. 가령 ‘빅뱅’을 부산역이라고 하자. 천체물리학자들은 부산역에서부터 우주가 비롯됐고, 대구역과 김천역을 거쳐 지금껏 달려오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성서는 ‘부산역 이전’을 말한다. 성서는 ‘빅뱅 이전’을 말하고, 과학은 ‘빅뱅 이후’를 말한다. 그래서 둘은 충돌한다. 마치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처럼 양자택일의 대상이 되고 만다. 정말 그런 걸까. ‘빅뱅 이전’과 ‘빅뱅 이후’는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걸까. 성서와 과학은 그토록 이질적인 걸까.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는 사도 요한이다. 그는 12사도 중 가장 어렸다. 각종 성화에서도 요한은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앳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언뜻 보면 아리따운 여성으로 보일 정도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복음 13장23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 제자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요한복음 13장23절)을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는 예수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제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베드로조차 예수에게 “그게 누구냐?”고 직접 묻지 못했다.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대신 물어봐 달라는 신호였다. 그 제자는 ‘예수님께 더 다가가’(요한복음 13장25절) 그게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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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복원작. 예수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고 하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장면이다. 다혈질인 베드로가 예수를 가리키며 사도 요한에게 뭔가 말하려 한다. 베드로 앞에 갸롯 유다가 앉아 있다.

그 제자가 누구일까. 성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본다. ‘요한복음’의 저자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직접 언급할 수가 없어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요한을 사랑했을까. 열 두 제자 중 요한을 왜 각별히 아꼈을까. 베드로도 묻지 못했던 질문을 그가 물었을까. 나이가 어려서일까. 나는 ‘요한복음’에서 그 답을 찾는다.

4복음서 중에서 마태ㆍ마가ㆍ누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독특한 색깔’이 있다. 그건 ‘요한의 눈’을 통과한 영성의 스펙트럼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요한을 사도 바울(바오로)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신학의 눈’만으로 닿을 수 없는 풍경이 ‘요한복음’에는 녹아 있다. 그런 각별함이 사도 요한에게 있었던 게 아닐까.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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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의 무덤’이라는 팻말이 있다. 팻말 뒤가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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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서부의 에게해 연안의 고대 도시 에베소에 있는 사도 요한의 무덤. 12사도 중 유일하게 사도 요한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12사도 중 11명이 죽임을 당했다.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고, 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사도 요한만 늙어서 죽었다고 전한다. 요한은 90세가 다 된 나이에 그리스의 밧모(파트모스)섬에 유배를 당했다. 그는 거기서 18개월이나 살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배지는 일종의 ‘수도원’이기도 한 걸까.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수백 권의 책을 썼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썼다고 한다. 일부 성서 학자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사람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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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밧모섬의 부두. 대형 여객선이 고린도와 밧모섬을 오간다. 배에 자동차를 싣고 밧모섬을 찾는 휴양객들도 꽤 있었다.


그리스 고린도(코린토)에서 배를 타고 밧모섬에 간 적이 있다. 오후 10시에 배를 타고 출항해 밤새 파도를 갈랐다. 이튿날 오전 7시에야 밧모섬에 도착했다. 섬은 무척 아름다웠다. 흰 건축물과 깔끔한 해안 등 지중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별장 같은 저택들이 곳곳에 보였다. 요한 당시에는 달랐다. 밧모섬은 로마 시대 중범죄자들의 유배지였다. 온갖 흉악범들이 이 섬에 우글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요한의 거처는 평평한 땅에 있지 않았다. 밧모섬의 가파른 산, 길이 험한 동굴에서 그는 살았다.

밧모섬은 작은 섬이다. 섬 가운데 높지 않은 산이 있었다. 산길을 올랐다. 산 위에 오르자 밧모섬 일대가 내려다 보였다. 들쭉날쭉한 해안선이 장관이었다.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 거칠고 황량한 유배지에 불과했겠지.’ 90세의 노구를 이끌고 요한은 이 가파른 길을 오르내렸을 터이다. 요한은 그렇게 기도하고, 묵상하고, 복음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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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머물렀던 곳에서 내려다 본 밧모섬. 요한은 가파른 산의 동굴에서 지냈다.

