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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국·공 합작, 장제스 옌안 공격 눈치 챈 마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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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4일 옌안을 떠나기 직전, 회의에서 연설하는 런비스. 왼쪽부터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마우쩌둥, 오른쪽 첫 번째가 주더.


모든 동물은 전쟁을 통해 먹고 산다. 인간도 동물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항일전쟁 승리 후, 국·공 양당은 무력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눈만 뜨면 지역이 확대되고 규모도 커졌다. 전쟁이 끝난 줄 알았던 국민들은 불안했다. 군사력은 국민당이 우세했다. 중공은 열세였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국민은 평화를 갈망한다”며 서로 삿대질을 해댔다.

그때도 미국은 약방의 감초였다. 중재에 나섰다. 마셜 원수를 특사로 파견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도 중국에선 통하지 않았다. 1947년 1월, 실패를 인정하고 중국을 떠났다. 3월 7일, 중공은 난징(南京)과 상하이의 중공연락사무소와 신화일보(新華日報)를 폐쇄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동비우(董必武·동필무), 왕빙난(王炳南·왕병남)등 중공 대표단 74명도 중공 중앙 소재지 옌안으로 돌아갔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변 이후 아슬아슬하게 지속되던 국·공 합작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전면전에 앞서 군의 사기를 고려했다. 중공의 심장부 옌안을 노렸다. 중공 대표단이 난징을 떠나기 전인 2월 28일, 시안에 있던 후쭝난(胡宗南·호종남)을 난징으로 호출했다.

황푸(黃)군관학교 1기생 후쭝난은 장제스의 직계였다. 1세대 중공당원 중에 동창도 많고 친구도 많았지만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항일전쟁기간 후쭝난은 시안에만 주둔했다. 임무도 별게 아니었다. 3개 집단군을 거느리고 시안을 압박하는 일본군 견제와 중공의 항일 근거지 산베이(陝北·산시(陝西)성 북부) 지역 동향 파악이 다였다. 시안은 중공 중앙이 있던 옌안과 지척간이었다.

후쭝난은 국·공 쌍방의 병력을 열거하며, 그간 수집한 정보를 상세히 보고했다. 장제스는 흡족했다. 3월 1일, 후쭝난이 국방부에 제출한 옌안 공략 방안을 승인했다. “3월 10일 작전을 개시해라.” 당시 옌안에는 미군 시찰단이 와있었다. 이들이 12일 떠난다는 보고를 받자 작전 일자를 14일로 변경했다. 후쭝난의 기요비서(機要秘書·정보참모) 슝샹후이(熊向暉·웅상위)는 중공 비밀당원이었다. 후쭝난의 작전계획을 송두리째 옌안으로 보냈다. 3월 8일, 중공은 옌안 시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런비스(任弼時·임필시)가 집회를 주도했다. “옌안을 보위하자(保衛延安)” 구호가 요란했다.

슝샹후이의 정보는 정확했다. 14일 새벽, 후쭝난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20만명이 세 갈래로 옌안을 공격했다. 중공 중앙서기처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 제안했다. “옌안에서 철수한다.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와 주더(朱德·주덕)는 화베이(華北)성 핑산(平山)현으로 이동해 시바이포(西柏坡)에 새로운 농촌 근거지를 마련해라. 산베이는 13년간 우리를 감싸줬다. 가볍게 포기하고 떠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나와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산베이에 남아 전쟁을 지휘한다.”

마오쩌둥이 마지막 농촌 지휘소로 시바이포를 선택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항일전쟁 시절, 중공 관할 지역인 핑산현 서기가 옌안에 온 적이 있었다. 집회에서 무턱대고 앉다 보니 마오쩌둥과 런비스 가운데였다. 두리번거리다 일어서는 순간에 마오쩌둥이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씩 웃으며 물었다. “어디 사람이냐?” “핑산현입니다.” 마오는 무릎을 쳤다. “녜룽전(?榮臻·섭영진)에게 익히 듣던 지역이다. 거기서 뭘 했느냐?” “현 위원회 서기를 하고 있습니다.” “서기라면 그곳에 대해 잘 알겠구나.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 날 따라와라. 내 방에 가면 고구마가 있다.”

정직한 시골 서기는 말주변도 좋았다. 연신 고구마를 먹어가며 고향 자랑에 날새는 줄 몰랐다. “항일전쟁 초기, 우리 핑산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참전했습니다. 8로군 주력 3개 사단에 핑산 자제들로 2개의 여단이 꾸려질 정도였습니다. 어찌나 용감했던지, 녜룽전 동지에게 ‘철군(鐵軍)’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일본 놈 때려죽이다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아들 없는 집이 거의 없습니다. 민풍이 순박하고, 산수가 뛰어납니다. 용이 숨어있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을만한 곳입니다.” 말을 마친 현 서기는 차로 목을 적시더니 고구마에만 열중했다.

마지막 남은 고구마까지 비운 현 서기는 배를 쓸어내더니 마오와 런비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웃음으로 답한 마오가 계속하라며 손짓하자 현 서기는 더 신이 났다. “들어보셨는지 몰라도, 시바이포는 우리 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주변에 10여 개의 마을이 널려있는, 토질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한 곳입니다.

녜룽전 동지도 ‘우크 뭐’ 같은 곳이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옆에 있던 런비스가 “우크라이나”라고 하자 “맞다”며 손뼉을 쳤다. 이날 이후 마오쩌둥은 각계 인사를 만날 때마다 시바이포에 관한 질문을 빠뜨리지 않았다. 런비스와 녜룽전의 분석도 일치했다. “시바이포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용납하고도 남을 지역이다.”

마오쩌둥과 런비스, 저우언라이는 소수의 경호원과 무전병만 데리고 산베이를 떠돌았다. 가장 작은 인원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을 지휘했다. 화베이의 중심도시 스자좡(石家莊)을 점령하자 황하(黃河)를 건넜다. 일행은 시바이포에서 류샤오치·주더와 합류했다. 다들 승리를 확신했다.

런비스는 걱정이 많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이유를 물었다. 역시 런비스였다. “지금까지 한 고생은 고생도 아니다. 앞으로가 더 힘들고 복잡하다. 이 많은 인구 먹여 살릴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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