‘요한복음’은 첫 구절부터 남다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출생’으로 시작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풀면서 복음서가 전개된다. ‘누가복음’은 수태고지 일화와 예수의 탄생으로 막을 연다.

‘요한복음’은 다르다. 육신의 예수, 족보의 예수가 출발점이 아니다. 창세기와 연결된 우주적 존재, 예수의 주인공, 신의 속성을 통해 복음서의 문을 연다. 성서 학자들은 “그리스 등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예수의 주인공’을 꿰뚫어보는 깊은 영성의 안목이 담겨 있다. 그게 ‘요한복음’의 각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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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머문 동굴에 지금은 ‘성 요한 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요한이 살았던 동굴로 내려갔다. 계단은 가팔랐다. 지금은 동굴 위에 ‘성 요한 수도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사들이 거기서 지내고 있었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당시 요한이 엎드려 기도를 하다가 일어설 때 짚었다는 동굴의 벽면에 홈이 파져 있었다. 90세의 노구였으니 몸을 일으킬 때마다 짚을 곳이 필요했다고 한다. 순례객들은 그 홈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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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요한복음서’를 썼다는 동굴이다. 순례객들이 ‘요한복음’을 읽으며 묵상하고 있다.

나는 동굴 구석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요한복음’을 펼쳤다. 눈을 감았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5절)

예수는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장21절)고 말했다. 그럼 ‘빛’은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 내 안에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빛이 내 안에 있는데도, 빛이 보이질 않는다. 어둠 때문이다. ‘나의 눈’은 어둠에 익숙하다. 빛이 있는데도 어둠만 바라본다. 왜 그럴까. ‘빛’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어둠은 그(빛)를 깨닫지 못하였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만 ‘예수’를 몰라본 게 아니다. 2016년에 살고 있는 우리도 ‘내 안의 빛’을 몰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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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 스토메르의 1639년작 ‘사도 성 요한’. 프랑스 렌미술관 소장.

사도 요한의 그림에는 종종 ‘독수리’가 등장한다. 요한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를 당당하게 그린 용맹함, 그리고 ‘예수의 사건 전달’에 치중한 다른 복음서들보다 ‘예수의 의미’를 다룬 ‘요한복음’이 각별하다는 뜻에서 높이 나는 독수리가 사도 요한의 상징이 됐다고도 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독수리 복음’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가 왔다. 빛과 하나가 된 사람이 왔다. ‘요한복음’은 그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 1장14절)고 표현했다. 예수는 우리에게 일러준다. 어둠을 녹이고 빛을 찾는 방법을 말이다. 그게 복음서에서 피어나는 예수의 온갖 어록들이다. 그 메시지로 인해 내 안의 어둠이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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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의 1490~92년작 ‘밧모 섬의 성 요한’.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90세가 다 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복음서를 쓰고 있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복음 1장15절)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먼저 태어났다. 일부 신학자는 세례요한을 예수의 스승쯤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자신보다 늦게 태어난 예수에 대해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고,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세례 요한은 겉으로 보이는 예수를 말한 게 아니다. 예수의 내면에 있는 ‘예수의 주인공’을 가리켰다.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건 우주가 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나보다 앞서신 분’은 우주보다 앞선 이를 의미한다. 그게 뭘까. ‘빅뱅 이전’이다. 사람들은 따진다.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콕 집어서 말해봐. ‘빅뱅 이전’이 뭐야? 그게 어디에 있어? 지금 여기서 직접 내게 보여봐.” 그렇게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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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모섬의 아담한 가게. 지중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밧모섬도 로마 시대에는 흉악범들의 유배지였다.

요즘 밧모섬은 고급스러운 휴양지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저택이 있고, 바닷가에는 보트가 늘어서 있다. 갈매기가 날고,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쨍하다. 산 중턱에는 올리브 나무가 자란다. 이 모든 자연이 생겨나기 전, 우주가 태어나기 전, 바로 거기에 ‘말씀이 있었다’며 ‘요한복음’은 시작된다. 사도 요한이 말한 ‘태초’는 무엇일까. 그건 과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의 출발점 ‘빅뱅’과 어떻게 다른 걸까. ‘빅뱅’ 이전에 정말 뭔가 있을 수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우리는 ‘빅뱅 이전’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요한복음 1장1절)

‘태초에’는 그리스어로 ‘en archE(εν αρχη)’다. 영어로 풀면 ‘in the origin’이다. ‘우주의 근원’‘우주의 바탕’을 뜻한다. 그건 시간적 개념도 아니고, 공간적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공간의 바탕에 해당한다. 그런데 ‘태초’를 ‘in the beginning’으로 풀면서 ‘시간상의 출발점’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럼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 아니면 빅뱅이 있었나’를 따지게 된다. 그래서 ‘빅뱅’이론과 충돌한다.

가령 100m 달리기 코스가 있다. 과학자들은 ‘빅뱅’을 100m 달리기의 출발선으로 본다. 왼쪽 끝의 출발점, 거기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다. 가스구름이 생기고, 그 속의 원소 알갱이들이 충돌한다. 그러다 덩어리가 생기고, 덩어리끼리 또 충돌한다. 부서진 조각들이 더 크게 뭉치고, 그게 별이 된다. 별이 별끼리 부딪히고, 부서지고, 다시 뭉치며 더 큰 별이 생겨난다. 그게 태양이 되고, 목성이 되고, 지구가 되고, 달이 된다. 그렇게 낮과 밤도 생긴다. 과학자들은 이 우주의 출발점을 ‘100m 달리기 코스의 출발선’으로 본다. 그게 ‘빅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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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이후 138억년이란 우주의 시간이 흐르면서 무수한 은하계가 나타났다. [중앙포토]

성서는 달리 말한다. ‘빅뱅 이전’을 말한다. ‘100m 달리기 코스의 출발선 이전’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빅뱅이 우주의 출발선인데 ‘출발선 이전’이라는 게 어디 있나. 만약 있다면 출발선을 그쪽으로 옮겨야지”라고 반박한다. 왜 그럴까. 과학자들은 왜 ‘빅뱅 이전’을 부인할까. 이유가 있다. 과학자들은 100m 달리기 코스의 선상에서 ‘빅뱅 이전’을 찾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간’이라는 선 위에서 ‘빅뱅 이전’을 찾고 있다.

그런 식으로는 ‘빅뱅 이전’을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시간’이라는 선은 빅뱅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이다. ‘빅뱅 이전’에는 그런 선도 없었다. 다시 운동장을 들여다보자. 100m 달리기 코스가 있다. 출발점에 하얗게 선이 그어져 있다. 100m 달리기를 시작하는 곳, 거기가 ‘빅뱅’이다.

우주의 대폭발이 있었고, 그로 인해 무수한 별과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 그렇게 우주의 역사가 시작됐다. 10m, 20m, 30m 지점에도 하얗게 선이 그어져 있다. 그게 우주의 역사다. 과학자들은 빅뱅 이후 지금껏 138억년이란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 시간의 끝자락에서 인간이 출현했다고 한다. 다시 운동장을 들여다본다. ‘빅뱅 이전’은 어디에 있을까.

‘빅뱅 이전’은 시간과 공간의 바탕이다. ‘100m 달리기 코스’의 바탕이다. 빅뱅 이후 흘러온 138억년이란 어마어마한 시간의 바탕이다. 거기가 어디일까. 다름 아닌 ‘운동장’이다. ‘100m 달리기 코스’의 전체를 품고 있는 바탕이다. 그게 ‘빅뱅 이전’이다. 그러니 ‘빅뱅 이전’은 어디에 있을까. 출발선 속에도 있고, 10m 지점에도 있고, 15m 지점에도 있고, 20m 지점에도 있다. ‘빅뱅 이전’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신 분’이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다. 이 모든 창조물의 바탕에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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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모섬의 들녘에 양귀비꽃이 피어 있었다. ‘빅뱅 이후’에 피어난 꽃 속에도 ‘빅뱅 이전’은 이미 깃들어 있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3절) ‘운동장’으로 풀면 이렇게 된다. ‘모든 달리기 코스가 운동장을 통해 생겨났고, 운동장 없이 생겨난 코스는 하나도 없다.’

그럼 어디일까. 우리가 신을 찾아야 할곳 말이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곳 말이다. 그건 출발선이자, 13m 지점이자, 27m 지점이자, 39m 지점이 아닐까. 달리기 코스의 모든 시공간이 아닐까. 그게 어디일까. 다름 아닌 우리의 일상이다. 그곳에 ‘빅뱅 이전’이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138억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빅뱅’의 순간을 거슬러야만 만날 거라 생각했던 ‘요한복음’의 ‘태초’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걸 알면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하루는 ‘신비’가 된다. 사도 요한도 그런 신비를 체험하며 살았다. 유배지인 밧모섬에서도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나는’ 걸 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정을 달리는 벚꽃은 무엇을 통해서 피는 걸까. 이제 막 싹을 틔우는 신록은 또 무엇을 통해서 생겨나는 걸까.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교통체증은, 우산도 없는데 느닷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는 어떤 걸까. 모두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나는 걸 깨닫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일상은 신비가 된다. 어마어마한 신비가 된다. 그런 신비 속에서 나의 하루가 피고 진다. 나의 삶이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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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모섬의 골목 풍경.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나는’ 걸 깨달으면 우리의 일상에서 태초의 신비가 피어난다.

그런데 궁금하다. 왜 철수에게는 ‘신비’가 드러나고, 영희에게는 ‘신비’가 드러나지 않는 걸까. 누구는 그걸 보고, 또 누구는 그걸 못보는 걸까. 숫자 ‘0’은 참 오묘하다.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지만 ‘0’의 고향은 사실 인도다. 인도에서 만들어진 숫자가 아랍으로 전해졌다. 그걸 다시 유럽으로 전한 건 아라비아 상인들이다. 그래서 유럽사람들이 ‘아라비아 숫자’라고 불렀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 ‘순야(Sunya)’ 또는 ‘순야타(Sunyata)’란 말이 있다. 기원전부터 사용하던 용어다. ‘빈 채로 있음’‘형상이 없음’‘만물의 근원’이란 뜻이다. 인도 수학에서 이걸 ‘0’이라고 표현했다. 인도 수학에서 ‘순야’라는 말은 ‘0’이란 뜻이다. 그게 중국으로 건너가서 ‘공(空)’ 또는 ‘진공(眞空)’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 ‘진공’은 묘하게 존재한다. 왜 그럴까. 없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진공묘유(眞空妙有)’다.

그럼 숫자‘0’의 진공묘유는 뭘까. ‘0’은 ‘없음’인데, 그 ‘없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렇다. ‘1’ 속에 있고, ‘2’ 속에 있고, ‘3’ 속에 있고, ‘4’ 속에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온갖 숫자들 속에, 풍경들 속에, 사람들 속에 ‘0’이 이미 들어가 있다. 그게 어디일까. ‘나의 일상’이다. 그렇게 ‘0’은 이미 ‘1’속에 있는데, ‘1’은 ‘0’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빛이 어둠 속에 있는데, 어둠이 빛을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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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도 레니의 1640년작 ‘책 읽는 사도 요한’. 리히텐슈타인박물관 소장. 사도 요한의 성화에는 종종 책이나 독수리, 컵 속에 든 뱀 등이 등장한다.

밧모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밤하늘은 맑고, 별들은 더 맑았다. 사도 요한은 18개월간 저런 별들을 바라봤을 터이다. 저 수많은 별마다 ‘0’이 들어 있다. 별뿐만 아니다. 밧모섬의 바닷가에도, 몰아치는 파도에도, 무리지어 앉은 갈매기들 속에도 ‘0’이 들어 있다.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0’이 들어 있다. ‘댕그렁, 댕그~렁.’ 산 위의 수도원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그속에도 ‘0’이 들어 있다. 태초의 신비, ‘빅뱅 이전’이 우리의 일상에 녹아 있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어둠 속에 빛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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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의 동굴에서 내려다 본 밧모섬의 전경이다. 요한은 유배지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았다. 어둠 속에 빛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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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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